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귀뚜라미를 가지라는 양려낭의 말에 백천범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건 왕야께서 언니에게 주신 건데 안 가지실 거예요?”
양려낭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저는 이런 곤충이 제일 무섭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가지십시오.”
그녀의 말에 백천범은 단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그녀는 쇠귀뚜라미의 먹이로 여린 풀잎을 꺾어 단지 안에 넣어 주고는 혼잣말을 했다.
“내가 이름을 지어 줄게, 뭐가 좋을까? 몸이 새까마니깐 깜장이라고 불러 줄게.”
그녀가 깜장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갑작스레 노랑이가 다가왔다. 목을 내빼어 단지 안쪽을 들여다보던 노랑이는 벌레가 보이니 순간적으로 부리를 쪼아 댔다.
백천범이 황급히 노랑이를 떨어뜨려 놓았다.
“얘는 먹으면 안 돼. 네 여동생이야! 앞으로 다 같이 친하게 지내야 된다고.”
기분이 좋아진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 양려낭에게 물었다.
“병아리에게 벌레와 친구로 지내라고 하는 건 정말 이상하지요?”
양려낭이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왕비 마마와 함께 있으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는걸요.”
자신의 속뜻이 드러날까 봐 걱정된 양려낭은 황급히 백천범에게 낙성각에 꽃을 심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종일 회림각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 * *
묵용감은 동쪽 교외를 방문한 뒤,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공부의 소 상서와 유 시랑, 그 외 관료들은 군영에 이미 음식을 차려 놓고는 그에게 함께 밥을 먹자 청했다.
하루종일 힘겹게 무너진 제방을 메웠으니 그 또한 그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자리를 지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은 핑곗거리에 불과했다.
“본왕은 오늘은 다른 이와 중히 논할 사안이 있어 먼저 가 보겠소. 다음에 함께 술이나 마십시다.”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가동이 조용히 영구에게 물었다.
“영구아, 왕야께서 누구를 만나신다는 것이냐?”
영구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왕야의 일은 형님이 관여하지 않는 게 가장 좋습니다.”
“아이, 얘가 참. 왕야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이 어떻게 관여를 하지 않겠니?”
영구가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왕야에게 해가 될 사람은 아니니.”
“대체 누군데?”
영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을 몰며 앞으로 나아갔다.
화가 난 가동이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말을 안 해 주겠다 이거지? 그래, 알았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텐데, 뭐.”
저택에 돌아오니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중문에 도착한 묵용감은 말에서 내린 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고요한 게 회림각 어디에서도 백천범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학평관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묵용감이 물었다.
“왕비는 없는 것이냐?”
학평관이 답했다.
“오늘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말에 놀란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안 오다니, 허면 약도 먹지 않은 것이냐?”
학평관이 몸을 굽히며 답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 지어 드린 약은 어제 드신 게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렇군.”
묵용감이 다시 앞으로 가더니 이내 발걸음이 곧 느려졌다. 이렇게 급히 돌아온 것은 그녀의 신난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쇠귀뚜라미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 모습을 생각하며 왔건만 웬걸, 아예 회림각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니.
순식간에 실망감이 차올랐다. 아마 가지고 놀 게 생기니 이곳은 생각나지도 않는 듯했다.
“왕야, 피곤하시지요. 소인이 곧장 기홍에게 저녁상을 올리라 이르겠습니다.”
묵용감은 잔뜩 기운이 빠진 채 건성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튿날, 사흗날이 되어도 백천범은 회림각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저택에 돌아온 묵용감은 매일 습관적으로 학평관에게 “왕비는?”이라고 물었다.
학평관이 고민 끝에 묵용감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왕야, 며칠간 왕비 마마를 보지 못하셨으니 소인이 사람을 불러 왕비 마마를 모셔 올까요?”
묵용감은 금방 옮겨 놓은 수련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본왕이 왜 왕비를 봐야 하는 것이냐?”
학평관이 속으로 생각했다.
‘보고 싶지 않으신데 왜 날마다 왕비 마마에 대해 물으시는 거란 말인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가 아직 이 수련을 보지 못한 것이냐?”
“예, 막 옮겨 놓은 것이라 아직 보지 못하셨습니다. 이틀 동안 자리를 잘 잡아 더 보기 좋아진 듯합니다.”
말을 마친 학평관은 머릿속에 번뜩 수가 떠올랐다. 그는 중문으로 가 차씨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께 가서 송사리를 잘 옮겨 두었으니 와서 확인하시라 전하거라.”
차씨는 대답을 마치고 잽싸게 후원으로 뛰어갔다.
백천범은 회림각에 가고 싶었지만, 양려낭이 늘 그녀를 데리고 다니며 하루종일 꽃을 심거나 연지를 만드는 바람에 잠까지 낙성각에서 청할 뻔했다.
차씨가 달려와 말을 전하자 백천범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회림각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기홍 언니가 해 준 음식을 먹지 못했더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백천범이 회림각으로 향하자 뒤처질 수 없던 양려낭도 자연스레 따라나섰다.
회림각 복도에 들어서니 묵용감이 연못가에서 잉어 밥을 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사소한 일은 백천범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기에 쏜살같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제가 줄래요, 제가요.”
