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그 일이 있고 난 후, 묵용감의 기분은 줄곧 별로인 듯했다. 이튿날 백천범을 마주쳐도 희미한 웃음조차 보이질 않았고, 그녀가 불러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백천범은 그의 눈 밖에 난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노랑이를 데리고 풀밭에서 햇빛을 쬐거나 쇠귀뚜라미를 꺼내 여린 풀잎을 먹이며 울어 보라고 장난을 칠 뿐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쇠귀뚜라미가 드디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귀뚤귀뚤. 귀뚤귀뚤.
쇠귀뚜라미는 가볍고 맑은 소리로 일정하게 울었다.
신이 난 백천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세히 바라보았다. 노랑이도 조금 참기 힘든 듯했다. 이렇게 커다란 벌레가 눈앞에 있는데도 먹지 못하고 보기만 해야 한다니. 게다가 어찌나 오만한지 시끄럽게 울어 대기까지 했다.
노랑이는 결국 목을 빼더니 발톱으로 땅을 몇 차례 긁으며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듯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런 노랑이의 속내를 파악한 백천범은 엄한 표정을 짓고 따끔하게 혼을 냈다.
“어제 그렇게 많이 얘기를 했는데도 한 글자도 알아듣지 못한 거니? 감히 깜장이를 먹으려 했다간 네가 먼저 잡아먹힐 줄 알아!”
어찌나 앙칼지게 혼을 내는지 하마터면 그녀의 손가락이 노랑이의 머리를 찌를 뻔했다.
먼발치에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묵용감이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다른 건 다 괜찮았지만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게 정말 밉살스러웠다.
생각난 김에 그가 고개를 돌려 부엌 앞에 서 있는 양려낭을 바라봤다. 더 이상 저택에 남겨 두어선 안 될 듯하니 돌려보낼 구실을 찾아야 했다. 원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한 번 거치적거리기 시작하니 보면 볼수록 성가셨다.
그는 사실 어제의 불쾌했던 일을 진즉에 털어 버렸지만 기분이 풀렸다는 걸 드러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욕심이 끝이 없는 백천범에게 기분 좋은 기색을 보였다간 사리 분간도 못 하고 또다시 주책을 떨 게 분명했다.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묵용감의 낯빛이 좋지 않자 백천범은 말을 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녀는 식탁에 올려놓은 자기 단지에 밥풀을 한 알 넣어 준 뒤 쇠귀뚜라미가 먹는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양려낭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왕비 마마, 그것 좀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너무 징그럽습니다.”
그녀의 말에 백천범은 재빨리 단지를 발밑에 내려놓았다. 녹하가 작은 걸상을 백천범 옆에 옮겨 놓더니 양려낭을 흘겨보며 말했다.
“왕비 마마, 여기에 두시지요. 울음소리를 들으며 식사를 하시면 밥맛이 더 좋을 것입니다.”
묵용감이 딱딱하게 말했다.
“밥을 먹을 땐 밥만 먹으면 될 것이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어서 무엇 하느냐? 공연을 보는 것도 아니고.”
녹하는 하는 수 없이 걸상을 다시 가져다 두었다.
양려낭은 우쭐함에 눈썹을 치켜세우고 남몰래 기뻐했다.
꾸중을 들은 백천범은 눈치껏 행동하기 위해 밥을 먹자마자 노랑이와 쇠귀뚜라미를 데리고 서둘러 후원으로 돌아갔다.
회림각에 더 남아 있고 싶어 하는 양려낭에게 녹하가 말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양씨 아가씨도 서둘러 왕비 마마를 따라 가시지요. 지금은 무수리가 등을 비춰 주니 편히 갈 수 있지만, 이따 혼자 가시게 되면 아무런 불빛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큰일입니다.”
사실 그녀의 말에 담긴 속뜻은 왕비가 갈 땐 하인이 따라붙지만, 신분이 불분명한 양려낭이 갈 땐 아무도 시중을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양려낭은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이 화가 났지만, 묵용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못 이기는 척 백천범을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남월각 입구에 다다르자 백천범은 무수리에게 그만 돌아가라 일렀다. 처소 안의 길은 누구보다 익숙했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자신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백천범은 지난번 싸움 이후 최대한 남월각의 하인들을 피해 다니는 중이었다. 묵용감과 더 가까워져 유모들을 쫓아내라 청을 드리고 싶기도 했지만,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탁자 앞에 앉은 백천범은 물을 따라 마시며 쇠귀뚜라미에게 장난을 쳤다. 탁자에 올라오지 못하는 노랑이는 발밑을 이리저리 파고들다 조급했는지 날개를 두어 번 파닥거렸다. 그녀가 가볍게 노랑이를 밀치며 말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네 자리로 가서 잠이나 자.”
그녀는 지난번 땅콩을 담았던 키에 헝겊을 깔고 노랑이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옆에는 작은 접시 두 개도 놓았다. 하나에는 쌀 부스러기, 다른 하나에는 물을 주었다. 노랑이가 밤중에 배가 고프진 않을까 걱정되어 그녀가 특별히 준비한 것이었다.
백천범이 자기 단지 뚜껑을 조심스레 닫으며 말했다.
“깜장이도 어서 자, 내일 또 놀러 가자.”
그녀는 미리 떠 놓았던 물로 세수와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졸음이 쏟아지는 와중에 배가 살짝 아파 왔다. 가끔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녀는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란 생각에 서둘러 잠을 청했다.
