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그는 자신의 이런 복잡한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단지 그가 그녀에게 마음의 빚, 그것도 아주 많은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녀가 돌아오자 그는 까닭 없이 안심이 되었다. 다만 그녀를 마주 대하기에는 조금 겸연쩍어 먼 산만 바라보았다. 서로의 시선 안에 있으면서도 대면하지 않는 게 그나마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한 명은 연못가에서 물고기를 구경했고, 다른 한 명은 정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상대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모두 볼 수 있었다.
묵용감의 기분이 점차 나아지는 듯 보이자 그를 곁에서 모시던 녹하가 천천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왕야와 왕비가 서로 눈을 마주쳤을 때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후원의 일을 해결하기만 하면 평화로운 날만 이어질 게 분명했다.
묵용감은 유모들의 악랄함을 알게 된 이상 백천범을 후원에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녀가 여덟 살 때 우물에 빠졌던 일만 생각하면 그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으로 그런 위험한 일을 두 번 다시 겪게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비는 잠시 회림각에 머무르게 되었고, 사람을 보내 노랑이도 회림각으로 데려왔다. 노랑이는 포도나무 덩굴 아래에서 신나게 뛰어다녔다.
왕비가 회림각에서 지내게 된 이상 계속 묵용감의 방에서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기홍과 녹하가 빈방을 정리해 백천범에게 내어 주었다. 묵용감의 방과 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방의 창문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이었다.
유월이 되자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묵용감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 앞에서 바람을 쐬곤 했다. 그러다 가끔 둥글고 쪼글쪼글한 게 불쑥 솟아올랐다가 금방 사라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체구가 작은 백천범이 창문 앞을 지날 때면 그녀의 정수리만 눈에 들어왔다. 가만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걸 보면 노랑이와 장난을 치는 듯했다. 건너편에서 날아든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묵용감의 귓가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묵용감은 그녀의 말소리를 들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간 그의 생활이 쓸쓸하고 적막했다면 백천범이 온 뒤로는 퍽 소란스러웠다. 예전에는 떠들썩한 게 싫었지만 지금은 그 소란스러움이 무척이나 좋았다.
이렇게 자그마한 아이가 늘 눈앞을 알짱거리며 크고 까만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고 헤헤 웃으며 입버릇처럼 왕야를 찾았다. 고작 한 사람이 더 늘었을 뿐인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회림각에 매일 눈부신 햇살이 비치듯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 * *
정신이 나간 청지는 따로 보살핌을 받으며 의원에게 치료를 받았다. 후원의 빈 처소에 지낼 곳을 마련해 주고 매일 약을 먹이며 그녀를 돌봐 주는 사람과 보초를 서는 사람을 붙였다.
모두들 초왕의 이런 결정을 의아해했다. 정신이 나간 하녀는 초왕의 사람도 아니었으니 다시 백 승상의 집으로 보내면 될 일이었다. 설마 초왕야가 덕을 쌓으려 선행이라도 베푸는 것인가?
정원 앞을 지나던 누군가가 청지의 절규를 들었다.
“누구인지 압니다. 누가 청매를 죽였는지 안다고요!”
그녀는 계속해서 이 말만 되풀이할 뿐, 뒷얘기는 하지 않았다.
후원의 하인은 몇 되지 않았으니 이 소식이 곧 남월각에도 전해졌다. 유모 유씨는 직접 정원 앞을 다녀온 뒤 남월각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제씨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네, 청지 계집애를 어찌 할 작정인가?”
유모 제씨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미 정신이 나갔는데 누가 그 애의 말을 믿겠습니까?”
“그래도 조심해야지. 초왕야가 왜 그 애의 병을 치료하고 보초를 서는 사람을 붙였겠나. 다 무슨 속셈이 있어서일 게야.”
유모 제씨가 매서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초왕야는 대체 뭐 하자는 거랍니까? 백천범을 가둬 둘 땐 언제고, 지금은 회림각에 데리고 있다니요. 그 애가 또 무슨 수를 쓸까 봐 직접 눈앞에 두고 감시라도 하는 것이란 말입니까?”
“다섯째 아가씨의 일은 잠시 미루는 게 좋겠네. 우선 청지의 일이 급하지. 내가 돈을 쥐여 주어서라도 정보를 캐낼 테니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네.”
유모 제씨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이고, 역시 이 동생을 챙기는 건 형님밖에 없다니까요. 어쨌든 형님과 저는 한배를 탄 사이이니 이럴 때일수록 더 힘을 합쳐야 합니다.”
유모 유씨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 일에 자신까지 엮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열심히 알아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에 아무런 기색도 내비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우리는 마님을 모시는 하인이니 다 같이 무사하길 바라야 하네.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서둘러 마님께 우리를 도와달라고 서신을 보내야 할 걸세. 계집종이야 다 그 애들 팔자이니 우리라도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유모 제씨가 말을 이었다.
