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묵용감은 자신의 예측과 전혀 다른 상황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백천범이 자신의 시녀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이씨 부인이 백천범을 죽이려 하는 것이었다니!
그동안 그가 했던 추측은 자신의 선입견일 뿐이었다. 백천범에게 문제가 있을 거라 확신했고, 어떤 모습을 보여도 모두 연기일 뿐이라며 부정하기 일쑤였다. 기홍과 녹하가 그녀를 믿어도, 가동과 영구 역시 백천범을 믿었어도 그는 끝까지 그녀를 의심했다.
하지만 지금 알게 된 모든 사실이 그가 틀렸다는 걸 증명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적모嫡母가 의지할 곳 없는 서녀庶女를 왜 그토록 죽이려 한단 말인가? 백천범이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걸림돌이 된다고, 이렇게 큰 고통을 준단 말인가?
“이씨 부인은 왜 그리 왕비를 해하려는 것이오?”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제가 밥을 축내는 게 싫어서 없애고 싶은 게 아닐까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명색이 승상의 저택인데 서녀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겠소? 백 승상도 이씨 부인과 같은 마음이오?”
“그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래도 제게는 잘해 주시는 편입니다. 몇 차례 부인이 한 짓을 아시고는 아주 호되게 혼을 내셨거든요.”
“왕비에게 들킬까 봐 꾸며 낸 것은 아니오?”
“아버지께서는 높은 지위에 계시니 항상 바쁘셨습니다. 그래서 집안일에는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못하셨지요. 그래도 그런 일을 아시게 될 때마다 늘 직접 처리해 주셨습니다.”
묵용감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허면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모든 다 할 것이오?”
“그럴 수는 없지요. 적어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날에 유모가 그랬거든요.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분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정정당당히 살아야지, 남을 해하려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요.”
“다른 이가 왕비를 해하려는 건 상관도 없단 말이오?”
“물론 아니지요. 그래도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은 구별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시어요.”
백천범이 그를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왕야는 착한 분이십니다.”
그녀는 손에 찻잔을 쥔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헤헤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장난스런 모습이었지만 마음만은 진심인 게 느껴졌다.
묵용감이 눈을 내리깔았다. 골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과거 일들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았다.
“혹시 어릴 때 안 좋은 일을 당했던 적이 있소?”
백천범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장 답했다.
“너무 많지요. 대놓고 괴롭히는 사람도 많았고, 몰래 해하려는 사람도 많았거든요. 가끔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걸요. 유모 말이 저는 고양이 띠라 목숨이 아홉 개나 된대요.”
“가장 안 좋았던 일은 무엇이오?”
“여덟 살 때쯤에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묵용감은 마음이 짓눌리는 기분에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우물에 빠졌다니?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갑작스레 스산한 기운을 뿜어대는 그의 표정에 깜짝 놀란 백천범이 말을 잇지 못했다.
“왕야, 그것이…….”
순간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말해 주시오. 안 좋았던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나에게 말해 주시오.”
백천범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웅얼거리며 답했다.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뭘.”
그가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쥐며 말했다.
“말해 주시오. 난 알아야겠소.”
* * *
그날 밤, 백천범은 회림각에 남아 묵용감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묵용감은 서재에서 잠을 청했는데 밤늦게까지 홀로 책상에 앉아 줄곧 서예를 했다.
서예는 그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음이 불안정할 때마다 한 글자씩 천천히 써 내려 가면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잘 되지 않았다.
백천범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비통과 감탄을 느꼈다. 이 어린 계집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정말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엔 이씨 부인의 모욕을 견디며 자라 온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괴롭힘이었다.
자신은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던 백천범은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늘 피해 다녔다고 했다. 이씨 부인부터 노비들까지 그녀를 괴롭힐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성격이 삐뚤어지지 않았으니 하늘이 도운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묵용감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이나 붓을 쥐고 있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답답함이 그의 마음을 옭아맸다. 마치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번지는데 출구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괴로웠다.
멍한 그의 모습에 녹하가 조용히 물었다.
“왕야,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신지요? 소인에게 말씀해 보십시오. 기분이 좀 나아지실 것입니다.”
묵용감이 붓을 내려놓았다.
“하나만 물어보자꾸나. 만약 네게 적모가 있는데 그자가 어릴 때부터 줄곧 너를 해하려 하고 죽기만 바란다면 어찌하겠느냐?”
“도망을 치거나… 기어코 저를 죽이려 한다면 소인이 먼저 죽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묵용감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도망조차 가지 않았단 말인가?”
하지만 도망을 쳤다면 그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녹하가 슬쩍 물었다.
“왕야, 왕비 마마의 일인지요?”
