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묵용감이 백천범을 침대에 내려놓으려 하자 백천범이 그의 목덜미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
“안 돼요. 이불이 더러워질 거예요. 아직은 서 있을 수 있어요.”
묵용감은 더 화가 치솟았다.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지다니. 그는 매섭게 그녀를 한 번 노려보고는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
“몸에 상처가 난 것이오? 어쩌다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렸단 말이오?”
백천범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배가 이렇게 아픈 걸 보면 배꼽으로 피가 나온 것이 아닐까요?”
백천범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신의 배꼽을 얘기하자 그의 표정이 조금 경직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목숨을 구하는 게 더 시급했다.
그는 그녀의 속적삼과 그 안에 걸친 배두렁이까지 한 번에 걷어 올렸다. 동글동글한 배꼽이 드러났지만 새하얀 피부만 보일 뿐 어디에도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잠에서 깬 녹하가 조용히 기홍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왕비 마마께서 다치셨다면서?”
기홍이 고개를 저었다.
“독약을 드셨다나 봐, 지금 왕야께서 보고 계셔.”
묵용감에게 방해라도 될까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은 고개만 내밀고 걱정스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배꼽은 아무 일 없소.”
그녀의 옷을 내려 주던 그의 시선이 더 밑으로 내려갔다. 가랑이 밑으로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는 걸로 보아 아래쪽이 문제인 듯했다.
그가 잠시 망설이더니 기홍과 녹하를 불렀다.
“너희가 왕비의 몸을 살펴보거라. 어디에서 피가 나는 것이냐?”
그가 슬쩍 몸을 돌렸다. 서둘러 왕비의 몸을 살펴보던 기홍과 녹하가 순간 멈칫하더니 당혹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 말이 없자 묵용감이 몸을 돌려세우며 물었다.
“어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냐?”
백천범은 두려움이 더욱 커졌지만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언니들, 말씀해 주셔요. 저는 아직 조금 더 버틸 수 있어요.”
파르르 떠는 그녀를 묵용감이 끌어안고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두려워 마시오. 내가 있지 않소.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어린 왕비는 혼이 나간 듯 서럽게 울고 있었고, 왕야의 안색도 좋지 않자 서로를 바라보던 기홍과 녹하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다치신 곳도 없고 독약을 드신 것도 아닙니다. 왕비 마마께서 어른이 되셨습니다.”
백천범과 묵용감은 두 시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이어질 말만 기다렸다.
이 일을 어찌 이야기해야 할까. 둘 중 부끄러움이 덜했던 녹하가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달거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묵용감과 백천범이 동시에 흠칫 놀라더니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묵용감이 그녀를 안고 있던 손을 풀고 천천히 몸을 세웠다. 온통 붉게 물든 자신의 침대를 본 그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백천범은 순간 머리가 핑 돌더니 온몸의 모공에서 열을 내뿜는 듯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얼굴부터 발까지 온몸이 빨개진 것도 모자라 두피까지 붉게 물드는 듯했다. 지난번 속바지에 실수를 한 것보다 더 창피스러웠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당혹감에 그녀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건넌방으로 향한 묵용감은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쳤다.
“뭘 잘했다고 우는 것이오!”
한밤중에 회림각의 모든 사람을 깨워 소란을 피운 이유가 왕비의 달거리 때문이었다니! 이게 이렇게 만천하에 알릴 일인가? 그야말로 자신의 체면까지 구긴 소란이었다.
녹하와 기홍이 서둘러 뒷일을 처리했다. 어차피 침대도 더러워졌으니 아예 묵용감의 방에서 처리하는 게 나을 듯했다.
녹하와 기홍은 물을 길어 와서 그녀를 씻기고 헝겊을 덧대어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향풀 가루를 헝겊 안에 조금 넣고 왕비의 허리춤에 둘러 준 뒤 속옷부터 겉옷까지 전부 기홍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녹하가 밖으로 나가 조심스레 묵용감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왕야, 오늘은 서재에서 주무시는 게 어떠신지요? 밤새 향을 켜 두면 내일 아침에는 냄새가 모두 날아갈 것입니다.”
묵용감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녹하에게 물었다.
“왕비는 좀 괜찮아졌느냐?”
“예, 다만 아직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서럽게 울고 계십니다. 왕야께서 위로해 주시는 게 어떠신지요?”
묵용감이 다시 호통을 치며 말했다.
“울어도 싸다!”
밖에서 학평관이 문발을 걷어 올리며 말했다.
“왕야, 영구가 인력을 동원해 후원을 에워쌌다고 합니다. 아직 안에서는 아무런 미동도 없다고 하옵니다.”
더욱 성이 난 묵용감이 거칠게 말했다.
“모두 해산하여 다시 잠을 청하라 이르거라.”
영문을 알 수 없던 학평관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명을 내려 놓더니. 잠깐 사이에 왜 이토록 태도가 변한 것일까?
무섭게 성을 내는 그의 모습에 학평관은 되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고, 다시 명을 전하러 밖으로 향했다.
기홍은 여전히 안에서 백천범을 달래 주고 있었다.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 마마, 울지 마시어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왕비 마마께서 의지할 곳 없이 홀로 자라셨으니 어찌 된 일인지 당연히 모르셨겠지요. 왕비 마마께서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 모르는 일이 생기거든 저와 녹하에게 물어보시어요.
달거리를 할 때 우시면 몸에 좋지 않으니 울지 마시어요. 찬물에 닿아서도 안 되고, 매운 걸 드셔도 안 됩니다. 머리를 감으셔도 안 좋아요…….”
