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유모 유씨는 비어 있는 방으로 끌려왔다. 종이와 붓을 든 누군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자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글을 쓸 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진술하는 내용을 대필한 뒤 서명만 하면 되었다.
그녀는 유모 제씨보다 나이가 더 많았지만 제씨만큼 악랄하진 않았고 담력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상황을 인지하고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그저 제씨를 도와주는 역할이었을 뿐 주동자는 아니었다. 잘만 얘기하면 자신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그동안의 일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유모 유씨가 자백한 내용을 제씨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 주자 제씨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죄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기에 그녀는 또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고집스런 사람은 묵용감도 처음 볼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있었다.
“이자를 형방에 가두어 발톱을 다 뽑아 버리거라. 발톱을 다 뽑은 뒤엔 손톱을 뽑아라. 뼈가 얼마나 단단하기에 이리도 고집스러운지 내가 한번 봐야겠다!”
멀쩡한 손발톱을 뽑아 버린다니,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유모 제씨가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벌벌 떨었다. 비통한 마음에 탄식을 내뱉은 그녀는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적어도 죽기 전에 고통 하나는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짧게 글을 배웠던 그녀는 붓을 쥐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 쓴 뒤, 붓을 내려놓은 그녀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방으로 데려가 저자의 손발톱을 모두 뽑아 버리거라.”
깜짝 놀란 유모 제씨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용서를 빌었다.
“왕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왕야…….”
묵용감의 눈에 냉기가 서렸다.
“곧 죽을 목숨이기에 본왕이 아주 작은 형벌을 내린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봐주는 일은 없었다!”
백천범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유모 제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악랄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죽음을 앞두고 고문까지 받는다니 조금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가 힘겹게 입을 뗐다.
“왕야, 제 생각에는…….”
묵용감이 그녀를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 하지 않았소? 이 악랄한 자가 몇 번이나 왕비를 해하려 했는데도 도움을 주려는 것이오?”
엄격한 표정과 차가운 목소리에 백천범은 몸을 움츠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다. 두 범죄자는 관아로 끌려갔고, 그들과 어울려 나쁜 짓만 배운 후원의 무수리들도 전부 내쫓았다. 양려낭의 시녀로 보내졌던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회림각의 무수리 두 명을 남월각으로 보냈다. 그들의 이름은 월향月香과 월규月桂였다. 둘 다 영리했을 뿐만 아니라 회림각에서 일한 덕에 누구보다 저택의 규율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무수리 네 명, 머슴 두 명까지 더 보내졌다.
남월각에 보내진 첫날, 보통은 학평관이 주의 사항을 전달하지만 초왕야가 직접 그들을 찾아왔다. 별다른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왕야가 거들떠도 보지 않던 백 승상 댁 아가씨였다. 하지만 이렇게 그가 직접 찾아와서 주의를 주는 지금은 왕야가 왕비를 끔찍이 생각한다는 뜻이었으니, 예전의 상황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다. 여덟 사람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왕비를 모시기 시작했다.
양려낭은 곧 떠날 사람이었으니 따로 하인을 붙이지 않았고, 홀로 알아서 지내게 내버려 두었다.
남월각의 시녀들은 부지런히 백천범의 방을 정리했다. 더 이상 그녀의 물건을 탐해 몰래 가져갈 자는 없었으니 모든 물건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가져다 두었다.
새로워진 남월각을 바라보던 백천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정말 자신의 공간이 생긴 것이었다.
매일 밖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 자신을 해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씻는 것을 챙겨 주는 이도 생겼다. 백 승상의 집에서는 무수리보다도 못한 생활을 했지만 이제는 귀한 대접을 받는 여인이 된 것이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깨끗하게 닦인 탁자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옷장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전부 다 새 옷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예쁜 새 옷을 만지던 그녀는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환하게 웃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 화장대 앞으로 가니 연지와 참빗, 정교한 구리거울까지 놓여 있었다. 본 적은 있었지만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귀한 것들이었다. 한쪽에 놓인 보석함 안에는 묵용감이 선물한 장신구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묵용감이 문 앞에 서서 신이 난 백천범의 모습을 착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인데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걸 보니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눈에 훤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쉽게 전염되었기 때문에 그 또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던 괴로움이 한데 얽혀 이상하고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가 그녀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허리를 굽히고 유리잔을 닦는 백천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건 하인들에게 시키시오. 곧 식사 시간이니 식사부터 하러 갑시다.”
고개를 든 백천범은 별안간 입가에 핀 미소를 거두더니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옆으로 향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학평관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린 왕비의 화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단 말인가? 왕야는 이미 왕비에게 참을 만큼 참았으니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따르는 게 좋았다.
엊그제 일로 아직까지 그녀의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건 묵용감도 알고 있었다. 이틀이나 지났는데 어린 계집아이가 참으로 꽁한 성격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다.