묵용감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궁금한 것도 많구나.”
녹하는 혀를 내밀어 보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녹하와 기홍은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다. 기홍은 백천범 곁을 지켰고, 녹하는 묵용감 곁을 지켰다. 왕야는 왕비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눈 뒤로 기분이 나빠진 것 같더니 지금까지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녹하는 왕비가 왕야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정말 궁금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늘 침착하던 왕야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다음 날은 휴일이었기 때문에 묵용감은 조정에 나가지 않고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아직 잠에서 덜 깨 몽롱하게 졸고 있는데,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그의 잠을 깨웠다.
묵용감은 잠에서 깨면 늘 심기가 불편했다. 누군가 소란을 피워 그의 잠을 깨운다면 벌로 곤장이나 채찍질이 내려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저 소란이 듣기 좋았다. 천천히 정신을 차린 그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밖으로 향했다.
백천범은 마당에서 재잘대고 있었다. 제기를 차는지 크게 웃는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아직 주무시고 계시니 목소리를 조금 낮추셔야 할 듯합니다. 아니시면 저쪽에서 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또랑또랑한 그녀의 대답이 들려오더니 이내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침대에 누워 있던 묵용감은 괜스레 학평관에게 성이 났다. 언제부터 말을 그리 잘 들었다고 왕비까지 쫓아낸단 말인가!
그는 몸을 뒤척이며 다시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한번 달아난 잠은 오지 않았다. 그가 몸을 일으켜 하인을 불렀다.
홀로 신나게 제기를 차고 있던 백천범은 저쪽에서 검을 찬 가동이 다가오자 높게 솟은 제기를 손으로 낚아챈 뒤 활짝 웃으며 그를 향해 뛰어갔다.
“사부님, 검술을 연마하고 오시는 길이에요?”
“예. 왕비 마마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제기를 차고 있었어요. 사부님, 저랑 시합하지 않으실래요?”
가동이 난감해 하며 말했다.
“소인은 제기를 차 본 적이 없사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괜찮아요. 개똥이 개떡이도 처음 했는데 잘하던데요.”
가동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개똥이와 개떡이는 누구인지요?”
백천범은 대답을 피하며 그가 들고 있는 검을 보며 말했다.
“사부님, 검무 좀 보여 주세요. 나중에 초식을 다 배우고 나면 저한테 검술도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사실 어제 왕야와 저잣거리에 나갔다가 도둑이랑 마주쳤는데 실력이 엄청나더라고요. 사부님한테 배운 초식도 아무 소용없었어요. 검을 지니고 있었으면 바로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죄책감을 느낀 가동이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바로 백천범이 말한 도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제 저질렀던 뻔뻔스러운 일로 아직까지 속이 좋지 않았다.
괜스레 실력을 숨긴 고수라고 의심을 산 백천범이 밉기도 했다. 본때를 보여줄 것처럼 협박하더니 맞붙자마자 한 동작도 막지 못할 만큼 아무런 실력도 없었다.
마음이 불편했던 가동은 결국 그녀의 말을 다 들어주기로 했다. 검무를 보여 달라는 그녀의 말에 가동이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자 차르륵 소리를 내며 대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동은 백천범에게 칼집을 맡기고 나무 아래 서서 검무를 선보였다.
손을 높이 올리자 칼날이 한 송이 꽃처럼 반짝였다. 왼손을 비스듬히 들어 올린 채 오른손을 흔들며 발끝을 가볍게 세웠다가 다시 오른손을 비스듬히 치켜세우자 희미한 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동은 최선을 다해 검무를 췄지만 백천범의 미간은 점점 찌푸려지고 있었다. 끝내 가동을 멈춰 세운 백천범이 엄숙한 표정으로 다가가더니 가동의 손을 잡아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코를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기도 했다.
가동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왕비 마마, 왜 그러십니까?”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심각한 표정에 가동은 더 마음이 더욱 불안해졌다.
“영구 무사님은요?”
“아마 방에 있을 것입니다.”
백천범은 가동을 내버려 두고 곧장 호위무사의 처소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예를 하고 있는 영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친 둘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명은 호위무사가 서예를 하는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 명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자신의 방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영구는 어려서부터 묵용감을 따랐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예도 그중 하나였다.
영구는 원래 공부를 했던 적이 없어서 글자도 읽을 줄 몰랐지만, 묵용감을 보필한 뒤로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 서예도 묵용감을 따라 연습하며 한 글자씩 쓰다 보니 심신 수양에 꽤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영구 또한 어제 일이 껄끄럽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가동이 검술을 연습하러 간 사이 방에서 가만히 서예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왕비가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