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이런 일이 있어났는데 잠이 오다니!
묵용감이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짝 튕기며 말했다.
“그만 일어나시오.”
잠에서 깬 백천범은 그의 모습에 놀라지도 않고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담담히 말했다.
“오셨습니까, 왕야.”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하! 요즘 들어 제법 기세가 등등한 모양이오. 본왕을 보아도 예를 갖추지도 않고.”
백천범이 꾸물대며 침대에서 내려오려 하자 그가 다시 그녀를 앉혔다.
“되었소. 엎드려 절 받기도 아니고.”
그가 잠시 멈추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 편히 자고 있는 걸 보니 귀신이 찾아올까 무섭지도 않은가 보오?”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 새카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께서도 제가 독을 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녀를 믿는가?
묵용감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저택에 온 목적 자체가 불순했기 때문이다. 설사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해도 다른 이에게 조종당하는 바둑알 같은 존재였으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사람 같아도 쉽게 그녀의 속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파악하지 못할수록 더욱더 그 속내를 알고 싶었고, 그게 바로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였다.
앞선 두 명의 죽음에 또 한 명이 더해졌다. 게다가 모든 증거가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근래에 그녀와 만난 기회가 적었더라면, 그 또한 곧바로 그녀를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기만 하면 영원히 이곳에 머물 수 있었고, 그 또한 그녀를 지켜 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 악랄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더 이상 눈감아 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요즘 들어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극에 달해 있던 그는 이 일이 터지자 곧장 이성을 되찾았다. 그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왕비는 시인하지 않는 것이오? 청매에게 과자를 준 것도 왕비였고, 독약도 왕비의 방에서 나왔소. 증거가 이리도 확실한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왕야께서 섣불리 판단하신 것입니다.”
“허면 말해 보시오. 뭘 섣불리 판단했다는 것이오?”
“누군가 저를 해할 음모를 꾸민 것인데, 그것도 꿰뚫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청매에게 과자를 준 것은 맞소?”
“예.”
“독약이 왕비의 방에서 나온 것도 맞소?”
“예.”
“그 병은 왕비의 것이 맞소?”
“예.”
“쇠귀뚜라미는 청매가 죽인 것이오?”
“예.”
묵용감이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살해 동기와 증거 모두 명확하질 않소. 어찌 내가 섣불리 판단했다는 것이오?”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삐죽 내민 채, 억울해하는 모습으로 창밖만 바라보았다.
묵용감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본왕이 조사를 진행할 테니 왕비도 그리 조급해하지 마시오. 정말 왕비와 관련이 없는 일이라 판단되면 누명을 벗을 수 있도록 공정히 처리하겠소.”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만약 저랑 관련이 있다고 결론이 나면요?”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형형한 빛이 떠올랐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은 묵용감은 시선을 옮기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왕비와 관련이 있다 해도 공정히 처리할 것이오. 형벌도 받고 감옥에도 머물게 될 것이오. 사정을 봐주는 일 따위는 절대 없소.”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백천범이 입을 열었다.
“그것참 잘 되었네요.”
그녀가 다시 침대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질문 끝나셨으면 저는 이만 졸려서 자야겠습니다.”
그녀는 묵용감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사실 이번 사건은 참으로 단순했다. 모든 단서가 백천범을 가리켰고, 살해 동기와 과정, 증거 모두 명백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영구는 더욱 의심이 커졌다. 요즘 들어 부쩍 가까워진 왕야를 믿고 왕비가 이렇게 대놓고 사람을 죽였단 말인가?
그 점에 대해서는 묵용감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지난 두 차례에도 모든 혐의가 왕비에게 있었고 그는 백천범이 일부러 자신이 뒤집어쓴 척 꾸민 짓이라 여겼다.
아무리 흉악범이라 한들 남에게 떠벌리면서까지 사람을 해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의심을 많이 받을수록 용의 선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백천범을 미행하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이 직접 뒤를 쫓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만약 다른 이의 뒤를 쫓고 있었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 용한 재주라도 숨기고 있지 않는 이상 열넷의 여자아이가 그를 따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말 실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면 가동에게 배우는 무술도 거짓이란 말인가?
조금 혼란스러워진 묵용감이 그녀에 대해 처음 품었던 생각을 계속 떠올렸다. 백천범은 백여름이 자신의 곁에 심어 놓은 수하가 확실했다. 하지만 정말 그 시녀들을 죽였는지에 대해선 지금의 그는 차마 확신할 수 없었다.
* * *
다음날, 남월각으로 백천범을 찾아온 양려낭은 그제야 그녀가 방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략적인 사건 경위를 파악한 양려낭이 곧장 회림각으로 뛰어가 묵용감에게 무릎을 꿇고 고했다.
“왕야, 제발 왕비 마마를 풀어 주십시오. 왕비 마마처럼 마음씨가 따뜻한 분이 절대 그런 일을 하셨을 리 없사옵니다.”
막 조정에서 돌아온 묵용감은 세수를 하던 참이었기에 그녀를 보지도 않고 담담히 말했다.
