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묵용감이 떠나자 백천범이 눈을 떴다.
평소 깊게 잠들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의 방 안에서 미세한 소리만 들려도 곧장 잠에서 깼지만, 오늘만큼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위험할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건조한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을 훑고 지나갈 땐, 오랜만에 따스한 기분까지 느꼈다. 그녀는 초왕야가 정말 모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땐 둘째 오빠처럼 무섭고, 어쩔 땐 큰오빠처럼 따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눈을 뜨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를 볼 낯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그렇게 황당한 소란을 피웠으니 도무지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초왕야뿐만 아니라 기홍과 녹하에게도 미안했기 때문에, 백천범은 그가 떠나고 나서도 계속 침대에 누워 자는 척을 했다. 침대에서 몇 번 뒹굴거리다 보니 정신이 나른해져 그녀는 또다시 잠이 들었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환한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건넌방에서 녹하와 기홍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녹하가 말했다.
“해가 중천인데 왕비 마마께서 아직도 주무시네.”
기홍이 말했다.
“왕야께서 어제 왕비 마마가 많이 놀랐을 테니 충분히 쉴 수 있도록 깨우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고 가셨어.”
“그렇다고 끼니까지 거르시면 어째? 왕비 마마께선 배고픔을 못 견디시는데, 아직 한창 클 때잖아.”
기홍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달거리가 시작되었으니 이제 어른이 되신 거지. 열넷에 시집을 오셨으니 열다섯 열여섯쯤 아이를 낳으실 테고. 우리는 그 시절을 허송세월로 보냈는데 말이야.”
녹하가 기홍을 놀렸다.
“아이고, 우리 기홍 언니께서 낭군이 필요하신가 봅니다.”
“얘가, 낭군은 무슨 낭군! 왕야의 시중을 들며 호의호식하는데 더 바랄 게 뭐가 있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천범은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왕야와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이면서 허송세월로 보냈다니……?
때가 되면 왕야가 분명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이었다. 정말 자신이 이곳에 계속 남아 있는다면 두 언니들과 함께 왕야의 곁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다리 사이에서 뜨거운 게 쏟아져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침대보에 묻을 거란 걱정에 꼼짝도 않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언니!”
기홍이 곧장 발을 걷어 올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왕비 마마, 일어나셨어요?”
기홍의 뒤에 있던 녹하가 말했다.
“깼으면 어서 일어나시어요. 침대에 누워만 계시지 말고요. 배도 안 고프십니까?”
백천범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게, 제가… 움직일 수가 없어요.”
기홍이 그녀의 말을 곧장 알아듣고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우선 잠시만 누워 계세요. 소인이 필요한 걸 챙겨올 테니 같이 정방淨房에 가요.”
백천범은 이미 두 시녀를 볼 낯이 없었기에 그저 언니들이 하자는 대로 가만히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천범은 몸이 개운해졌다. 기홍이 그녀에게 아침상을 차려 주었다. 어젯밤에 한바탕 소란을 피웠으니 배가 이미 등가죽에 붙고도 남았다.
백천범이 밥그릇을 들고 입 안으로 음식을 쑤셔 넣자 한쪽에 서 있던 녹하가 고개를 저었다.
“왕비 마마, 적당히 드십시오. 곧 점심을 먹을 시간입니다.”
막 밥을 먹고 있는데 양려낭이 걸어왔다. 그녀는 백천범을 왕비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를 갖출 생각도 하지 않고 원망부터 늘어놓았다.
“어째서 저를 기다려 주시지도 않고 먼저 오셨는지요?”
어젯밤 일을 말하기 부끄러웠던 백천범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때 녹하가 가느다란 눈썹을 치켜세운 채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어젯밤 왕야의 방에서 주무셨습니다.”
순간 양려낭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반쯤 벌어진 입이 꼭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짜냈다.
“그래요? 그랬군요. 그래서 절 부르지 않으신 거였군요.”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에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식사는 하셨는지요?”
“먹었습니다.”
양려낭이 방금 막 알아차린 듯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아침을 드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점심을 드시는 것입니까?”
기홍이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늦게 일어나시는 바람에 아침을 드시는 것입니다.”
양려낭이 비아냥거리며 대답했다.
“잠이 그리 많으시다니, 아이는 아이시네요. 저는 일어날 시간이 되면 더 자고 싶어도 잠이 안 오던데 말이에요.”
녹하가 다시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왕야께서 나가실 때 왕비 마마께서 어젯밤 고생을 많이 하셨으니 푹 쉴 수 있게 깨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거든요.”
양려낭은 애써 추스른 감정이 또다시 충격을 받자 입술을 깨물었다. 백천범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한 줄기 원한이 서려 있었다.
어린 계집의 속을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말로는 왕야가 오빠 같은 사람이라 해 놓고 뒤에서는 침대를 기어오르다니.
그때, 중문에서 학평관이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왕야, 오늘은 일찍 돌아오셨군요.”
묵용감이 돌아왔다는 소리에 백천범은 허둥지둥 만두 하나를 입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그대로 도망쳤다.
녹하가 탄식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 어딜 그리 뛰어가시는 거예요. 넘어지십니다. 조심하세요.”
