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가동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용히 영구에게 물었다.
“영구야, 왕야께서 대체 뭘 사시려는 거야?”
영구는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슬쩍 턱을 들었다 내리며 고갯짓을 했다. 그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니 묵용감이 벌레를 파는 가게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
그가 고삐를 넘기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가동도 영구 손에 고삐를 쥐여 주고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각종 벌레의 떠들썩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더워져 귀뚜라미는 많지 않았다. 여러 마리가 한 양철통 안에 들어 있기도 했고, 한 마리만 단독으로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계산대에는 벌레를 담을 채집통이 놓여 있었다. 대나무로 짠 자그마한 소쿠리와 자기 단지, 나무통 등 고급스러운 것부터 투박한 것까지 가격대별로 다양했다.
가게 주인이 손을 비비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가 묵용감과 가동의 행색을 훑어보더니 곧장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우리 나리께서는 귀뚜라미를 찾으십니까? 아니면 다른 찾으시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저희 집은 남쪽에서 가져온 최상급만 취급하고 있답니다. 이건 어떠신지요? 울음소리가 참으로 맑지 않습니까? 몸집도 크고 울음소리도 큰 걸로 고르시는 게 좋습니다.
아니면 이건 어떠십니까? 머리도 둥글고 이빨도 크고 다리에 달린 털도 길지요. 이렇게 목 주변이 두껍고 거친 데다 머리가 관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흔히 관머리라고 부른답니다. 게다가 봉분에서만 잡히니 그 기운이 참으로 신묘한 놈이지요.”
묵용감이 그의 말을 끊었다.
“아가씨들이 좋아할 만한 것은 뭐가 있소?”
“아가씨들이 기르기에는 무늬 귀뚜라미가 제격이지요. 생김새도 예쁘장하고 울음소리도 듣기 좋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 남쪽에서도 칠월이나 되어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 쇠귀뚜라미는 어떠신지요? 크기가 작은 것도 있습니다. 꽁무니 가운데 날개가 있어 싸움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아가씨들이 울음소리를 듣거나 날개를 펼친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십니다.”
이런 것에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적이 없던 묵용감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럼 모양새가 괜찮은 것으로 한 마리 골라 주시오. 아가씨가 가지고 다닐 만한 것으로 말이오.”
“걱정 마십시오, 나리. 아주 좋은 놈으로 골라 드리겠습니다. 여동생에게 선물하시려는 모양입니다. 이렇게나 자상한 오라버니라니!”
묵용감에게 끊임없이 굽실거리던 가게 주인은 귀뚜라미를 고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리, 어디에 담아 가시겠습니까? 나무통, 자기 단지, 대나무로 엮은 소쿠리도 있습니다.”
“제일 좋은 걸로 주시오.”
“앗! 알겠습니다.”
그가 붉은색 자기 단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건 어떠십니까, 복을 부르는 붉은색 좀 보십시오. 아가씨도 분명 좋아하실 것입니다.”
묵용감이 무미건조하게 흘겨보며 대답했다.
“알겠소, 그걸로 하지.”
묵용감은 주인에게서 물건을 받아 들고 곧장 밖으로 향했고, 가동이 값을 계산했다.
가동은 살기 어린 눈을 크게 뜨고 가게 주인과 흥정을 했다. 결국 가게 주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싼값에 판 것도 모자라 공손히 그들을 배웅했다.
* * *
말을 타고 집에 돌아오니 외곽 저수지 방비를 담당하는 참령參領 주자명周子明이 대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동쪽 교외의 제방 일부가 오늘 아침 무너져 내려 급히 복구를 하고 있지만 물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전했다. 게다가 강물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으니 방안을 짜지 못하면 홍수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주자명이 말을 이었다.
“공부工部의 소蘇 상서尚書와 유劉 시랑侍郎이 와 있긴 하지만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어 소인이 왕야를 찾아왔습니다. 이러다 제방이 다 무너져 내린다면 하류의 비옥한 땅이 다 잠길 것입니다.”
묵용감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군대를 통솔하는 그였으니 군대가 동원된 치수治水 또한 그의 일이 된 것이다.
그가 손에 있던 물건을 머슴에게 넘기며 말했다.
“가서 왕비에게 전해 주어라.”
말을 마친 그는 다시 말에 올라 가동과 영구를 이끌고 동쪽 교외로 질주했다.
궁금했던 머슴이 도자기 단지의 뚜껑을 열어 보니 검고 반질반질한 쇠귀뚜라미가 들어 있었다. 왕비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것까지 기억해 두었다가 사다 주는 걸 보니 왕비가 정말로 왕야의 총애를 듬뿍 받는 듯했다. 그는 서둘러 뚜껑을 닫고 후원으로 달려갔다.
후원에 거의 도착할 무렵, 머슴이 양려낭과 마주쳤다. 왕비가 직접 후원에 데려온 만큼 왕야의 부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곧장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양씨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혹시 왕비 마마를 보셨는지요?”
양려낭은 회림각과 후원의 하인들에게는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만, 다른 하인들에게는 살짝 무게를 잡았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머슴의 얼굴을 훑으며 물었다.
“왕비 마마는 왜 찾는 것이오?”
“그것이…….”
머슴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방금 왕야께서 돌아오셨는데 쇠귀뚜라미를 주시면서 왕비 마마께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왕야는 어디 계시오?”
“왕야께서는 급한 일이 생기셔서 저택에 발도 못 붙이시고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이 대신 전해 드리러 온 것이지요.”
양려낭이 말했다.
