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영구도 갑작스런 왕비의 방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왕비 마마께서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영구 무사님을 보러 왔죠.”
그녀가 영구에게 다가가더니 별안간 그의 손을 잡고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난처했던 영구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백천범이 그의 손을 누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마음이 켕겼던 영구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 한동안 손을 살펴보던 백천범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까치발을 들고 영구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도둑!”
흠칫 놀란 영구가 말했다.
“왕비 마마, 누가 도둑이란 말씀이신지요?”
“영구 호위무사님이요!”
말을 마친 백천범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영구는 얼이 빠진 채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동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왕비 마마께서 다녀가셨어?”
“제게 도둑이라 욕을 하시던데요.”
“…망했다, 어제 일을 다 아신 거야.”
“…왕야를 찾아가셨겠군요.”
“아닐걸. 왕비 마마께서 아셨다 해도 왕야를 찾아가 원망하시진 못할 거야. 아마 우리 둘이 다 짊어지게 되겠지.”
* * *
세수를 하고 있던 묵용감은 백천범이 찾아와 자신 앞에 서자 웃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동그란 눈을 부릅뜬 채 입을 잔뜩 내밀고 금방이라도 따져 물을 듯한 계집아이의 모습에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어제 일 때문인 듯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던 그는 조금씩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왕야, 저를 보기 부끄러우신지요?”
“부끄러울 게 뭐가 있소?”
묵용감이 다시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겨 태평하게 말했다.
“본왕이 왜 왕비를 보기 부끄럽다는 것이오?”
“찔리실 테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본왕처럼 올곧고 정직한 사람이 찔릴 게 뭐가 있소?”
백천범의 가슴이 몇 차례 들썩였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듯했다.
“어제 절 저잣거리에 데리고 가신 것은 다른 계획 때문이셨죠?”
“본왕은 그저 왕비를 데리고 시장 구경을 하려던 것인데 무슨 다른 계획이 있었겠소?”
백천범이 화를 참지 못하고 손으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인정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사내대장부가 그런 일을 꾸밀 배짱은 있으면서 인정할 배짱은 없는 것인지요? 왕야께서는 겁쟁이시군요?”
그녀가 마음에 있는 말을 한바탕 쏟아내자 한쪽에 서 있던 기홍과 녹하, 학평관이 대경실색하며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묵용감이 성을 낼 기미를 보이자 그들이 애원하듯 말했다.
“왕야, 참으시옵소서. 왕비 마마께서 어제 너무 놀라셔서 그런 것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옵소서, 왕야.”
묵용감은 지금까지 자신의 부왕父王을 제외하고 감히 그의 면전에서 욕을 퍼붓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하늘 같은 초왕야가 어린 계집아이에게 삿대질을 당하며 겁쟁이라고 욕을 듣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백천범은 그보다도 더 많이 화가 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견딜 수 있었다. 마구 맞아 얼굴이 퉁퉁 붓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잘해 주는 척 뒤에서 다른 일을 꾸미고 있었다니! 그 음모를 눈치채지 못해 마음이 약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일이 분명해졌다. 믿던 사람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은 그 기분은 정말이지 괴로웠다.
세상에 자신의 편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그녀는 자신이 믿는 사람을 유난히 아꼈다. 백방으로 알아본 후에야 조심스레 마음의 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인 것이었는데, 다 헛된 일이었다. 모든 게 계략이고 음모였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입가도 미세하게 떨려 왔지만 자신의 나약함을 보여주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피가 새어 나왔다.
여린 분홍빛 입술이 새빨간 피로 물들자 새하얀 그녀의 얼굴이 더 차갑게 보이는 게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매서운 모습이었다. 평상시에는 순하디 순한 고양이가 지금은 털을 잔뜩 세운 듯 날카로워 보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밖에서 이 모습을 목격한 가동과 영구도 조마조마해하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공기마저 적막했다. 차원이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이를 악물고 글썽이는 눈물을 참으려는 백천범의 모습에 그의 화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결국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백천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왕비도 참, 그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오? 본왕이 왕비에게 장난을 친 것이오.”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그의 손을 벗어나더니 무거운 탄식을 내뱉고는 곧장 방을 뛰쳐나갔다.
방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이들은 안절부절 못하며 어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 묵용감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앉아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가서 쫓지 않고!”
세 사람은 면죄부라도 받은 듯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뛰어갔다. 묵용감과 함께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그가 뿜어내는 살벌한 냉기에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사실 그들은 어린 왕비에게 적잖이 감탄했다. 초왕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붓는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몸에서 그렇게 큰 기백을 뿜어내다니 참으로 대단했다!
중문을 향해 달려가던 백천범의 앞을 차씨가 막아섰다. 눈치가 빨랐던 그는 자신이 모시는 학평관이 왕비를 뒤쫓아 오자 그 앞을 막아선 것이다. 그는 감히 백천범을 붙잡을 수는 없었기에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왕비 마마, 학평관 어르신께서 부르십니다.”
