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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8)화 (57/1,192)

제58화

묵용감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했다.

“헌데 그리 서서 뭣 하는 것이냐, 어서 의원을 불러오라, 어서!”

잔뜩 화가 나 밖으로 나가던 묵용감이 투덜거렸다.

“물에 좀 빠졌다고 그렇게 픽픽 쓰러지다니.”

밖으로 나온 그의 눈에 가동이 보이자 날카롭게 소리쳤다.

“왕비에게 무술을 어떻게 가르치길래 몸이 이 모양이란 말이냐?”

갑작스런 호통에 깜짝 놀란 가동이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묵용감이 빠르게 앞으로 향했다.

“어디 있는 것이냐?”

“기홍 아가씨 방에 있습니다.”

학평관은 서둘러 의원을 부른 뒤, 다시 묵용감의 뒤를 따랐다. 묵용감은 기홍의 방에 걸린 발을 걷어 올렸다.

방에 들어서니 백천범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미 옷은 갈아입고 있었고, 덜 말린 머리카락은 베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작은 얼굴이 더욱 창백해 보였고 지난번에 쓰러졌을 때보다 더 야위어 보였다.

그가 다가오자 기홍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열이 나시는 듯합니다.”

묵용감이 손을 뻗어 백천범의 이마를 짚었다.

“그래, 열이 조금 있구나. 차가운 수건으로 몸을 닦고, 생강차를 준비해 두었다가 깨어나거든 주거라.”

“예, 소인은 나가 보겠습니다.”

녹하는 물을 뜨러 밖으로 나갔고, 기홍은 생강차를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다들 방을 나서자 학평관도 눈동자를 굴리더니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때마침 양려낭이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학평관이 그녀를 저지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어갈 수 없다는 손짓을 해 보인 것이다. 양려낭은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들어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기분이 언짢았다.

모두가 나가고 방 안이 조용해지자 묵용감이 침대 앞 의자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담담한 그녀의 얼굴도 한참을 들여다보니 그럭저럭 괜찮은 듯했다. 살짝 찌푸린 미간과 미세하게 떨리는 속눈썹으로 봐선 그녀가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했다.

묵용감이 손을 뻗어 가볍게 그녀의 미간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할머니처럼 늘 미간을 찌푸리는 건 나쁜 습관이오. 본왕의 곁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쓰러진 사람이 대답을 할 리 없었다. 묵용감은 손을 더 올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 미세한 물기를 남겼다.

침대에 걸쳐 있는 수건을 본 그는 그대로 집어 들어 천천히 그녀 머리의 물기를 닦아 주었다. 혹시나 아프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듯 느리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대야에 물을 담아 온 녹하는 왕야의 모습에 깜짝 놀라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대야를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왕야, 소인이 하겠습니다.”

“우선 왕비에게 수건부터 얹어 준 다음에 하거라. 머리가 젖어 있으면 찬기가 스며들어 병이 빨리 낫지 않을 테니.”

“예, 왕야.”

녹하는 물기를 짠 수건을 백천범의 이마에 올려 두었다. 그런 뒤, 묵용감에게 수건을 받아 들고 꼼꼼하게 물기를 닦아 냈다.

묵용감은 한쪽에 서서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평관이 의원 유일첩과 함께 들어와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유일첩은 곧장 그녀의 맥을 짚고 눈과 입 안을 살펴보았다. 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나자 그가 서둘러 탁자로 다가가 처방을 쓰기 시작했다.

묵용감이 물었다.

“어찌 된 것이오? 멀쩡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다니.”

유일첩이 대답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감기에 걸리신 것입니다.”

묵용감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몸이 그리도 약하다니, 잠깐 물에 빠졌다고 곧장 감기가 들 수 있소? 보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오?”

“왕비 마마께서 연못에 빠지셨다가 곧바로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본래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물에 빠졌다고 하여 풍한이 드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근래에 비를 맞으셨거나 밤에 이불을 덮지 않고 주무셨다거나, 바람을 오래 쐬는 등의 일이 있었다면 쉽게 병이 날 수 있습니다.

왕비 마마의 기본 체력을 좋은 편이시니 이런 작은 병은 쉽게 이겨내실 것입니다. 소인의 생각에는 아마 얼마 전 찬바람을 맞으신 것 같습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물에 빠지시는 바람에 몸에 찬기가 쌓여 병증이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소인이 사흘 치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물 세 접시를 넣어 달인 다음 하루에 두 번씩 드시면 바로 좋아지실 것입니다.”

“보약은 필요 없는 것이오? 저택에 인삼과 제비집이 있소.”

유일첩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 그리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끼니를 잘 챙기는 사람도 늘 병을 달고 사는 법이지요. 왕비 마마께서 마르시긴 했어도 기본적인 건강 상태는 아주 좋으신 편입니다.

매 끼니를 충분히 드시면서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보약까지 드시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 의원의 말을 듣지.”

그가 학평관을 부르며 말했다.

“약을 달여야 하니 의원에게 사람을 붙여 서둘러 약을 받아 오너라.”

학평관은 대답을 올린 뒤, 유일첩을 배웅하며 차씨를 함께 보냈다. 양려낭은 학평관이 없는 틈을 타 방 안으로 들어갔고, 백천범을 바라보며 곧바로 울상을 지었다.

“왕비 마마, 어서 나으셔야 합니다.”

묵용감이 그녀에게 물었다.

“얼마 전 비가 많이 오던 날 왕비가 비를 맞은 것이오?”