기홍이 쉬지 않고 열심히 말해 주었지만 백천범은 듣는 둥 마는 둥 끊임없이 울어 댔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올랐고, 두 뺨은 눈물이 하도 흘러내려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은 또 없을 것만 같았다. 왕야가 직접 상처를 찾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왕야가 계속 찾았다간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는 게 더 나을 뻔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그녀의 울음소리에 더 이상 참지 못한 묵용감은 다시 발을 들어 올리고 침소로 들어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만 우시오!”
그의 성난 모습에 백천범은 더욱 경기를 일으켰다. 안 그래도 무섭던 그가 성을 내며 말하니 말이다. 서럽게 울며 내쉬던 숨에 목이 멨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백천범을 보자 놀란 기홍이 그녀의 등을 힘껏 두드리며 말했다.
“왕비 마마, 숨 쉬십시오. 어서요.”
묵용감은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걷어찰 수 있을 만큼 성이 났지만 이런 상황에서 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화를 냈다가는 그녀가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꼭 상전이라도 받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 겪는 이런 상황에서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잘 알지 못했다.
결국 그가 화를 눌러 담고 부드럽게 말했다.
“됐소, 그만 우시오. 큰일도 아니니.”
백천범은 호두처럼 퉁퉁 부은 두 눈으로 쭈뼛거리며 말했다.
“왕야, 제게 화를 내지 않으실 것입니까?”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그저 백천범이 울음을 그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안 낼 것이오. 우느라 진이 다 빠졌을 텐데, 어서 가서 쉬시오.”
백천범이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신을 신었다.
“그럼 더 이상 왕야를 방해하지 않고 후원으로 돌아갈게요.”
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 세웠다.
“어딜 돌아간다는 것이오. 어차피 더러워졌으니 오늘은 여기서 묵으시오. 나는 서재에서 잘 테니.”
그날 밤, 백천범은 그의 말을 따라 묵용감의 침소에서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 묵용감은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고 있을 계집아이가 생각났다. 왜인지 알 수 없지만 기분이 조금 이상했던 그는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계집아이의 자는 모습은 조금 흉측했다. 마른 체구였지만 크게 대자로 뻗어서는 부드러운 이불을 잔뜩 휘감은 채 손바닥만 한 얼굴만 드러내고 있었다.
미역처럼 산발을 한 새카만 머리카락은 먹구름을 보듯 한쪽에 드리워져 있었고, 그중 몇 가닥은 얼굴에 떡하니 붙어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냈다.
그러다 그의 손끝이 더 위를 향했다. 매끈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기억 속의 느낌과 똑같았다.
그가 침대 앞에 앉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제 출혈이 너무 심해서였을까? 얼굴이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게 유독 더 차분하고 하늘하늘해 보였다. 꼭 언제라도 구름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별안간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힌 그는 빈틈없이 그녀의 이불을 잘 여며 주었다. 이불 위로 그녀의 마른 몸집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학평관이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묵용감은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왕야와 왕비가 한 방에 있으니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하는 수 없이 두 차례 정도 헛기침을 하여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알려주기로 했다.
그가 헛기침을 한 번 하자 역시나 묵용감이 발을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왕비가 푹 자야 하니 시끄럽게 굴지 말거라.”
“예, 알겠습니다.”
건넌방에서 아침을 먹던 묵용감은 정신을 딴 곳에 두고 온 사람 같았다. 죽을 떠서 입에 넣고는 씹지도 않고 곧장 삼키며 넋을 놓기 일쑤였다.
한참 뒤에 그가 물었다.
“피를 보충하는 데 제일 좋은 음식이 무엇이냐?”
기홍이 답했다.
“소인이 알기로는 당귀, 흑설탕, 대추, 용안, 인삼, 아교, 구기자 등이 있사온데…….”
그녀가 잠시 말을 끊더니 조심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다.
“왕야, 소인이 왕비 마마께 몸보신할 음식을 만들어 드릴까요?”
“원체 몸도 약한데 난생처음 그리 심한 출혈을 겪었으니 몸을 보양해야 할 것이다. 안 그랬다간 다른 이들이 내가 너무 모질게 대한다고 숙덕대겠지.”
기홍이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모질기는커녕 더할 나위 없이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학평관은 지난번에 나누었던 얘기를 다시 꺼냈다.
“왕야, 소인이 보기에 남월각의 하인들을 바꾸는 게 좋을 듯합니다. 왕비 마마께서 아직 어리시니 성심껏 시중을 드는 이가 옆에 있다면 왕야께서도 마음을 놓으실 것입니다.”
묵용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기홍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왕야, 실은 계속 말씀드리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지난번 왕비 마마께서 연못에 빠지셨을 때, 소인이 옷을 갈아입혀 드리다가 왕비 마마의 몸에서 상처를 보았습니다. 꼬집히고 손톱으로 긁힌 흔적들이었습니다.”
묵용감이 급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어찌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놀란 기홍이 급히 무릎을 꿇었다.
“왕야께 말씀 드리려 했으나 왕비 마마께서 체면이 서지 않으니 제발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순간 소인의 마음이 약해져 그리하겠다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목숨을 잃을 것 같으니 그제야 뛰어와 살려 달라 청하다니! 괴롭힘을 당하는 건 참을 수 있다는 건가? 참으로 넓은 마음씨였다.
묵용감이 주먹을 쥐었다 펴더니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비가 아무 말도 말아 달라고 한 것이니 본왕은 모르는 척 해야겠지. 남월각의 일은 본왕이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
왠지 모를 찝찝함이 느껴지더니 이상하고 어색한 감정이 마구 뒤섞였다. 기분이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괴로움이었다. 눈앞에 짙은 안개라도 낀 듯 무엇 하나 뚜렷한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