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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7)화 (56/1,192)

제57화

조회를 마치고 묵용감이 대신들과 조정을 나서려 하자 황제가 그를 불러 세웠다.

“초왕은 잠시 남게.”

묵용감이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황제 폐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황제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 일 없으면 얘기도 나눌 수 없는 것인가?”

황제는 말을 꺼내며 측문을 통해 안쪽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조회를 마치면 늘 급히 돌아가던데, 혹 집에 우리 초왕 전하를 기다리는 이라도 있는 것인가?”

형제인 두 사람은 단둘이 있을 땐 제법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황제가 먼저 농을 꺼냈으니 묵용감도 이에 응했다.

“아리따운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서둘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농에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짐도 초왕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네. 초왕비의 일은 짐의 실수였네. 짐이 사과를 하지.”

황제가 정말 그를 향해 몸을 굽히려 하자 깜짝 놀란 묵용감이 급히 손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황제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백여름 그 작자가 꾸민 교활한 계략이지요.”

황제의 면전에서 조정의 승상을 욕하는 것은 초왕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황제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짐까지 속인 것이니 이 일은 분명 백 승상이 잘못했네. 하지만 걱정 말게. 짐이 이미 호되게 야단을 쳤으니. 오늘 짐이 셋째를 남으라 한 것은 바로 이 일에 대한 보상을 하기 위해서라네.”

그의 말에 마음이 무거워진 묵용감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제 폐하, 이미 지난 일이니 보상까지 하실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초왕비도 그렇게 형편없지만은 않습니다. 나이는 조금 어리긴 하지만 초왕비가 다 클 때까지 기다리면 될 일입니다.”

“어찌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혼사를 치른 걸 보면 이제 마음에 맺힌 한도 풀린 것일 테지. 짐이 황후와 함께 상의하여 이번엔 확실한 여인들만 골랐네.”

황제는 탁자에서 초상화 두 장을 들어 묵용감에게 건넸다.

“마음에 드는지 한번 보게. 한 명은 대학사大學士 수민修敏 집안의 장녀일세. 학식이 뛰어나고 현명한 데다가 얼굴까지 단아하다네. 분명 집안일도 잘 살필 테니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않은가? 짐 생각엔 측비側妃로 들이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리고 이 여인은 슬기로운 데다 각종 기예와 학문에 능해 모르는 것이 없다더군. 글을 읽을 때마다 미녀가 옆에서 힘이 되어 준다니…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이 여인은 서비庶妃로 들이면 좋을 듯한데, 어떤가?”

초상화 속 여인들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가만히 그림을 바라보던 묵용감의 머릿속엔 뜻밖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바닥만 한 얼굴에 새카만 눈동자, 머리에 달고 다니는 삐뚤어진 쪽머리, 자그마한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묵용감이 넋을 놓고 그림을 바라보자 황제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네. 황후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고른 여인들이라네. 성품 또한 훌륭하여 마음씨가 곱다고 하더군. 내 말대로 측비와 서비를 함께 들이면 집안의 겹경사라고 할 수 있지.

초왕은 어찌 생각하는가? 날은 황후가 골라 줄 걸세. 사주팔자를 따진 후에 길일을 골라 진행하려 하네. 자네를 살뜰히 챙겨 줄 사람을 집에 들인다면 나 또한 마음이 놓일 걸세.”

‘짐’이라는 표현 대신 ‘나’라는 단어를 쓴 것은 황제가 아닌 형으로서 묵용감에게 갖는 관심을 뜻했다.

묵용감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이 아우가 형님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황제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이 세상은 네가 날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 형으로서 참으로 감격스러워. 조정에 풍파가 그치지 않던 그해, 반란군이 성 앞까지 쳐들어왔을 때 네가 아니었다면 우리 임안성은 피바다가 되었겠지.

물론 지금은 백성들도 평안하고 변방도 안정을 찾았으니 이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다만, 네 인륜대사가 늘 나의 마음을 짓누르는구나. 불효 중 가장 큰 불효는 후사가 없는 것이라고 내가 늘 말하지 않았느냐. 태비 마마를 위해서라도 서둘러 후손을 이어야 할 것이야.

힘들게 들인 정실 왕비는 결국 백 승상에게 당한 꼴이 되었지만 이 두 여인은 걱정하지 말게. 혼사를 치르면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걸세. 빠르면 내년 여름에 아기를 보게 될지도 모르지.”

평소에는 점잖은 성격의 황제도 이 일만큼은 적잖이 수다스러웠다. 꼭 말 많은 부녀자 같기도 했다. 묵용감이 기막히다는 듯 물었다.

“황제 폐하, 후손을 맞는 것이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한 일이지. 아우는 그저 대를 잇는 일에만 힘쓰고 나머지는 왕비들에게 맡기면 된다네.”

묵용감은 잠시 말을 아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이 아우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의 더할 나위 없는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도 제 원한을 아시지 않습니까.

정실로 맞이한 왕비가 백여름의 딸입니다. 어떤 상황일지 말씀드리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하시겠지요. 그런 이유로 저 또한 이 혼사에 동의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아무 죄 없는 여인들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셋째야.”