깜짝 놀란 양려낭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야께서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그날 왕비 마마께서 오랜만에 비가 많이 온다며 신이 나셔서 빗속을 뛰어다니셨습니다. 소인이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셔서 나중엔 하는 수 없이 억지로 왕비 마마를 끌고 와 비를 피했지요. 오늘 쓰러지신 게 그날 비를 맞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에휴, 왕비 마마께서는 다 좋은데 늘 어린아이처럼 장난기가 심하십니다.”

녹하가 그녀를 흘기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어리시긴 해도 그리 철이 없는 분은 아니지요.”

양려낭이 겸연쩍어하며 다시 입을 열려 했지만 묵용감이 손을 내저었다.

“왕비가 푹 쉬어야 하니 다들 나가거라.”

* * *

모두를 쫓아낸 뒤, 묵용감 역시 기홍의 방을 금방 나섰다.

일과를 마무리하고 잠시 밖을 거닐던 묵용감은 목욕간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문득 이전에 가동과 백천범이 댔던 핑계를 떠올렸다. 정녕 이 근처에 고양이라도 있단 말인가?

조용히 목욕간 앞에 다다른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하나 놓여 있긴 했지만 밝지 않았다.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겁도 없이 자신의 목욕간에 발을 들여놓는단 말인가?

병풍을 지나치니 작은 몸집이 커다란 목욕통 안에 선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작은 몸집의 주인, 백천범이 바가지를 들고 등에 물을 끼얹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쪼그려 앉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찌 들어오신 겁니까! 어서 나가세요, 어서!”

묵용감은 초점 없는 눈으로 목욕통 옆을 지나쳐 갔다. 그러다 태연하게 창을 슬쩍 열었다 닫으며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고양이를 쫓아 왔는데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백천범은 자신을 보지 못한 듯한 묵용감의 행동이 이상하기만 했다. 묵용감은 주변을 한 차례 더 지나치더니 아무 말도 않고 그대로 목욕간을 빠져나갔다.

분명 크게 소리까지 질렀는데 자신을 보지 못했단 말인가? 백천범은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씩씩거렸다. 묵용감이 장난을 치는 게 분명했다. 자신을 보고도 보이지 않는 척 농간을 부린 것이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이렇게 나온다면 같이 모른 체하면 끝이었다. 어쨌든 그녀도 지난번에 그를 보았으니 이제 무승부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욕간을 나온 묵용감은 가슴이 쉴 새 없이 쿵쿵거렸다. 잠깐이었지만 마른 그녀의 몸에 얼핏 드러난 갈비뼈와 초여름의 풋풋한 복숭아처럼 살짝 솟아오른 봉긋한 가슴, 달빛처럼 새하얀 피부까지 그의 눈에 담겼기 때문이다.

복도를 꺾어 들자 그제야 마음이 조금 평안해졌다. 그가 가볍게 탄식을 내뱉었다.

“열넷인데, 뭐.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지.”

그때 손에 천연 미안수를 든 기홍이 급히 걸어오더니 그를 보자 곧바로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이 물었다.

“그리 바삐 어딜 가는 것이냐?”

“왕비 마마께서 지금 목욕 중이신데 미안수를 발라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땀을 빼서 모공이 열려 있을 때 피부 영양을 보충하면 몸에도 좋다 하옵니다.”

묵용감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왕비에게 목욕간에서 목욕을 하라 한 것이냐?”

깜짝 놀란 기홍이 급히 무릎을 꿇으려 하자 묵용감이 막아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하면 될 것을 걸핏하면 무릎부터 꿇으려 한단 말이냐? 본왕은 책망하려 물은 것이 아니다.”

기홍이 변명하듯 대답했다.

“왕야의 목욕통은 크기가 크니 왕비 마마께서 서서 목욕 하시기에 딱 적당한 듯하여 그리한 것입니다. 소인들이 쓰는 통은 크기가 작아 왕비 마마께서 움직이기 불편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 네가 왕비를 세심히 챙기느라 고생이 많다. 가 보거라.”

묵용감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발걸음을 옮겼다.

기홍이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잠에서 깬 백천범의 몸이 땀으로 흥건한 것을 본 기홍은 그녀를 깨끗이 씻긴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혀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천범에게 약을 올린 뒤, 기홍은 그녀를 자신의 목욕간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때 녹하가 왕야의 큰 목욕통에서는 편히 씻을 수 있을 테니, 왕야의 목욕간으로 모시자고 한 것이다.

녹하의 말에 기홍은 조금 고민이 되었다. 어쨌든 왕야의 공간이었으니 비어 있다고 해서 아무나 내어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녹하의 생각은 달랐다. 창고에 있는 모든 옷감을 꺼내 새 옷을 만들어 주라고 할 만큼 왕비에게 애틋한 왕야인데 목욕통 하나에 그리 옹졸하게 굴 리 없었다.

녹하에 부추김에 기홍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녀의 말에 따랐다. 결국 녹하의 말대로 왕야가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자 마음이 놓인 기홍은 기쁜 마음으로 목욕간으로 향했다.

백천범이 목욕을 마치고 나니 벌써 저녁 시간이 되었다. 기홍은 왕비를 녹하에게 맡기고 부엌에 들어 저녁을 준비했다. 어린 왕비가 병이 났으니 오늘은 담백한 요리를 줄 수밖에 없었다.

묵용감은 방에서 서예를 하고 있었다. 양려낭은 두 시녀가 바쁜 틈을 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곁에서 직접 먹을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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