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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74)화 (73/1,192)

제74화

극한의 분노에 휩싸였던 묵용감은 승려가 수행을 하듯 가만히 눈을 감고 목욕통 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간 아주 조심스럽게 이 사건을 추진해 왔다. 상대방이 손을 쓸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백여름과 끝까지 싸우기 위해 자신의 사람을 대리사 내부에 배치했을 만큼 모든 계획이 완벽했다.

백여름이 직접 그자들을 찾아가 해하고 싶어도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기에, 이번 일은 그의 참패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백천범에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이씨 부인이 처형당하는 꼴을 보여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오히려 자신의 체면만 깎이게 된 것이다.

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그가 몇 차례 손을 내려치자 사방으로 물기둥이 솟아올라 바닥을 적셨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홍과 녹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가만히 숨을 죽였다.

기홍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체 누가 왕야의 심기를 건드린 거야? 저렇게 표정이 안 좋으신 걸 보면 백 승상과 무슨 일이 있던 건가?”

녹하가 말했다.

“왕비 마마의 일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지. 아직도 결론이 안 났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기홍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적모가 서녀를 죽일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가여운 왕비 마마. 어릴 때부터 고생만 하시고 우리보다도 못한 삶을 사셨으니.”

“왕비 마마께는 이제 왕야가 계시니 고생 끝 행복 시작이지.”

녹하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총 관리인 어르신께 말씀드려서 왕비 마마를 모셔 올 사람을 보내라고 해야겠어. 왕비 마마께서 오시면 왕야의 화도 금방 풀리시겠지.”

기홍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네. 내가 말씀드려 볼게.”

* * *

목욕을 마치고 나온 묵용감은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묵용택의 모습을 보고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곳은 무슨 일로 온 것이냐, 황제 폐하의 대변인으로 온 것이냐?”

묵용택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셋째 형님도 참. 황제 폐하의 대변인이라니요. 이렇게 많은 형제들 중에 그래도 제가 형님의 친동생이니 직접 찾아와 노여움을 달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묵용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옷자락을 털며 의자에 앉았다. 기홍은 묵용감에게 차를 올린 뒤 두 형제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묵용택이 고개를 돌려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셋째 형님, 대체 뭐가 그리 화가 나는 것입니까? 형님께서는 백여름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십니까? 그자의 부인은 왜 죽이시려는 것입니까?”

“그자가 주모자인데도 죽일 필요 없다는 것이냐?”

“설사 그자가 주모자라 해도 백 승상에게 책임을 물으셔야지요. 죽지는 않더라도 흠은 낼 수 있을 테니 경고는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묵용감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백여름을 증오하는 것은 맞지만 서로 별개의 일이지 않느냐. 왕비 말로는 모든 것이 다 그자의 부인이 한 짓이라 했다. 백여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란 말이다.”

묵용택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셋째 형님, 사실은 왕비 마마를 위한 일이었군요.”

“물론이지. 본왕의 정실 왕비인데 마땅히 그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응당 그리하셔야지요.”

묵용택이 눈을 깜빡이며 더욱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셋째 형님의 부인이시니 아껴 주기만 해도 부족할 텐데 괴롭힘까지 당하시다니요. 셋째 형님도 당연히 지켜만 보고 계실 수는 없으셨겠지요.

다만 조금 과하게 화를 내셨습니다. 황제 폐하까지 화나게 하신 걸 보면 왕비 마마께서 셋째 형님의 애간장 좀 태우시나 봅니다!”

흠칫 놀란 묵용감이 곧장 굳은 얼굴로 말했다.

“허튼소리! 내가 백여름 그 작자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질 않느냐? 백천범이 그의 딸인 것은 맞지만 그자가 버린 딸이나 다름없다. 나의 저택으로 보냈으니 이제 이곳 사람이 된 것이지.

가여운 아이다. 마음 편히 지냈던 적이 거의 없을 만큼 여기저기서 괴롭힘만 당하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누군가 해하려 들기 일쑤니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있었겠느냐. 낳을 줄은 알아도 기를 줄은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 같으니!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게 내버려 두고도 아비라고 할 수 있더냐!”

묵용택이 그의 속내를 물었다.

“정말 다른 생각은 없으신 것입니까?”

묵용감이 답했다.

“다른 생각은 무슨! 그저 불쌍한 아이래도. 내가 착한 사람까진 아니더라도 백여름보다는 조금 더 인간적이지 않더냐. 이곳에 보내졌으니 다른 건 몰라도 평생 잘 보살펴 주는 것쯤이야 문제없지.

다음 달이 열다섯 생일이라는구나.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지만 너도 봐서 알다시피 그게 어딜 봐서 열넷의 체구라고 할 수 있단 말이냐. 그저 여동생으로 삼을 뿐이지. 그간 잘 길러 준 다음, 후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볼 것이다.”

말을 마친 묵용감이 고개를 들어 보니 백천범이 기둥 옆에 서서 새까만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단 말인가?

괜스레 흠칫 놀란 묵용감은 서둘러 평소 모습을 되찾고 쾌활하게 물었다.

“언제 온 것이오?”

백천범이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왕야의 기분이 좋지 않으시다고 하길래 뵈러 왔습니다. 그 일 때문에 언짢으신 것인지요?”

묵용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셋째 형수님께 안부 인사드립니다.”

백천범이 얼굴을 붉히며 자신도 곧장 예를 갖췄다.

