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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68)화 (67/1,192)

제68화

두 사람은 시중을 드는 이 하나 없이 저택을 나섰다. 평범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다를 바 없이 거리를 거닐었다.

꾸며 낸 일을 하는 것이었으니 묵용감도 인내심을 가지고 왕비를 살뜰히 챙기며 적극적으로 임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날 때에는 혹여 왕비가 사람들 틈에 끼일까 봐 손을 뻗어 그녀를 보호했다.

그가 쇠귀뚜라미를 다시 사 주겠다고 했지만 백천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잘 돌보지 못해 또 죽게 될지도 모르는걸요. 어쨌든 살아 있는 생명이니까 안 기를래요.”

벌레 한 마리도 이렇게 불쌍히 여기면서 자신의 시녀를 독살하다니,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묵용감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가게에서 계란전병과 군밤을 사고, 노점상에서 맛있는 냄새를 뿜어내는 호박씨까지 산 다음 손에 들고 먹으며 거리를 구경했다. 두 손 가득 들기에도 버거운 양에 하는 수 없이 묵용감이 대신 들어 주었다.

백천범은 계란전병을 입에 쑤셔 넣으며 반달이 된 눈으로 말했다.

“왕야께서도 드셔 보세요. 이곳의 먹거리는 그래도 맛이 꽤 좋은 편이거든요.”

묵용감같이 존귀한 인물에게 이런 음식을 권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었지만, 그는 계획한 판을 벌이기 위해 미소를 띤 얼굴로 거짓 연기를 해 보였다.

“좋소, 나도 한 번 먹어 보지.”

그의 말에 백천범도 기분이 좋아졌다. 왕야가 변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높디높은 지위를 내려놓고 위엄 있는 태도도 보이지 않으니 정말 꿈만 같았다. 자신에게 이렇게만 대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작은 얼굴 가득 지어 보이는 만족스런 웃음이 묵용감의 눈에도 비쳤다. 이 정도에도 한없이 기뻐하는 모습이 설마 거짓은 아니겠지?

그가 그녀를 이끌고 골목을 들어서며 말했다.

“듣자 하니 이곳에 밀가루로 인형을 빚는 유명한 사람이 있다더군. 한번 구경해 보시오.”

골목에도 노점상이 있었지만, 대로변만큼 북적이진 않았다. 사람이 사는 집 사이에 드문드문 가게가 들어서 있는 형태였다.

백천범은 잔뜩 신이 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구경하느라 바빴고, 어느새 묵용감과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순간 정신을 차린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없었다.

가던 길을 다시 돌아오던 그녀는 맞은편에서 복면을 쓴 괴한 두 명과 마주쳤다. 검은 옷을 입고 바짝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눈치가 남달랐던 백천범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이씨 부인이 보낸 자들이 틀림없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재빨리 도망쳤다. 사방으로 뻗은 골목길을 잘만 이용하면 이 자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설사 실패한다 하더라도 묵용감이 곧 자신을 발견할 테니 시간을 벌면 승산이 있었다.

그녀는 토끼처럼 재빠르게 골목골목을 뛰어다녔고, 묵용감은 지붕 위에 올라 조용히 그 모습을 관찰했다.

위험에 직면해도 전혀 허둥대지 않는 게 이미 그녀만의 속셈이 있는 듯해 보였다. 그의 시선이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마음도 점차 무거워졌다.

드디어 백천범이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양옆으로 높은 담벼락이 세워져 있어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녀는 대범하게 골목 한가운데 서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괴한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멈춰라. 무슨 이유로 날 쫓는 것이냐?”

괴한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이씨 부인이 이렇게 실력이 뛰어난 자들을 자신에게 보냈다고 생각하자 백천범은 서글픈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굳은 표정을 유지한 채 소매 안에 손을 집어넣으며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멈춰라! 그렇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예의를 차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예의를 차리지 않게 하는 것이 괴한들의 목적이었다. 괴한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백천범은 벽에 세워진 대나무 담장을 보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소맷단에서 재빨리 무엇인가를 꺼내 뿌려 댔다. 휙휙거리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리더니 거뭇거뭇한 게 괴한들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괴한들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 땅에 떨어진 거뭇한 물체를 자세히 살펴보니 둥글고 새까만 탄약이었다.

묵용감이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몸에 암살 무기까지 지니고 다니다니.

탄약을 뿌린 뒤, 대나무 담장까지 다가간 백천범은 괴한들이 있는 방향으로 있는 힘껏 담장을 밀었다. 대나무가 와르르 무너지자 그녀는 길 가장자리를 따라 곧장 그곳을 빠져나왔다.

두 괴한도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빠져나와 다시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백천범은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묵용감이 자신을 찾지 않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소매에 표창이 있긴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쓰고 싶지 않았다. 몇 개 되지 않는 표창을 던진 뒤,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때, 괴한들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가운데로 몰린 그녀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날렵한 몸집으로 양옆에서 그녀를 몰던 괴한들 틈을 빠져나온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표창 두 개도 그들을 향해 연이어 던졌다. 분명 한 명은 맞힐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발 모두 실패였다. 괴한들이 모두 낚아챈 것이었다. 더욱 불리해진 상황에 그녀가 단도를 꺼내 쥐었다. 괴한이 자신을 잡아채면 몸을 돌려 찌를 셈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묵용감은 그런 그녀의 용기와 담력에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이제 곧 괴한과 정면 승부를 벌일 테니 꽤나 볼만한 광경이 펼쳐질 것이었다.