백천범은 그를 한쪽으로 밀쳤다.
“안 비키면 나도 참지 않을 테니 조심하시지요.”
차씨가 바닥에 엎드리며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왕비 마마, 가시면 아니 됩니다. 어르신이 왕비 마마를 찾으신단 말입니다.”
그사이 학평관이 그녀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왕비 마마, 돌아가시지요. 돌아가지 않으시면 오늘 회림각의 모든 이들이 큰 벌을 받을 것입니다. 왕야께서 크게 성이 나셔서 단체로 곤장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백천범이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곤장을 내리는지요? 왕야나 맞으라고 하십시오.”
학평관이 넉살을 부렸다.
“왕비 마마께서 왕야께 곤장을 내리시지요. 왕비 마마께서 직접 형벌을 내리셔야지 저희들은 왕야께 대적할 수 없사옵니다.”
백천범은 더 이상 이들과 말씨름을 하기조차 싫었다. 그저 회림각을, 가식적인 노비들 곁을 떠나고 싶었다. 차씨의 손을 뿌리치려 그녀가 발을 걷어차자 차씨가 곧장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소리쳤다.
“아이고, 내 눈!”
앞으로 달려가던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을 찬 적은 없는데요.”
그녀가 걸려들자 차씨는 다시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의 속임수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화가 난 백천범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하나둘씩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예요! 노비는 주인을 닮는다더니 수치심도 모르는 나쁜 사람들 같으니!”
학평관이 차분히 그녀에게 청했다.
“왕비 마마, 남월각으로 돌아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부디 소인들을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왕비 마마를 데려가지 못하면 소인들이 벌을 받을 것입니다.
왕야께서 이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모습은 소인도 처음 봅니다. 왕비 마마께서 돌아가셔야만 왕야의 화가 누그러질 것입니다. 왕비 마마, 부디 한 번만 소인들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연로한 학평관이 이렇게까지 애원하니 백천범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그녀가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를 일으켰다.
“알겠어요. 왕야한테 갈게요.”
자신과 함께 돌아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학평관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늘 상황을 지켜보니 왕야가 왕비의 눈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언제 어린 왕비가 왕야와 동등한 지위가 되어 버렸단 말인가?
묵용감은 아침을 먹기 위해 정자에 있었다. 이미 아침을 먼저 먹은 백천범에게 기홍이 간식으로 과자를 내어왔다. 그녀는 과자를 손수건에 감싸 연못가에 앉아 물고기를 구경하며 하나씩 집어 먹었다.
학평관이 다가와 송사리를 기르는 물동이를 바라보았다.
“오, 수련이 한 송이 피었습니다. 참으로 예쁘군요.”
역시 그의 말에 백천범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항아리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이고 반쯤 핀 수련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을 띠는 자주색 꽃 가운데 연한 노란색 꽃술이 보였다. 자그마한 꽃송이가 둥근 연잎 위를 수놓으니 정말 예뻤다.
학평관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비에게 말을 걸었다.
“왕비 마마께서 물고기를 기르고 싶어 하시는 걸 아시고 왕야께서 특별히 이렇게 수련을 옮겨 심으라 명하셨습니다. 물고기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면 왕비 마마께도 볼거리가 될 테니까요. 왕비 마마, 왕야께서는 늘 왕비 마마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백천범은 고개를 치켜세우고 손수건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조심스레 입으로 털어 넣었다. 손수건을 탁탁 털어 다시 소매에 쑤셔 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어제 일만 빼면 요즘 묵용감은 그녀에게 꽤 잘 대해 주는 편이었다. 머리를 빗겨 주고 옷감을 상으로 내려 녹하에게 옷을 만들어 주라며 명을 내리기도 했다.
녹하가 만들어 준 옷은 배두렁이 같은 속옷부터 겉옷까지 하나하나 세련되고 예뻤다. 하지만 남월각의 노비들 눈에 띄어 또다시 뺏길까 봐 조금씩 몰래 가지고 갈 계획이었다.
그리고 망신을 산 그날 밤에도 그녀가 그의 침대를 더럽혔지만 자신을 책망하기는커녕 기홍에게 보양식을 만들어 주라고 했다.
백천범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굵직한 붉은색 기둥에 선 그녀가 묵용감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정자에 앉아 있던 묵용감도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자 조금 당황한 두 사람은 서둘러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화를 낼까 봐 걱정하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수지간인 백 승상이 자신에게 딸을 보낸 것은 누가 보아도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거짓 호의를 베푸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알아보려 한 게 대체 뭐가 그리 잘못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모습으로 뛰쳐나가는 그녀를 보니 다른 걸 고민할 겨를도 없이 그저 그녀를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마음 또한 편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