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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9)화 (68/1,192)

제69화

우는 걸 싫어하는 그녀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묵용감을 보니 눈물이 참아지지 않았다. 그는 늘 큰오빠처럼 자신을 대해 주었기 때문이다. 서러운 일을 당했을 때, 오빠에게 털어놓으면 금방 마음이 풀리곤 했다.

하지만 그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큰오빠가 아닌 초왕야였다.

묵용감이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

“어찌 이 꼴이 된 것이오?”

“아무 일도 아닙니다. 도둑을 마주쳤는데 제가 쫓아 버렸습니다.”

그녀가 웃음을 짓자 눈에 고인 눈물이 일렁였다.

묵용감이 한숨을 내쉬더니 갑작스레 그녀를 품에 안았다. 자그마한 몸집을 끌어안으니 어깨뼈가 유독 도드라졌다. 알 수 없는 기분이 물밀 듯 밀려들며 그의 심장을 옥죄였다. 꼭 그의 몸 어딘가가 뚫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그녀의 작은 몸집이 채워 주는 듯 그녀를 품에 안자 그의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낮게 속삭였다.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없습니다.”

그녀가 그의 품속에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저만의 필살기가 있었거든요. 아쉽게도 탄약 한 알은 찾지 못했지만요.”

“괜찮소. 왕비가 원하는 만큼 상으로 주겠소.”

“감사합니다, 왕야.”

묵용감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체 뭐가 고맙다는 것인가? 그야말로 정말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감정을 겨우 추스른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무거운 그녀의 발걸음을 느낀 그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렸다. 가녀린 그녀의 다리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새하얀 다리와 대조되는 검푸른 자국이 유독 더 그의 마음을 짓이겼다. 그가 그녀의 앞에 웅크려 앉았다.

“업히시오.”

백천범이 한사코 거절했다.

“제가 어찌 왕야 등에 업힐 수 있겠어요. 실은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에요. 더 심했던 적도 있거든요. 저는 그렇게 나약한 여인은 아니라서 이 정도는 끄떡도 없어요.”

나약한 여인도 아닐뿐더러 평범한 여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몸에 그런 것들을 지니고 다니는 여인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묵용감이 쓴웃음을 지으며 억지로 그녀를 업고 큰 보폭으로 재빨리 골목을 빠져나갔다.

백천범의 기억 속에 누군가 자신을 업어 주었던 건 유모가 유일했다. 그 후 외톨이가 된 그녀는 누군가에게 업히기는커녕 자신을 향해 웃어 주는 사람도 본 일이 없었다. 묵용감의 등에 업히자 마음이 따뜻해진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가만히 기대었다.

“왕야께서 제게 참으로 잘해 주십니다.”

아까 했던 말을 그녀가 또다시 내뱉자 그의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무서운 일을 겪었다지만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으니 백천범은 기쁘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초왕야의 어깨는 참으로 넓고 단단했다. 그의 등에 기댄 그녀는 바람을 넣어 볼록하게 부풀린 뺨을 끊임없이 그의 어깨에 문질렀다.

어디가 불편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이 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천범이 헤헤 웃어 보였다. 묵용감의 목 아래쪽을 끌어안고 있던 그녀가 그의 목울대를 어루만졌다. 그와 점점 더 가까워진 그녀만의 친근한 표현이자 앞으로 더 좋은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담긴 행동이었다.

부드러운 손끝이 그의 목을 간질이자 묵용감은 갑작스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는 것인가?

그가 거친 목소리로 호통쳤다.

“손 치우시오.”

“왜요?”

“…간지럽소.”

“아.”

그녀가 순순히 손가락을 뗐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쓰다듬을 땐 심장이 울렁거리더니 손을 떼자 왠지 모를 실망감이 느껴졌다.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는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날씨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물 위에 먹물이 떨어진 듯 천천히 퍼지며 조금씩 빛을 잠식해 갔다.

대문을 지키던 머슴의 눈에 어둠을 뚫고 걸어오는 큰 형체가 담겼다. 등에는 잔뜩 웅크린 사람을 업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점차 선명해지는 그의 모습에 머슴이 황급히 다가가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묵용감은 짧게 대답한 후 성큼성큼 머슴의 곁을 지나갔다. 그제야 굽혔던 허리를 편 머슴은 왕야의 등에 업혀 있던 사람이 왕비라는 것을 발견했다. 머슴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며칠 전 감금까지 당한 왕비였는데 오늘은 왕야의 등에 업혀 들어오다니?

백천범을 업고 회림각으로 향하던 묵용감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오는 길에 한참이나 재잘거리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왜 이리 조용해졌단 말인가?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학평관이 손으로 받쳐 드는 시늉을 했다.

“왕야, 힘드실 테니 소인이 업어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자 학평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다른 곳을 다친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째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백천범을 곧장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다행히 더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안색도 나쁘지 않았고, 호흡도 일정했다. 그렇다면… 잠이 든 것이란 말인가?