하지만 단도는 괴한의 몸 옆으로 스칠 뿐이었다. 괴한이 손쉽게 그녀의 어깨를 틀어잡자 순식간에 단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천범의 완벽한 패배였다.

방금 전, 단도를 쥐며 보이던 기세와 치타처럼 흉악하게 위협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그럴싸해 보이는 눈속임이었다.

괴한들의 손에 잡힌 백천범에게서 절망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당당한 모습으로 호통쳤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느냐? 나는 초왕비다! 초왕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 것이냐?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군신이다. 엄청난 분이란 말이다. 너희의 재주도 그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초왕의 눈은 왕방울처럼 부리부리하고, 네모나게 각진 입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이가 입술 밖까지 뻗어 있단 말이다!

평소에는 어린아이의 심장을 즐겨 드시지만, 그분을 화나게 하는 날에는 어른의 심장을 드시기도 한다. 그러니 어서 나를 풀어 주는 게 좋을 것이다. 안 그랬다간 너희의 하찮은 목숨을 지킬 수 없을 테니.

심장이 없으면 다음 생에 환생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저승을 떠돌다가 지옥 불에 구워질 가여운 자들 같으니라고!”

두 괴한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빠르게 왼쪽 지붕 위를 훑었다. 지붕 위에 서 있던 묵용감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두 괴한은 곧장 백천범을 풀어 주고는 담벼락을 뛰어넘어 재빨리 사라졌다.

백천범은 괴한들에게 잡혔던 어깨를 쓰다듬으며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망할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또 한 번만 더 건드렸다간 초왕이 너희 심장을 빼먹을 테니 조심하라고!”

녹초가 된 그녀가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이제야 공포와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녀는 가냘픈 몸을 파르르 떨며 입술을 깨물고 몇 차례 훌쩍였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구나…….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목숨 하나만큼은 얼마나 질긴데. 여덟 살 이후의 삶은 상으로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육 년이면 그래도 충분하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가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물을 머금고 흩어진 단도와 표창을 다시 주워들었다.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탄약을 주우러 갔다.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들이니 다시 쓸 수 있는 것들은 낭비하지 말고 다시 회수해야 했다.

먼발치에 서 있던 묵용감은 말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이런 일을 겪었으니 아마 백천범의 몸이 말이 아닐 것이었다. 평소 그녀의 걸음걸이는 생기가 넘쳐났지만, 지금은 발을 떼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벽을 짚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골목 깊은 곳을 향했다.

묵용감은 그녀 곁을 따라 지붕 위를 걸어갔다. 막다른 그 골목에 다다르자 백천범은 눈물을 닦으며 땅에 쏟아진 탄약을 찾았다.

자그마한 탄환을 찾기 위해 그녀가 허리를 굽혔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넘어졌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땅을 짚은 채 천천히 탄약을 찾았다.

한 알을 찾을 때마다 빙그레 미소를 지었지만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안도하며 웃는 모습이 꼭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듯 기뻐 보였다.

묵용감의 속이 점차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건 그가 예상했던 결과가 아니었다. 그저 겁을 집어먹은 듯한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에 가슴이 시큰거릴 뿐이었다.

자신이 지시한 일이었지만 최상의 무술 실력을 갖춘 두 사람이 어린아이 하나를 상대한 것이었다. 게다가 무술을 쓸 땐 사정을 봐주는 법이 없으니 어린 계집아이가 버티긴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한 알이 보이지 않자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눈을 닦으면 더 잘 보일까 봐, 그녀는 눈가를 닦고 또 닦았다. 하도 눈을 비벼 댄 탓에 얼굴이 얼룩 고양이처럼 꾀죄죄했다.

게다가 땅을 어찌나 굴렀는지 원래의 옷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삐뚤어진 쪽머리도 꼭 새집처럼 머리에 간당간당하게 달려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량한 모습에 묵용감이 뼈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옷차림을 고쳐 입은 가동과 영구가 묵용감을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고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얼굴로 침묵만 지켰다.

이 일을 통해 겉만 번지르르했던 백천범의 실력이 낱낱이 드러났다. 애초에 아무런 실력도 없었던 것이다. 두 호위무사와 백천범 사이의 격차는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계집아이는 겁을 먹기는커녕 용기를 내어 그들과 싸웠다. 결국 처량한 민낯을 드러낸 그녀의 모습에 가동과 영구도 마음이 시큰거렸다.

이런 계집아이가 사람을 죽이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참 뒤 묵용감이 손짓을 보내자 가동과 영구가 재빨리 그의 곁을 떠났다. 묵용감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지붕에서 뛰어 내려 백천범에게 향했다.

백천범은 여전히 골목에서 부족한 탄약 한 알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닥을 뒤지던 그녀의 눈에 검은색 신발이 보였다.

멍하니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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