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사실 이상하게 생각할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아직은 풋내 나는 아이일 뿐이니 혼이 뺏기거나 끌릴 것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형편없이 멍청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처럼 현명한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휘둘려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것이다. 순진한 그녀의 말을 곧장 믿고 후원을 에워싸라며 소리를 질러 댔으니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우스웠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피하니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점심을 먹지 않겠다며 백천범이 방에서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할 수 없이 기홍이 푹 삶은 보양식을 방에 가져다주었다.
백천범이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던 묵용감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홀로 묵묵히 밥을 먹은 뒤, 습관처럼 차를 마셨다. 가만히 넋을 놓고 있는데 옆에서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왕비 마마, 가시려는 것입니까?”
그가 고개를 돌려 보니 허리를 꼿꼿이 세운 백천범이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묵용감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불쑥 명을 내렸다.
“가서 왕비에게 본왕이 찾는다고 전하여라.”
명을 받든 학평관은 곧장 머슴에게 가 일렀고, 머슴이 쏜살같이 왕비 뒤를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천범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그 자리에 굳어 버린 듯 서서 멀찍이 그가 있는 쪽을 힐끗거렸다.
둘의 시선이 연못을 향했다가 복도를 지나 나무를 훑고 마침내 서로 맞닿았다. 그에 둘 다 흠칫 놀라더니 이윽고 다시 시선을 튕겨 냈다.
백천범이 조금 주저하다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오늘 피한다 해도 영원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저택에 지내면서 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그의 앞에서 망신을 당했던 일들 중에 이번 소란을 더한다 해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맘이 조금 편해진 그녀는 숨을 깊게 한 번 내쉰 뒤,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묵용감이 손을 흔들어 주위의 하인들을 물리고는 백천범을 보며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앉으시오.”
백천범도 사양하지 않고 털썩 앉으며 물었다.
“왕야, 무슨 일로 절 찾으셨는지요?”
“양씨 아가씨 일 때문이오. 본왕 생각에 계속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하니, 이제 그만 내보내는 게 좋을 듯싶소.”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입이 떡 벌어진 백천범이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저는 왕야께서 언니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묵용감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딜 봐서 본왕이 좋아한다고 여겼단 말이오?”
“지난번에 언니에게 상을 내리셨잖아요. 쇠귀뚜라미까지 사 주시고요.”
묵용감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까지 백천범이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라 여겼었는데, 쇠귀뚜라미를 준 것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아 그 또한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양려낭에게 준 것이라 믿고 있었다.
“누가 쇠귀뚜라미를 그자에게 준 것이라고 했단 말이오?”
“려낭 언니가 그랬습니다. 왕야께서 집에 오시는 길에 언니에게 사다 주셨다고요. 그래서 왕야께서 언니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묵용감은 올라오는 화를 참아 냈다. 뭘 그리 자꾸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야단을 떠는지!
어디에서 말이 잘못 전해진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사실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쇠귀뚜라미를 사다 준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면, 이대로는 그가 백천범을 좋아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가여운 마음에 데리고 놀라 사다 준 것뿐인데 대체 그게 좋아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라고?
“어쨌든 내 뜻은 왕비에게 전했으니 나머지 일은 학평관이 알아서 할 것이오.”
“왕야.”
난처했던 백천범이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제가 언니를 데려왔으니 그래도 제가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이참, 이게 뭐람. 왕야께 좋은 인연을 찾아 주고 싶었는데 인연이 아니었다니요. 그래요, 뭐. 억지로 한 일은 결과가 좋지 않은 법이니 왕야께서 싫으시면 하는 수 없죠. 분명 언젠가는 맘에 맞는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묵용감이 양려낭을 부인으로 맞지 않겠다고 하니 그녀가 이곳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백천범은 참으로 난감했다. 양려낭을 저택에 데리고 들어온 건 좋은 인연을 맺어 주고 싶었기 때문인데, 묵용감은 애당초 양려낭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양려낭은 왕야가 자신을 받아 주는 날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마음을 접게 도와주는 게 그나마 양려낭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백천범은 양려낭의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서둘러 이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점심을 먹고 후원에 돌아온 그녀는 곧장 낙성각으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던 시녀가 무미건조하게 아는 척을 하자 백천범이 물었다.
“려낭 언니 있소?”
“예, 방에서 바느질 중입니다.”
백천범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전에 망신을 당한 그녀는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아 백천범이 들어온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던 일에만 열중했다.
양려낭이 넘어졌을 때 백천범은 열심히 도망치던 중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양려낭이 넘어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때껏 다른 이들이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은 수도 없이 경험해 왔기에 백천범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려낭 언니, 왜 회림각에서 밥을 먹지 않고 돌아왔어요?”