“그럼 한번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돈만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없었다. 유모 유씨는 앞뜰의 한 무수리로부터 청지를 진찰한 의원의 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충격으로 인해 잠시 정신 이상 증세를 겪는 것이고, 충분히 안정을 취하면 금방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두 유모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초왕야가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니! 역시 다른 속셈이 있던 것이었다.
그날 밤 두 유모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청지가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원래는 청지까지 해할 생각이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도망친 그녀를 놓치고 말았다.
진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인지 정신이 나간 척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정말 그녀의 정신이 돌아와 입을 열기라도 하는 날엔 두 유모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지자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그날 밤, 초왕의 행동을 떠올려 보면 분명 백천범을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증거가 명확하게 있자 더 조사도 하지 않고 백천범을 감금한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더니 오히려 백천범을 회림각으로 데려갔다. 이 또한 좋은 징조라고 할 수는 없었다.
두 유모는 상의한 끝에 두 단계로 이루어진 계획을 짜냈다. 우선 백 승상 댁에 서신을 보내 놓은 뒤에 청지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두 유모는 지금까지 이씨 부인의 수하로 지내면서 거의 모든 분야에 도가 터 있었다. 청지가 묵는 곳의 보초 교대 시간과 그녀를 돌보는 하인이 누구인지 쉽게 파악했고 하나하나 계획대로 착실히 준비했다.
거금을 할애해 뇌물을 주며 다른 하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그녀를 해할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함께 이곳에 온 동료로서 괴로운 마음에 그녀를 보고 싶은 것이라 둘러댔다.
눈물을 닦으며 동정을 산 뒤, 은자를 쥐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초를 서는 머슴은 입장이 난처했지만 유모들의 말에 홀려 한 명만 들여보내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유모들이 바라던 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제 남은 일을 잘 수습한 후에 백 승상 댁에서 사람을 보내면 당당하게 이곳을 떠나기만 하면 되었다. 이곳만 떠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설사 청지의 죽음을 자신들 소행이라 의심한다 해도 증거 하나 없이 백 승상의 저택에 쳐들어올 리는 없었다.
사람을 해하는 일은 유모 제씨가 전문이었기 때문에 제씨가 안으로 들어갔다. 유씨는 보따리를 안고 앞뜰 입구에서 제씨를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청지가 정자 난간에 앉아 손에 나뭇잎 몇 장을 쥐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며칠 안 본 사이 멀쩡했던 아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초점을 잃은 두 눈에 피부는 누렇게 떠 있었고, 머리는 단정히 빗어 넘기긴 했지만 윤기 하나 없이 푸석했다. 동글동글했던 얼굴은 얼마나 야위었는지 뼈밖에 남지 않아 뾰족해 보이기까지 했다.
청지는 유모 제씨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멍하니 손에 쥔 나뭇잎만 만지작거렸다. 옆에서 청지를 돌보는 시녀에게도 이미 수를 써 놓았기 때문에 시녀는 그들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자연스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유모 제씨가 청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쯧쯧, 딱한 아이 같으니.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것이냐, 청지야. 여기서 고생 그만하고 어서 가자꾸나.”
그녀가 다른 한쪽 손을 포개더니 중지에 낀 반지를 돌렸다. 막 청지를 공격하려는데 갑자기 어깨가 저릿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초왕의 호위무사가 그녀의 팔을 붙잡고 매섭게 호통을 쳤다.
“대낮에 사람을 해하려 하다니, 담도 참 크구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게 놀란 유모 제씨는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영구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냈다. 햇빛에 비춰 보니 가느다란 독침이 옅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능구렁이 같던 유모 제씨는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지만 끝까지 최후의 발악을 했다.
“영구 호위무사님, 지금 뭐 하시는 것입니까?”
영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지를 들어 그녀에게 가까이 가져다 댔다.
유모 제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그의 손을 빠져나가려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어느새 사람들이 그들 주변을 에워쌌다. 묵용감과 백천범의 모습도 보였다. 묵용감이 슬쩍 손을 들어 올리자 영구가 한 걸음 물러섰다. 더 이상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유모 제씨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종이와 붓을 든 사람이 돌상 앞으로 가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네가 지금까지 저지른 죄를 낱낱이 쓰거라. 인자하신 왕야께서 사사로운 벌은 면하고, 관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셨다.”
유모 제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발각되었으니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비록 청지를 해하려 한 죄는 벗을 수 없어도, 앞선 세 명의 목숨은 그녀와 아무런 관련도 없었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백천범과 함께 죽기로 마음을 굳혔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모 유씨는 가동에게 붙잡혔다. 가동은 그녀에게 유모 제씨가 청지를 해하려다 현장에서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유모 유씨는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씨 부인이 보낸 사람도 이미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가동의 말에 감히 안으로 들어설 생각도 하지 못했고,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백 승상의 저택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