“진왕야, 이렇게까지 예를 갖추시다니요. 사실 저는, 그것이… 왕비가 아닙니다. 왕야의 말씀은…….”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초왕야가 자신을 평생 잘 보살펴 주는 것쯤이야 문제없다는 말에 감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금세 자신을 여동생 삼아 돌봐 준다는 말을 했다.

그의 이러한 말로 봐선 초왕비라는 칭호도 조만간 내려놓아야 할 듯했다. 이렇게 겉만 그럴듯한 왕비로 지내는 것도 편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진왕이 인사를 올리면 받아 주면 그만이지.”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왕비는 분명 본왕과 혼사를 치렀거늘 누가 감히 그 사실을 부정한단 말이오?”

“하지만…….”

“하지만 뭐요?”

묵용감이 어느새 성질을 부리며 말하고 있었다.

“설마 본왕이 왕비에게 잘 못해 주는 것이오? 아니면 혹 본왕이 왕비에게 걸맞지 않은 사람인 것이오?”

백천범은 놀라다 못해 겁을 먹었다.

“왕야?”

묵용택이 서둘러 상황을 중재했다.

“셋째 형님, 노여움 푸시지요. 셋째 형수님께서 놀라셨습니다.”

백천범의 놀란 모습에 묵용감은 풍선이 터지듯 곧장 화를 가라앉히고 안정을 되찾았다.

“오늘은 무얼 하였소?”

“특별히 한 것은 없고, 방에서 수를 놓았습니다.”

백천범이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그에게 보여 주었다.

“바느질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손가락이 다 찔려서 이렇게 피가 맺혔습니다.”

겨우 화를 가라앉힌 묵용감의 얼굴이 또다시 어두워졌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세히 살폈다.

“어려우면 그만두면 될 것을, 손이 찔리는 게 그리도 재미있단 말이오?”

비록 그의 말투는 딱딱했지만 백천범의 마음은 따뜻해졌다. 초왕야가 이렇게 자신을 아끼는 걸 보니 정말 여동생으로 여기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별거 아닌걸요. 기홍 언니가 그러는데 언니도 처음 배울 때 이랬대요.”

“그 애는 시녀지만 당신은 왕비인데 어찌 같을 수 있겠소? 이제 그만 하시오.”

“안 됩니다. 주머니를 만들어 드리기로 약속했단 말이에요.”

주머니는 자신에게 만들어 주기로 약속한 것이었고 그녀의 작은 성의 표시이기도 했다. 하고 있던 걸 멈추게 할 수는 없었기에 잠시 고민하던 그도 결국 승낙했다.

“그럼 주머니만 만들고 나면 곧장 그만두시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는 제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주머니에 수를 놓고 나면 실력이 생길 텐데, 설마 또 찔리진 않겠지요.”

묵용택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자신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게 여동생을 대하는 태도란 말인가?

퍽퍽하기만 했던 셋째 형의 인생에도 드디어 봄이 오는 듯했다. 지금은 인정하지 않지만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참으로 궁금했다.

묵용감이 물었다.

“노랑이는?”

“남월각에 있어요. 요즘은 보살펴 주는 이가 있으니 저랑 돌아다니는 것도 귀찮은가 봐요. 호사를 누리는 아가씨가 다 되었다니까요.”

묵용택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노랑이는 누굽니까? 설마 강아지입니까?”

“아뇨.”

백천범이 설명했다.

“병아리예요. 지금은 조금 크긴 했지만요.”

묵용택이 웃으며 말했다.

“셋째 형수님께서는 닭을 애완동물로 기르시는군요. 더럽지는 않습니까?”

“노랑이는 깨끗해요. 인간이랑 통하는 면이 있거든요. 볼일도 아무 데나 보지 않아요.”

묵용택이 흥미로운 듯 말을 이었다.

“분명 셋째 형수님께서 잘 가르치셨기 때문이겠지요.”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셋째 형수님께서는 강아지도 좋아하시는지요? 친구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검정색과 흰색에 살도 아주 포동포동한 게 퍽 귀엽더군요. 형수님께서 좋아하신다면 한 마리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외톨이인 그녀에게는 함께 지내는 식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묵용감이 말을 받아쳤다.

“친구는 무슨 친구, 하나같이 기방의 기녀들이겠지. 강아지가 갖고 싶거든 내가 하나 사 주면 되니 그건 안 될 일이다. 우리 귀하신 진왕께서 나설 일은 아니니 체통을 지키십시오.”

묵용택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니었다. 초왕이 자신에게 괜한 질투를 하는 진귀한 모습까지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백천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사실 용모는 꽤 괜찮은 편이었지만 아직 체구가 너무 작아 그의 눈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였다.

상황을 보니 식사를 대접할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가 대놓고 물었다.

“셋째 형님, 한동안 같이 술잔을 기울이지도 못한 듯한데 점심으로 한 잔 기울이는 게 어떠신지요?”

묵용감이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곧 나가 봐야 하니 너도 그만 가 보아라.”

“형님께서는 어디를 가십니까? 방향이 같으면 저와 함께 가시지요.”

“너는 가마를 타는데 말을 타고 가는 나와 어찌 함께 갈 수 있겠느냐?”

묵용감이 고개를 돌려 백천범에게 말했다.

“어서 채비를 하시오, 내 그대를 백 승상 댁에 데려다 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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