침대 옆에 서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 일을 겪고도 금세 잠이 들 줄은.

* * *

배가 고팠던 백천범은 잠에서 깨어 반쯤 눈을 떴다. 낯선 방의 모습에 그녀가 당황하자 옆에 앉아 있던 기홍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왕비 마마, 일어나셨습니까?”

묵용감의 방이라는 걸 알아차린 백천범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왕야는요?”

건넌방에 있던 묵용감은 깨자마자 자신을 찾는 백천범의 목소리에 이상하게 가슴이 벅찼다. 밥을 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발바리가 하염없이 주인만 바라보듯,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찾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그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조금은 진중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때 기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야께 드릴 말씀이 있으신지요? 왕야께서는 지금 밖에 계십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왕야께서 저를 업고 오시느라 힘드셨을 것 같아서요. 괜찮은지 물어보려고요.”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깃털처럼 가벼우시니 왕야께서도 분명 창 한 자루보다 더 가볍게 느끼셨을 것입니다. 너무 걱정 마시어요. 소인이 왕야께 방으로 드시라 말씀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백천범이 말을 이었다.

“그냥 물어보고 싶었던 거예요. 안 힘드셨다면 다행이에요.”

발걸음을 떼며 들어갈 기회만 엿보고 있던 묵용감은 그녀의 말에 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문발 사이로 어렴풋이 작은 몸집이 보였다.

묵용감은 그녀를 품에 안은 순간을 떠올렸다. 등에 도드라진 어깨뼈를 생각하니 또다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이렇게 가여운 계집아이의 모습을 보고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홍이 옷을 갈아입혀 주는 것이 틀림없었다. 잠시 후 문발에 그림자가 스치더니 그녀가 화장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까만 머리를 늘어뜨린 채 기홍이 머리를 빗겨 주길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묵용감은 뒷짐을 진 채 박자를 세듯 검지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갑자기 발을 걷어 올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발이 걷히는 소리에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천범이 환히 웃는 얼굴로 그를 반겼다.

“왕야.”

묵용감이 그들 가까이에 다가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기홍에게서 빗을 넘겨받았다.

“왕비가 시장할 테니 가서 음식을 준비하여라.”

기홍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빙그레 웃으며 방을 나섰다.

묵용감은 백천범의 까만 두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불투명한 구리거울을 바라보며 물었다.

“잘 잤소?”

“네. 이상하게 왕야의 침대에서는 늘 단잠을 자는 듯해요.”

“왕비의 말은 본왕의 침대를 양보해 달라는 것이오?”

“군자는 남이 아끼는 것을 탐하지 않는 법이지요. 게다가 이렇게 큰 침대는 옮기기도 어려운걸요.”

“허면 종종 이곳에서 자도록 하시오.”

스스로 뱉은 말에 놀란 묵용감이 서둘러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본왕의 말은 왕비가 잠이 오지 않을 때 이곳에서 잘 수 있도록 본왕이 자리를 내어 준다는 말이었소.”

백천범이 거울 속에 비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야께서 제게 자꾸 이리 잘해 주시면 제가 마구 욕심을 부릴지도 몰라요.”

그건 묵용감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왕비가 욕심도 부릴 줄 아오? 어찌 욕심을 부리는지 본왕이 한번 지켜보겠소.”

우스갯소리를 하는 동안에도 묵용감의 손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두같이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리가 양옆으로 나란히 얹어졌다. 환하게 웃어 반달 모양이 된 눈이 더해지니 한층 더 귀여워 보였다. 묵용감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그녀의 볼을 꼬집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묵용감도 아직 저녁을 들기 전이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던 것도 있었고, 기다렸다가 그녀와 함께 먹고 싶었기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조금 이상했지만 그녀와 함께 밥을 먹으면 그의 입맛도 더 좋아져 평소보다 많이 먹게 되었다. 맛있게 먹는 그녀의 모습을 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입맛이 도는 듯했다. 게다가 밥을 먹는 속도까지 빨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상이 차려졌다. 음식에서 나는 뜨거운 김이 자욱하게 퍼지자 묵용감은 괜스레 따스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가 왕비와 함께 밥을 먹을 때면 보통 한 사람은 천천히 꼭꼭 씹어 먹고, 다른 한 사람은 단숨에 먹어 치우기 바빴다. 그러다 가끔 서로 시선이 맞닿으면 속으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각자 먹는 데 열중했다.

그래도 그는 꽤 만족스러웠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은 홀로 쓸쓸히 먹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설령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식사를 마친 뒤, 차가 올려졌다. 묵용감은 곁을 지키던 하인들을 물리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왕비, 지금 이곳에는 우리 둘뿐이니 나를 믿는다면 어찌 된 일인지 사실대로 말해 주시오. 청매라는 아이는 백 승상 댁에서 보낸 시녀이기 때문에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소. 하지만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이상 나도 지켜만 볼 순 없소.”

예전 같았으면 망설였겠지만 지금의 묵용감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백천범은 자신의 추측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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