어린아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기홍이 몰래 웃음을 지었다.
백천범이 사라지는 건 양려낭이 바라던 바였기에 그녀가 도망친 틈을 타 재빨리 묵용감을 맞이하러 갔다.
가냘프고 아리따운 모습으로 인사를 올리던 그녀는 순간 발을 잘못 디뎌 몸을 휘청거렸다. 묵용감은 보고도 못 본 척하더니 그녀와 닿지 않으려 몸을 살짝 틀었다. 묵용감이 자신을 잡아 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묵용감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거의 바닥으로 넘어지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가동이었다. 하지만 묵용감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자 깜짝 놀란 가동은 잡고 있던 손을 곧바로 놓아 버리고 말았다.
아직 제대로 일어서지 못한 가여운 양려낭은 또다시 몸을 휘청거렸고 가장 뒤에 서 있던 영구도 그의 주인처럼 냉담했기에 역시나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갔다.
결국 엉덩방아를 찧은 양려낭은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를 느꼈다. 옆에 있던 무수리가 부축해 일으켰지만 그뿐, 아무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자 입술을 깨물었다. 두 손 놓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녹하는 볼만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기분을 숨길 수 없던 양려낭은 끝내 신경질을 내며 회림각을 떠났다.
백천범이 멀찍이 도망치는 모습이 눈에 띄자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왕비는 왜 도망가는 것이냐?”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마음이 여리셔서 어젯밤 일이 부끄러우신가 봅니다.”
묵용감이 조금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지금 저리 뛰어도 되는 것이냐? 움직이면 더 심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냐?”
기홍이 아무 말 못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걸 물으시면 제가 어찌 답해야 할지…….’
잠시 뒤 기홍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것이, 뛰지 않는 것이 가장 좋긴 합니다.”
“그럼 뛰지 말라 하거라.”
묵용감이 말을 이었다.
“목욕을 해야겠으니 녹하에게 물을 준비하라고 전하거라.”
근처에 있던 녹하는 그의 말을 듣고 목욕간으로 향했다. 기홍은 백천범을 뒤쫓아 가며 소리쳤다.
“왕비 마마, 뛰지 마십시오! 멈추십시오! 그러다 넘어지십니다.”
백천범이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묵용감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평소에 잘 뛰지 않던 기홍은 몇 걸음 뛰었다고 숨을 헉헉거렸다.
“어젯밤 소인이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달거리를 할 땐 너무 과격하게 움직이시면 금방 옷을 버릴 수도 있고 몸에도 좋지 않습니다. 어서 소인과 함께 가시지요.”
백천범이 고개를 반쯤 숙이더니 발끝으로 땅을 톡톡 치며 말했다.
“언니, 이만 후원으로 돌아갈게요. 어제 깜장이한테 데리고 놀러 가겠다고 약속을 했거든요.”
기홍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사람을 보내 가져오라 하면 되지요. 소인이 왕비 마마의 보양식을 만들고 있으니 점심을 못 드시겠으면 그거라도 드시고 가시어요.”
“보양식이요?”
“예, 몸이 많이 허해지셨을 테니 보신을 해야 합니다. 왕야께서 아침부터 제게 명을 내리셨어요. 왕비 마마께서 몸이 허약한 데다가 출혈까지 심하니 몸을 보양할 음식을 하라고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진 백천범은 빨개진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렸다.
“아이참, 왕야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이에요?”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왕야께서는 왕비 마마의 부군이시니까요. 낭군이 내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걸요.”
“하지만 저는 아니잖아요. 언니도 알잖아요. 전 그저…….”
“예.”
기홍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저는 그저 왕비 마마께서 초왕비이자 왕야의 정실이라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어서 소인과 돌아가시지요. 혹 왕야를 마주치시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마시어요. 왕비 마마께서 조금 더 크시면 왕야의 아이도 낳으셔야 하는걸요.”
백천범은 이번 일만 빨리 지나가길 바랐을 뿐, 그리 나중 일까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평소에는 뻔뻔했던 그녀였지만 이런 일에서만큼은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기홍에게 거의 끌려오다시피 한 그녀는 혹시 묵용감과 마주칠까 걱정이 되어 기홍의 방에 숨어 바느질을 했다.
지난번에 놓았던 자수는 기홍이 다 풀어 버린 바람에 다시 새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헛배운 것은 아니었는지 이번엔 제법 모양새가 갖춰지는 듯 했다.
목욕을 마친 묵용감의 눈에 작은 걸상에 앉아 수를 놓는 데 정신이 팔린 백천범의 모습이 들어왔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다가 어디에서 배웠는지 이따금씩 바늘을 머리에 긁으며 능숙한 척을 하곤 했다.
그는 창밖에 서서 흥미롭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신에게 수놓은 주머니를 주겠다고 했던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흐뭇해했다. 잘하진 못하더라도 열심히 수를 놓는 모습을 보니 그 마음이 참으로 갸륵해 보였다.
그는 조금은 무안한 기분에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어젯밤 그녀의 속적삼을 들춰 배꼽을 관찰한 생각이 떠오르자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