“후원에 갈 필요 없소. 왕비 마마께서는 산책을 하시느라 자리를 비우셨소. 찾지 못할 것 같으면 내게 주시오. 왕비 마마를 만날 기회가 많으니 내가 전해 주겠소.”
머슴은 잠시 고민했다. 왕비는 늘 밖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양려낭은 왕비와 곧 만날 테니 차라리 그녀에게 전해 달라고 하는 편이 더 나았다. 머슴은 단지를 양려낭에게 건넸다.
“양씨 아가씨, 조심하십시오. 절대 놓치시면 아니 됩니다.”
양려낭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까짓 쇠귀뚜라미 한 마리에 호들갑은. 보아하니 그날 하던 얘기를 초왕야가 마음에 담아 둔 듯했다.
그녀는 왕야가 백천범을 아이라 생각해 동정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지 조금 헷갈렸다. 어쨌든 쇠귀뚜라미를 손에 넣었으니 이 일은 자신의 뜻대로 휘두를 수 있었다.
“걱정 마시오. 꼭 왕비 마마께 전해 드리겠소.”
묵용감이 없는 회림각은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양려낭은 서둘러 정원으로 향했다. 마침 백천범이 호수 주변에서 기마자세를 연습하고 있었다.
양려낭이 손에 든 단지를 높이 들며 말했다.
“왕비 마마, 어서 와 보십시오. 왕야께서 제게 쇠귀뚜라미를 주셨습니다.”
호기심 많은 백천범은 땅에 꽂아 놓은 향이 거의 다 탄 걸 확인하고는 일어나 쏜살같이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디 봐요, 와! 진짜 예쁜 쇠귀뚜라미네요. 우와, 꼬리 가운데에 하얀 날개가 달려 있어요, 예쁘다.”
백천범이 길가에 있는 풀잎을 뜯어 쇠귀뚜라미를 간질였다.
“귀뚜라미야, 울어 봐. 네 목소리가 어떤지 언니가 좀 들어 볼게.”
양려낭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이미 여동생 노랑이도 있으신데, 지금은 쇠귀뚜라미 여동생이 한 마리 더 생겼네요. 집안이 점점 더 번성하는군요.”
백천범은 은근히 비꼬는 그녀의 속뜻은 알아채지 못한 채 양려낭에게 물었다.
“정말 암컷 귀뚜라미일까요?”
그녀가 귀뚜라미를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금방 투덜거렸다.
“에이, 수컷인지 암컷인지 알 수가 없잖아.”
쇠귀뚜라미는 새로운 환경에서 잔뜩 경계한 탓인지 소리를 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간질여도 울지 않자 백천범이 절망한 듯 말했다.
“대체 울 수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왕야께서 벙어리 귀뚜라미를 사 오신 건 아니겠지?”
양려낭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백천범이 쇠귀뚜라미에만 푹 빠져 있자 일부러 그녀를 더욱 자극했다.
“그날 왕야와 쇠귀뚜라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셔서 왕비 마마께 사 주신 줄 알았는데 제게 주시다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백천범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당연히 언니에게 주시는 것이겠지요. 언니는 왕야의 부인이잖아요. 왕야께서 돌아오시는 길에 언니가 생각나서 사다 주셨다는 것은 언니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일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다 보면 분명 기회가 올 거예요,
언니. 제가 나중에 왕야께 다시 한번 말씀드려 볼게요. 왕야께서 말씀만 해 주시면 학평관 어르신도 시녀를 더 보내 주실 테니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남월각 시녀들의 행실이 늘 궁금했던 양려낭이 이참에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도 노비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 같던데, 왜 왕야께 다른 시녀로 바꿔 달라고 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도 언니랑 같은 상황이에요. 왕야께서 지금은 제게 잘해 주시는 편이지만, 저희 집안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으시거든요.”
“소문에 왕비 마마의 친정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던데. 어째서 왕비 마마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인지요?”
백천범은 풀잎으로 계속 쇠귀뚜라미를 간질이며 말했다.
“집집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는 법이니까요.”
대화가 여기까지 흘러온 이상 양려낭은 아예 속 시원히 물어보기로 했다.
“왕야와 백 승상께서 사이가 좋지 않으시다던데, 정말입니까?”
비밀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않다 뿐이겠어요, 원수지간이나 다름없대요.”
“왕비 마마께서도 중간에서 참으로 난감하시겠습니다.”
백천범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감할 것도 없어요.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왕야께서도 이치를 따지시는 분이시니 저를 어떻게 하시지도 않으시고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양려낭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왕야를 좋아하십니까?”
백천범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좋고 싫음으로 따지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저한테 왕야는 착한 사람이에요. 꼭 저희 큰오빠 같아요. 큰오빠가 집에 있을 때 제 머리를 자주 빗겨 주었거든요.”
“그렇담 왕비 마마께서는 왕야를 오라버니라 생각하는 거군요.”
“비슷해요.”
백천범이 말했다.
“만약에 왕야가 이렇게 계속 저에게 잘해 주시면 이곳에 남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백천범이 왕야에게 가진 마음을 꿰뚫은 양려낭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왕비 마마는 왕비 마마이시니 왕야와 부부 사이시죠.”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은 왕야와 저희 아버지 사이의 원한 때문에 이 왕비 자리도 오래 지킬 수 없을 거예요. 그땐 저택에 새로운 사람을 들이시겠죠.”
“왕야께서 그리 말씀하셨어요?”
“아뇨,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실은 저도 다 알고 있어요.”
양려낭이 비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왕비 마마도 참 박복한 팔자시군요.”
그녀가 가만히 쇠귀뚜라미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께서 가지십시오. 저는 귀뚜라미가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