백천범의 말에 양려낭은 짜증이 솟구쳤다. 안 먹은 게 뭐 대수라고, 자신은 점심을 먹었다고 자랑이라도 하러 왔단 말인가?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제가 어찌 그곳에 남아 밥을 먹는단 말입니까? 이제는 회림각에서 주무시기까지 하는 왕비 마마와는 다르지요.”
그녀의 말에 백천범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단순한 그녀는 말을 돌려 하는 법이 없었다.
“려낭 언니, 언니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양려낭이 바느질에만 몰두한 채 냉랭하게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사실은 언니를 처음 이곳에 데려온 건 좋은 연을 이어 주려고 했던 건데, 그게 결국에는…….”
양려낭이 급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양려낭의 놀란 표정에 백천범이 주저하며 말했다.
“…제가 왕야께 여쭤보았는데, 왕야께서 말씀하시길… 언니한테 장가를 가지 않으시겠대요.”
양려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차 물었다.
“왕야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까?”
꼭 죄를 따져 묻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평소 상냥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백천범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려낭은 눈을 감고 격앙된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깐 제가 저택을 나가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왕야께서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으니 여기에서 계속 지내면 언니도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겠지요.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하루빨리 좋은 낭군에게 시집을 가는 편이 좋을 듯한데…….”
“말이야 쉽죠. 늘 따라다니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제가 이곳으로 숨어들었겠어요?”
“이렇게 오랫동안 언니를 찾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 사람도 마음이 식어서 언니를 찾지 않을지도 몰라요.”
양려낭이 주먹을 쥐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새끼손가락의 손톱 끝이 손바닥에 눌려 부러질 정도였다. 갑작스런 충격에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겨우 화를 억누르고는 한참 뒤에야 처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되었습니다. 제가 복이 없어 왕야의 눈에 들지 못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왕비 마마, 며칠만 더 있게 해 주십시오. 오랫동안 근심 없이 지내다가 갑작스레 그 악랄한 놈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섭습니다.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 방도를 며칠만 고민해 볼게요. 왕비 마마, 허락해 주실 거죠?”
조금 죄책감을 느끼던 백천범은 그녀의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장 떠나란 것은 아니에요. 어쨌든 혼사는 없던 일이 되었지만, 언니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괜스레 언니가 기대하게 한 것 같아 저도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양려낭은 여전히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참으로 마음씨가 고우십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허락하셨지만 왕야께서도 그리하라 하실까요?”
“왕야께서 표정은 차가워도 마음씨는 따뜻한 분이에요. 만약 안 된다 하시면 제가 청해 볼게요. 왕야께서도 언니가 의지할 곳 없는 상황이란 것을 아시니까 분명 허락하실 거예요.”
이렇게 되었으니 양려낭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이 소식을 백천범에게 전해 들으니 그녀의 마음이 칼로 베이는 듯 저릿했고,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치밀었다. 기어코 직접 찾아와 전하다니, 잘난 척 도발이라도 하는 것인가?
그녀만 한 외모와 몸매를 가진 사람은 백 리를 걸어도 찾기 힘들 만큼 그녀의 외모는 빼어났다. 적어도 그녀가 살던 동네에서는 누구보다 출중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많은 사내가 집 앞을 기웃거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어린 계집아이에게 밀려난 것이었다.
열넷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열넷처럼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왜소했다. 가슴은 어찌나 평평한지 말이 뛰놀아도 충분할 듯했다. 보통 사내가 좋아한다 해도 이상한 일인데, 초왕야의 눈이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애를 맘에 들어 한단 말인가?
조금도 그녀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았던 양려낭은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거리를 내던지며 말했다.
“한참 동안 바느질을 했더니 피로해서 잠시 누워야겠습니다. 왕비 마마를 모시지 못하겠네요.”
백천범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려낭 언니, 별말씀을요. 어서 쉬세요. 저도 돌아가서 낮잠 좀 잘게요.”
* * *
오전 내 날씨가 좋더니 오후가 되자 별안간 폭우가 쏟아졌다. 세상이 온통 희뿌연 색으로 물들 만큼 밧줄같이 두꺼운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다.
묵용감은 동쪽 교외 지역의 제방이 걱정이었다. 지난번에 힘겹게 보수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큰 비가 쏟아지니 더 보강하지 않으면 또다시 쉽게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는 결국 가동과 영구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역시나 상황이 급박했다. 소 상서는 보이지 않았고 유 시랑이 허둥대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참령 조자명은 사병과 일꾼을 이끌고 제방 위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자루에 담긴 모래를 쌓아 올리려 했지만 순식간에 강물에 떠내려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어두운 빗속을 뚫고 성큼성큼 걸어왔다.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쓴 묵용감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 등장하자 모두들 기뻐하며 그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