그녀는 평소 깊게 잠들진 못했지만 몇 차례 뒤척이면 금세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빠르게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작스레 오른쪽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어찌나 아픈지 깜짝 놀라 잠에서 화들짝 깰 정도였다. 손으로 배를 문지르는 그녀의 이마는 온통 땀으로 흥건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배를 문지르며 몸을 잔뜩 웅크려 보아도 통증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꼭 손오공이 배 속으로 들어가 여의봉을 마구 휘두르고 찌르며 소란을 피우는 듯 심한 통증이 이어졌다.
아픈 배를 부여잡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체 뭘 잘못 먹었기에 이리도 배가 아플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그렇다고 뒷간에 가고 싶은 느낌은 아니었다.
회림각에서는 다 함께 같은 음식을 먹으니 무슨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묵용감을 화나게 했다지만, 그런 일로 그가 자신에게 독을 내릴 리도 없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 스치기라도 한 듯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물?
처소에 돌아온 그녀가 입에 댄 거라곤 물 한 잔뿐이었다. 그 물에 유모들이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 역시 지난번 일로 화가 난 유모가 백천범을 가만둘 리 없었다.
갑작스레 다리 사이에서 열이 나는 듯하더니 무언가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손을 뻗어 슬쩍 만져 보니 끈적한 게 묻어났다.
깜짝 놀란 그녀는 서둘러 침대 위에서 뛰어 내려와 촛불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손 가득 피가 묻어 있었다!
평소 침착함을 잃지 않던 그녀였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니 한순간에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일념으로 오랜 시간 힘들게 버텨 왔는데……. 많은 피를 흘리고도 계속해서 흐르는 느낌이 드는 걸 보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듯했다.
곧 죽을 거란 공포에 사로잡히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녀를 지배했다. 그녀는 겉옷을 두를 정신도 없이 곧장 남월각을 뛰쳐나왔다.
지금 이 순간, 초왕야만이 그녀를 구해 줄 수 있었다. 그녀를 미워하는 그였지만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을 거란 직감이 든 것이다.
그녀는 어렴풋한 달빛을 따라 회림각으로 질주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갑작스레 나타나자 문 앞을 지키던 머슴이 깜짝 놀라 물었다.
“멈추시오! 누구시오?”
배를 감싸 쥔 백천범이 헐레벌떡 답했다.
“급히 왕야를 만나러 왔소.”
그녀가 말을 뱉으며 황급히 뛰어 들어간 탓에 머슴도 그녀를 뒤쫓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왕비라 한들 이미 잠든 왕야를 깨울 수 없었다.
어둠을 뚫고 뛰어 들어오는 두 사람의 형체가 내부에서 경비를 서던 또 다른 머슴의 눈에 들어왔다. 그중 뒤에서 쫓던 사람이 조용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비 마마, 들어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왕야께서 이미 침소에 드셨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머슴이 곧장 왕비를 잡아 세웠다. 갑작스런 소동에 달려온 머슴까지 더해져 세네 명이 백천범을 막아섰다. 다급했던 그녀가 왈칵 눈물을 쏟으며 서럽게 울었다.
“왕야를 만나야 하오, 왕야를 꼭 봐야 한단 말이오.”
오늘 밤 숙직을 선 기홍은 갑작스런 소란에 신을 구겨 신고 급히 밖으로 나왔다. 백천범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기홍은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갔다.
“왕비 마마,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신 것입니까?”
백천범은 자신을 막아선 머슴들 틈을 비집고 빠져나와 기홍의 품에 와락 안기더니 큰소리로 서럽게 울었다.
“언니, 왕야를 만나야 해요.”
기홍은 퍽 난감했다. 잠을 깨우는 것은 묵용감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분명 벌로 채찍질을 내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서럽게 우는 왕비를 보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더 이상 고민할 틈도 없었다. 기홍이 백천범을 끌어안고 몸을 돌린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커다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묵용감이 잠들었을 때, 그의 잠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건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규율이었다. 그러니 역사상 저택에서 오늘처럼 이렇게 떠들썩했던 적이 없었다.
그는 한껏 화가 난 상태로 침대에서 일어나 문 앞까지 걸어왔다가 희미하게 들리는 백천범의 목소리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렇게 깊은 밤에 무슨 일로 이곳을 찾았단 말인가?
게다가 자세히 들어 보니 서럽게 울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황급히 문발을 걷어 밖으로 향했다.
그가 멈춰 서자 자그마한 몸집이 그의 품에 와락 달려들더니 더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왕야, 살려 주십시오!”
묵용감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껴안으며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몸에 독이 퍼지고 있어요. 저는 곧 죽을 것입니다.”
그녀가 떨리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지만, 어렴풋이 비릿한 냄새가 풍겨 왔다.
다급한 상황에 그가 그녀를 안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른 기홍이 촛불에 불을 켜자 속적삼과 속바지만 입은 그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속바지는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녀의 손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다급해진 그가 소리를 높였다.
“이게 무슨 일이오? 독이 퍼지다니?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그가 고개를 돌려 뒤따라온 학평관에게 명했다.
“영구를 불러 후원을 지키라고 하거라.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 누구도 후원을 빠져나가선 안 될 것이다.”
학평관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지만 새파랗게 질린 묵용감의 낯빛에 더는 묻지 못하고 서둘러 명을 전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