요즘 들어 묵용감과 부쩍 친숙해진 그녀는 종종 저택의 규율도 까맣게 잊은 듯했다.
그녀를 마냥 어린아이라고 여기는 묵용감도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고, 손에 들고 있던 잉어 먹이를 넘긴 뒤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왼쪽에서 뿌렸다가, 오른쪽에서 뿌렸다가. 장난을 치며 먹이를 주는 바람에 비단잉어들도 이쪽으로 헤엄쳤다 다시 저쪽으로 흩어지기 바빴다. 비단잉어들이 물보라를 일으켜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그래도 백천범은 신이 나는지 큰소리로 웃었다.
양려낭이 묵용감의 곁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린 뒤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께 문안 인사드립니다.”
묵용감은 듣는 척도 않고 물속의 잉어들이 먹이를 쟁탈하는 모습에만 빠져 있었다.
조금 난감했던 양려낭은 하는 수 없이 굽혔던 무릎을 세우고 조용히 한쪽에 서 있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먼저 쇠귀뚜라미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새까맣게 잊고 있는 듯 언급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직접 그녀에게 물었다.
“쇠귀뚜라미는 마음에 드시오?”
양려낭에게 묻는 것이라 생각한 그녀는 깜짝 놀라 몸을 옆으로 돌려세웠다. 쇠귀뚜라미는 왕야가 려낭 언니에게 준 것인데,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 이를 어찌 한단 말인가?
그녀가 걱정하고 있는데 뒤에서 양려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인이 보기엔 조금 무서웠지만 왕비 마마께서는 참으로 좋아하셨습니다!”
자신을 언급했으니 어물쩍 넘어갈 수 없던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둘러댔다.
“사실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냥 려낭 언니에게 주겠습니다.”
묵용감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참으로 좋아했다더니, 어째서 또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대체 좋다는 것인가? 싫다는 것인가?
양려낭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 소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무섭습니다.”
조금 미안했던 백천범이 묵용감에게 말했다.
“아니면 왕야께서 려낭 언니에게는 다른 걸 주시는 게 어떨까요? 아가씨들은 벌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이 의아했다. 무엇 하러 양려낭에게 다른 걸 준단 말인가?
양려낭이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시어요. 왕야께서 제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 소인은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백천범은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번 양려낭과의 혼사에 대해 물으니 별 까닭도 없이 성질을 부리는 바람에 자신에게 주었던 은자까지 빼앗아 간 그였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던 백천범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얘기를 꺼내 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양려낭을 저택에 데려왔으니,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려낭 언니, 혹시 저녁 준비가 다 되어 가는지 봐 줄 수 있어요? 배가 고파 죽겠거든요.”
양려낭은 자신을 보내고 백천범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백천범은 손에 남아 있던 잉어 먹이를 연못에 모두 던진 뒤, 손을 깨끗이 털며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왕야.”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린 묵용감이 짧게 대답했다.
백천범은 조금 머뭇거리며 그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내 백천범은 먼저 협상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왕야, 말씀드릴 게 있어요. 먼저 화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본왕이 그리도 성질을 잘 내는 사람이오?”
“그럼 화를 내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죠?”
백천범이 새끼손가락을 내보이며 말했다.
“약속하신 거예요.”
묵용감이 어쩔 수 없이 대꾸했다.
“본왕의 말은 중천금이오. 화를 내지 않는다 했으니 그리할 것이오.”
말을 마친 그가 뒤늦게 손을 들어 올렸지만 이를 신경 쓰지 못한 백천범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주저 없이 내려 버렸다. 머쓱했던 묵용감은 백천범이 보지 못한 게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왕야, 려낭 언니가 저택에 온 지도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대체 어쩌실 계획이신지요? 무슨 말씀이라도 하셔야지요. 아무런 신분도 없이 후원에 있으니 하인들도 어찌나 언니를 무시하는지… 정말 너무 가여워 죽겠어요.”
백천범이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자 묵용감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왕비가 직접 후원에 데려다 놓고, 왜 나에게 계획을 묻는 것이오? 자신의 처소도 엉망진창인 마당에 다른 사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나 보오.”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소매를 휙 날리며 자리를 떴다.
백천범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화를 내지 않기로 약속했으면서 또 화를 내시다니.”
왕야가 대체 어쩌려는 것인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양려낭이 저택에서 지내는 걸 자신도 동의해 놓고 그 다음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려 하지 않다니! 설마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것인가?
양려낭 같이 예쁜 여인 정도면 왕야에게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백천범은 서로 볼 기회가 적은 탓에 왕야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묵용감의 안색이 조금 괜찮아 보이자 백천범이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야, 피곤하지 않으신지요? 제가 안마를 좀 해 드릴까요?”
묵용감은 그녀의 호의에 기분이 좋았지만,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마지못해 말했다.
“좋소.”
백천범이 양려낭에게 눈짓을 보냈다.
“려낭 언니께서 수고 좀 해 주시어요!”
양려낭은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재빨리 묵용감 뒤로 다가가 섬섬옥수를 그의 어깨에 올려놓고 적당한 힘으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묵용감은 금방이라도 화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억지로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됐소, 나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겠소.”
말을 마친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