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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9)화 (58/1,192)

제59화

먹을 갈던 그녀는 그의 실력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왕야, 참으로 명필이십니다. 언제 저에게 상으로 한 장 주시옵소서. 액자에 담아 소인의 방에 걸어 놓고 가보로 삼겠습니다.”

묵용감은 글씨를 쓰는 데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다. 줄곧 알 수 없는 초조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붓에 마음을 쏟지 못하니 글자가 예쁘게 써질 리 없었다. 그는 망친 종이를 구겨 바닥에 던진 뒤, 새 화선지를 펼쳐 다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말이 없자 양려낭은 조심스레 바닥에 있던 종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 또한 충분히 훌륭합니다. 왕야, 소인에게 상으로 주시면 안 될까요?”

“움직이지 마시오!”

묵용감의 호통에 깜짝 놀란 양려낭이 손을 떨었고, 종이 뭉치는 또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묵용감은 답답함에 붓을 내려놓고 뒷짐을 진 채 밖으로 나왔다. 방에 홀로 남겨진 양려낭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복도를 따라 걷던 묵용감이 연못가에 다다랐다. 석양빛에 물든 붉은 하늘이 연못에 붉은 흔적을 남겼다. 난간에 앉아 연못 안의 물고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송사리 몇 마리가 보였다. 가느다란 몸에 투명한 색에 가까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힘들었다.

그는 옆에 놓인 뜰채를 집어 들고 송사리가 보일 때마다 낚아 올렸다.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 않았다. 작은 물고기라 더 쉽게 놀라는지 아직 뜰채가 물에 닿지도 않았는데도 곧장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 번 시도를 했으나 한 마리도 건지지 못하자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뜰채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가동을 불렀다.

“저 송사리들을 모두 잡거라!”

가동이 곧장 뛰어와 연못 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왕야, 물고기가 너무 작아 잡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왕비도 잡는데 네가 못 하다니. 너는 왕비의 사부가 아니더냐? 괜히 제자를 망칠 생각 말고 사부를 그만두거라!”

까닭도 없이 묵용감에게 한바탕 혼이 난 가동은 하는 수 없이 조심스레 뜰채를 물에 담갔다.

잡기 어려웠지만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낚으니 몇 번 만에 두 마리를 건질 수 있었다. 옆에 있던 항아리에 옮겨 담자 백천범이 잡은 것까지 총 세 마리가 신나게 그 안을 헤엄쳤다.

묵용감은 어항 속 송사리를 보더니 학평관을 불렀다.

“이 항아리에 수련을 심거라. 꽃송이가 작은 것으로 말이다. 그리하면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겠지.”

명을 받든 학평관이 곧장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묵용감의 눈에 마침 부엌에서 나와 녹하와 함께 방으로 들어서는 백천범의 모습이 들어왔다.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늘어뜨리니 마치 검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살랑거리는 것이, 제법 가녀린 여인의 자태가 풍기는 듯했다.

무슨 까닭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그가 그녀들을 따라 방으로 향했다. 그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녹하가 백천범의 머리를 빗겨 주려 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 녹하와 백천범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은 사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백천범이 이렇게 아픈 건 자신 탓이었기 때문이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걸 정말 싫어하는 그였지만 어찌 된 일인지 늘 그녀에게만큼은 장난이 심해졌다.

그가 손을 뻗어 빗을 넘겨받았다.

“내가 하겠다.”

그의 말에 백천범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백천범의 얼굴을 본 묵용감은 목욕간에서의 일이 떠올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가 태연한 척 몇 차례 헛기침을 했다.

“몸은 좀 나아졌소?”

“많이 좋아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왕야. 다 왕야 덕분입니다.”

“예의 차릴 것 없소.”

묵용감이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빗어 두 갈래로 나누었다. 그는 우선 한쪽을 손에 쥐고 천천히 말아 올려 동그랗게 감쌌다. 자신이 생각해도 머리 빗는 솜씨가 날로 발전하는 듯했다. 경험이 쌓이니 점점 더 예쁘게 빗겨 줄 수 있었다.

“내가 상으로 준 비녀는 자주 하지 않는 걸 보니 왕비 마음에 안 드나 보오?”

마음에 들지 않을 리 없었다. 그 비녀를 자주 하지 않는 것은 그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뺏어 가려는 사람 때문이었다. 어제 그렇게 막무가내로 새 옷을 빼앗은 걸 보면 예쁜 장신구도 빼앗길 게 분명했다. 가져가도 상관없는 것들도 있었지만, 그녀가 아끼는 것은 절대 뺏길 수 없었다.

“왕야께서 주신 건 너무 귀해서 하고 다니기가 아깝습니다.”

백천범이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식사를 하는 동안 백천범은 커다란 그릇에 담긴 오리 백숙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침을 꼴딱 꼴딱 삼키는 그녀의 모습에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그만 보시어요. 의원님 말씀이 감기에 걸리셨을 땐 담백한 음식을 드셔야 한대요. 아픈 게 다 나으시면 소인이 만들어 드릴게요.”

백천범은 잔뜩 풀이 죽은 채 죽을 한 술 떠 입에 가져갔다. 예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향긋한 죽이었지만, 그동안 회림각에서 많은 음식을 맛보았더니 죽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묵용감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리고기는 안 되지만, 함께 넣어 삶은 다른 재료는 먹어도 될 듯하다.”