“일어나시오. 내게 왕비를 봐 달라 청을 하러 온 것이오?”
“비록 왕비 마마와 알게 된 시간이 길진 않지만, 왕비 마마께서 선한 분이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절대 이런 일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부디 진실을 밝혀 주시옵소서, 왕야.”
“걱정 마시오, 낱낱이 조사할 것이니.”
양려낭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왕야, 조정에서 돌아오셨으니 많이 피곤하시겠지요. 소인이 어깨를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소.”
묵용감이 말했다.
“나는 할 일이 있으니 긴말 않겠소. 며칠간, 남월각에는 발을 들이지 마시오.”
“예. 이렇게 큰일이 났으니 소인도 왕야께 더 이상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양려낭은 애처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싶었지만 거절을 당했으니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후원에 돌아와 남월각을 지나치던 양려낭은 안에서 들리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들어가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만, 묵용감이 알게 될까 봐 입구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산발이 된 시녀가 뛰어나왔다. 공포에 질린 듯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서 마구 소리를 질러 댔다.
“저를 죽이지 마세요, 저는 그 애들과 한패가 아니에요. 저를 죽이지 마세요!”
양려낭이 그녀를 잡아끌며 물었다.
“대체 누가 죽인다는 것이오? 누구와 한패가 아니라는 것이오?”
그 시녀는 어찌나 힘이 센지 양려낭을 단번에 밀쳐내고 앞으로 뛰어나가며 계속 소리를 질렀다.
“저를 죽이지 마세요, 저를 죽이지 마시라고요.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비틀거리던 양려낭이 겨우 중심을 잡았을 때, 머슴 두 명이 뛰쳐나왔다. 양려낭이 입구에 서 있자 머슴이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
“정신 나간 여자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보셨습니까?”
정신이 나갔다는 말에 양려낭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하지만 멀쩡하던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에 정신이 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알기로 방금 뛰쳐나간 그 시녀는 백천범이 시집올 때 이곳에 함께 보내진 청지라는 아이였다.
어제는 청매가 죽고 오늘은 청지가 정신이 나갔다니,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저주를 받고 있지 않는 이상 백 승상 댁에서 함께 온 시녀들이 어찌 하나같이 이런 일을 겪는단 말인가?
그녀가 서둘러 명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뛰어갔소.”
그녀가 가리킨 쪽으로 두 머슴이 황급히 뛰어가자 양려낭은 고개를 저었다. 만일 이 일이 정말 백천범의 소행이라면 자신이 그 계집아이를 얕봐도 한참 얕본 것이었다.
청지가 정신이 나갔다는 소식이 회림각에도 전해졌다. 영구가 묵용감에게 말했다.
“왕야, 청지가 그렇게 된 것은 청매와 관련이 깊은 듯합니다. 어젯밤에는 청매가 죽고 오늘 청지의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인데,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아무것도 묻지 못해 아쉬웠던 참인데, 오늘 저리 되어 버리다니. 그 애의 말은 그래도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을 텐데 이젠 알 길이 없게 되어 버렸구나.”
영구가 말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갔다 하더라도 종종 진실을 내뱉기도 하니, 소인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가 보거라. 유일한 증인이니 그 애의 목숨은 지켜 주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왕야.”
영구는 몸을 굽혀 인사를 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묵용감이 가만히 서 있는 가동을 보며 물었다.
“평소답지 않게 이번 일에는 어찌 이리 말을 아끼는 것이냐?”
가동이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소인은 왕비 마마의 사부이니 의심 살 만한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묵용감이 물었다.
“왕비의 사부라고 하니 하는 말인데, 왕비의 무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너는 알 테지?”
“소인이 보았을 때 왕비 마마의 실력은 아직 평범한 수준입니다.”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도 알아보았겠지?”
“그것은…….”
가동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왕비 마마이시니 감히 그런 것까지 시도하지는 못했습니다.”
묵용감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한번 알아보아라.”
묵용감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니 백천범도 예외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한밤중에 회림각으로 달려와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행동이 그 증거였다.
그녀가 정말 실력을 숨기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판을 벌여 그녀를 궁지로 몰아넣으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었다.
그는 백천범에게 찾아가 다시 자유롭게 밖을 돌아다닐 기회를 주었고, 왕비를 믿는다며 따스하게 달랬다. 어린 계집이 코를 몇 번 훌쩍이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혼을 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악한 의도를 품고 있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그녀의 속내를 알아볼 계략을 꾸미지 않아도 되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저렇게 억울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니!
그는 부아가 치밀었지만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왕비가 억울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소. 오늘 본왕이 왕비를 데리고 저잣거리를 다녀올까 하오. 왕비에게 진 빚을 갚으려는 것이니 혹 원하는 것이 있거든 뭐든 말하시오. 아시겠소?”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눈가에 맺힌 눈물이 순식간에 말라 버렸다. 그녀가 자그마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왕야께서 저에게 참으로 잘해 주시는군요.”
묵용감은 아무렴 좋으니 왕비가 부디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만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