“왕비에게 장난을 친 것 가지고 이렇게 오랫동안 화를 내는 것이오? 왕비를 해하려 한 유모에게는 오히려 도움을 주려 하더니……. 이게 무슨 이치란 말이오?”
백천범이 눈을 내리깔고 탁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유모 제씨는 제가 개의치 않는 사람이니 저에게 아무리 못된 짓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왕야는 제가 소중히 여기는 분입니다. 왕야께서 제게 진심으로 잘해 주시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 왕야께서 저를 속이신 것입니다.”
묵용감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묵용감은 서재로 돌아와 한밤중까지 서예를 했다.
“왕야는 제가 소중히 여기는 분입니다.”
자그마한 입으로 부드럽게 내뱉은 그녀의 말에 그의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는 그 말을 들은 뒤로 기분이 퍽 좋았다. 이제 그도 그녀를 소중히 여겨 더 잘 대해 줄 것이었다. 자신을 속이는 일이 없으면 될 일이었다.
그는 붓을 들고 한참이나 획을 긋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자신이 백여름의 딸을 소중히 여기다니.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백여름은 자신이 필요로 하지 않는 딸을 자신에게 보낸 것이었다. 아마 시집을 보낸 뒤,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묵용감은 절대 그의 뜻대로 해 줄 수 없었다. 백여름의 눈 밖에 난 딸이 자신의 곁에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모습을 보여 주면 그자의 체면도 깎을 수 있었다.
시집을 온 이상 백천범은 이제 이곳의 사람이었다. 이씨 부인이 손을 쓰고 싶어 해도 앞으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정식으로 사건 조사가 진행되자 그의 예측대로 곧장 대리사大理寺가 사건을 주관했다. 초왕과 백 승상이 관련된 일이니 일반 관아에서 감히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리사경大理寺卿 장기생張紀生도 골치가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세 명은 살해되었고, 한 명은 정신을 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초왕의 정비를 해하려 이렇게나 큰 소란을 벌였으니 응당 엄벌에 처해야 했다.
다만 살해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도, 일을 사주한 귀비 백씨의 모친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적모가 서녀를 죽이려 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이제 그 서녀에게 든든한 배후가 생겼으니 양쪽 모두 막강한 인물들이 버티고 있는 셈이었다. 그 또한 함부로 어느 한쪽의 미움을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건을 쉽게 처리할 수 없어 판결이 계속 미뤄졌지만 묵용감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설사 황제 앞에서 이 일을 문제 삼는다 해도 그는 떳떳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금란전金鑾殿에서도 소란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초왕야와 백 승상이 대전에서 서로 논쟁을 벌이니 황제도 난감했다. 한쪽은 병권을 장악한 초왕이고, 다른 한쪽은 드높은 위상을 가진 승상이었기 때문이다.
후궁 백 귀비는 훌쩍이며 황제에게 애원했다. 이렇게 큰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집안일인 데다가 하인들이 어머니의 뜻을 오해해 벌인 일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유모 제씨와 유씨는 대리사로 옮겨진 뒤 자백 내용을 번복했다. 이씨 부인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백천범을 해하려 한 것이라고 말을 바꾼 것이다.
묵용감은 끝까지 이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암암리에 보상을 약속하고 죄를 뒤집어씌운 게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황제에게 죄인들을 대전에 불러 달라고 청했다. 백여름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묵용감에게서는 어림도 없었다. 그저 가족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무서운 협박만 당할 게 분명했다.
황제가 거듭 그에게 암시를 보냈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와 백 승상의 관계를 알고 있던 황제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한참이 지난 뒤 전갈이 왔다. 형벌이 두려웠던 두 시녀가 자살을 택했다는 것이다. 죄인이 죽으면 사건도 자연스레 종결될 것이었다.
화를 참지 못한 초왕이 백 승상의 가슴팍을 발로 차려 하자, 주변에 있던 대신들이 겨우겨우 그를 붙잡았다.
그의 모습에 크게 노한 황제가 초왕을 호되게 꾸짖었다. 왕이라는 자가 군중을 앞에 두고 행패를 부리다니! 애당초 황제는 안중에도 없는 게 틀림없었다.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초왕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황제에게 용서를 빌었다. 황제도 정말 죄를 물으려던 것은 아니었기에 손을 내저으며 어서 돌아가라 명했다.
황제는 묵용감이 끝까지 이 일에 달려들까 봐 근심스러웠다. 그는 백 승상의 의견을 물은 뒤, 진왕에게 묵용감을 따라가 타이르라 일렀다.
하지만 가마를 탄 진왕이 말을 탄 초왕을 뒤쫓기란 쉽지 않았다. 진왕이 저택에 도착해 회림각에 들어섰을 때, 묵용감은 이미 목욕을 하러 간 뒤였다. 끓어오르는 화를 삭일 곳이 없으니 찬물에 들어가 식히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