그의 말에 곧바로 기분이 좋아진 백천범이었다. 그녀가 작은 접시를 들고 다가오자 묵용감이 무의식적으로 접시를 받아 들고 직접 음식을 덜어 주었다. 깜짝 놀란 기홍과 녹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왕야가 다른 이에게 음식을 덜어 준 적이 있었던가? 분명 어린 왕비에게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던 왕야가 어째 이제는 조금 과분한 대접을 하는 듯했다.

백천범은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단 생각에 잔뜩 신이 났을 뿐, 이런 왕야의 모습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허겁지겁 입으로 집어넣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누가 뺏어 먹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급히 먹는단 말이오?”

잠시 후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남월각의 노비들은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니, 약은 회림각에 두었다가 매일 이곳에 와서 드시오. 식사도 이곳에서 하고. 기홍이 왕비의 입맛을 잘 아니 맛있는 걸 많이 해 줄 것이오. 그럼 자연히 몸도 좋아질 테고.”

백천범은 수저를 내려놓고 진심을 다해 감사 인사를 올렸다. 옆에 앉은 양려낭은 남몰래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째 날이 갈수록 왕야가 백천범에게 더 잘해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양려낭은 묵용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식사를 마친 뒤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왕야,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해 보이십니다. 괜찮으시다면 소인이 안마를 해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이 손을 흔들더니 이내 백천범을 가리켰다.

“왕비의 몸이 좋지 않으니 왕비에게 해 주시오.”

양려낭은 조금 실망했지만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백천범에게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소인이 왕비 마마를 좀 주물러 드릴까요?”

백천범은 단정하게 자세를 고쳐 앉더니 얼굴을 들고 자그마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럼 수고스럽겠지만 부탁드릴게요, 언니.”

백천범의 모습에 양려낭은 짜증이 솟구쳤다.

대문 앞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땐 자신을 도와주려는 모습에 첫인상이 제법 좋았다.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어린 게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계집아이가 뭉칠 근육이 어디 있다고 뻔뻔스럽게 욕심을 부리다니.

불만이 가득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녀는 백천범 뒤에 서서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묵용감은 건너편에 앉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볍게 고개를 돌리며 즐기는 모습이 어린아이인데도 꽤 기분이 좋은 듯했다. 결국 그는 어른스러운 척 새침하게 구는 그녀의 모습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치면 차를 마신 뒤 곧장 서재로 돌아가는 게 묵용감의 오랜 습관이었지만, 오늘은 찻잔을 비우고도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다들 통 알 수가 없었다.

식탁을 모두 정리했지만 그는 계속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학평관도 입을 열지 못한 채 가만히 초왕과 초왕비를 바라보았다. 한 분은 반쯤 눈을 감고 양려낭의 안마를 즐기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정신이 팔린 채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자 정원에도 등불이 켜졌다. 높은 기둥에 걸린 등롱 속 불빛이 깜박거리더니 이내 가물가물한 불빛이 드리워졌다. 멀리서 나지막한 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이 정신을 차렸다.

“여름 날씨에 귀뚜라미가 어디 있겠소. 왕비는 집에서 귀뚜라미도 가지고 놀았소?”

“어찌 가지고 놀 수 있었겠어요, 둘째 오빠가 양철통에 넣어 기르는 걸 몰래 구경만 할 수 있었던걸요. 온몸이 새까맣고 반들반들한 게 어찌나 큰지, 힘도 셀 것 같아서 슬쩍 꺼내 다른 귀뚜라미랑 싸움을 붙였는데 결국 죽어 버렸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둘째 오빠가 사기를 당한 거였어요. 그건 그냥 귀뚜라미가 아니라 쇠귀뚜라미였대요. 하하하…….”

그녀는 꼭 어제 일어난 일처럼 신이 나서 얘기했다.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묵용감도 따라 웃으며 물었다.

“둘째 오라버니와 꽤나 친했나 보오.”

백천범은 집안일에 대한 얘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묵용감과 자신의 아버지가 서로 원수지간인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몇 차례 더 웃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묵용감이 방으로 돌아가지 않자 백천범도 발을 떼기 난감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양려낭은 옆에서 끼어들 틈만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양려낭의 말에 백천범만 반응을 보일 뿐, 묵용감은 담담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왕야에게 한 말을 어린 왕비가 자꾸 가로채자 양려낭은 더 화가 치솟았다. 보면 볼수록 맘에 들지 않는 백천범을 자신의 적이라고 여겼다.

그 후 이틀간, 묵용감의 말대로 백천범은 아침부터 회림각을 찾았다.

그녀는 회림각에서 기홍이 내어 주는 약과 밥을 챙겨 먹고, 녹하, 양려낭과 함께 장난을 치며 놀았다. 이따금씩 풋복숭아가 달린 복숭아나무 앞에서 가동에게 초식을 배우기도 했다. 두 사람이 연습을 했다 하면 한나절 동안 무술을 연마했다.

백천범은 며칠간 잘 먹은 덕에 기분도 상쾌했고, 아팠던 흔적도 찾을 수 없이 체력을 회복했다. 그녀가 오기만 하면 회림각이 금세 떠들썩해졌고, 어딜 가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 *

묵용감은 밖에 있을 때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조정에서 조회를 마친 후, 누군가 그와 공무를 논하고 싶어도 무표정으로 어찌나 빠르게 걸어 나가는지 그를 붙잡으려던 손이 그대로 허공에서 굳어 갈 길을 잃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오늘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가동과 영구를 이끌고 시장에 갔다. 말을 끌고 거닐다 멈춰 섰다를 반복하며 무엇인가를 찾는 듯했다. 하지만 당최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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