황제가 목소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더 이상 어리석은 고집은 그만 부리거라. 황보주아가 죽은 지 이미 삼 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그 일에 매달려 있으면 어찌한단 말이냐? 연로하신 태비 마마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으니 이 형의 말을 듣거라. 돌아가시기 전에 손주도 보여 드리고.”

묵용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은 표정에 드러난 그의 대답은 분명했다. 황제는 말이 통하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이 여인들은 널 위해 점찍어 둔 것이니 언제가 좋을지 고민한 후에 곧장 혼사를 치르도록 하라.”

묵용감도 황제와 계속 대치하고 싶지 않았다.

“예, 우선은 그리하지요. 폐하께서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거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제가 손을 내저으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가거라, 어서. 이리도 말을 듣지 않다니! 조만간 황후에게 널 직접 만나 보라 해야겠다.”

묵용감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황후 마마의 옥체가 편치 않으시니 괜히 성가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황후 마마께서 제 욕을 하시다 진이 다 빠지실 텐데, 그렇게 된다면 황제 폐하께서도 마음 아프시지 않겠습니까?”

황제가 장난 섞인 말투로 호통을 쳤다.

“썩 꺼지거라!”

마침 듣고 싶었던 말을 황제가 내뱉자 묵용감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빠른 보폭으로 오문午門을 지나 서쪽 협문을 나오니 영구와 가동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빠르게 말에 올라타 거리를 질주했다.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 저택에 도착했을 땐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중문에 다다른 묵용감은 말에서 내려 머슴에게 고삐를 넘긴 뒤 큰 보폭으로 문을 들어섰다. 막 반월문을 돌아서는데 잔뜩 신이 난 백천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좀 봐요, 제가 낚았어요!”

고개를 쭉 빼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니 백천범이 연못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한쪽 손은 바위를 짚고, 한쪽 손에는 뜰채를 든 그녀가 물속에서 무엇인가를 건져 올렸다.

묵용감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물었다.

“이제는 하다못해 비단잉어까지 잡아먹으려는 것이오?”

옆에 있던 기홍이 설명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비단잉어를 잡는 것이 아니옵니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 명호의 도랑이 무너졌는지 송사리 몇 마리가 연못에 섞여 들어왔습니다. 혹여 비단잉어가 잡아먹을까 봐 걱정이 되셔서 송사리를 항아리에 기르시겠다며 건지시는 중입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묵용감은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이 계집아이는 무엇인가에 몰두해 있으면 자신이 온 것도 보지 못했다.

집안의 가장이 돌아오면 모든 이가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리거늘……. 백천범은 어찌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가 조심스레 다가가 발을 걸자 백천범이 첨벙 소리를 내며 연못 안에 빠졌다. 묵용감이 재빨리 그녀를 건져 올리더니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본왕이 또 왕비의 목숨을 구했군, 이번엔 어찌 보답할 것이오?”

백천범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물에 빠졌다가 또 갑작스레 들어 올려져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입 안 가득 물을 들이켠 그녀가 허둥대며 말했다.

“와, 왕…….”

그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물이 묵용감의 얼굴에 튀었다. 그가 손을 놓자 그녀는 또다시 첨벙거리며 연못 안으로 떨어졌다. 놀란 비단잉어가 황급히 헤엄쳐 달아났고, 꽤 높은 물보라가 일었다.

하인들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물에 빠뜨려 죽일 셈이란 말인가?

한참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묵용감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가만히 서서 뭣들 하느냐? 왕비를 끌어올리지 않고!”

그의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한 번 골려 주려 한 것인데 자신에게까지 화를 입히다니! 하늘 같은 초왕이 다른 이가 뱉는 물에 얼굴을 맞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다들 황급히 달라붙어 백천범을 끌어올렸다. 어린 왕비는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줄곧 기침을 했고 물에 젖은 옷이 몸에 바짝 달라붙어 말라깽이 같은 몸이 더 도드라졌다. 그런 왕비를 냉랭하게 바라보던 묵용감의 기분도 불편했다.

“왕비를 잘 보살피거라.”

그는 하인들에게 분부한 뒤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서재로 돌아온 그에게 녹하가 차를 올렸다. 묵용감이 도포 자락을 가르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왕비가 오늘은 새 옷을 입지 않았던데 몇 벌 지어 준 것이 아니더냐?”

녹하가 속으로 생각했다.

‘소인이 그것까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왕비의 시녀도 아닌데…….’

속마음은 그랬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워낙 알뜰하시지 않습니까, 소인 생각에는 예전부터 늘 입었던 옷이니 아직 버리기 아까우신 듯합니다.”

묵용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리도 생각이 짧아서야! 나의 저택에 있는데 푸대접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창고를 뒤져 옷감이 더 있는지 살펴봐라! 전부 다 꺼내 왕비의 옷을 만들어 주거라. 명색이 초왕비인데 그럴싸한 옷도 하나 없어 가지고서야, 원. 본왕의 체면을 얼마나 더 깎으려고 그리한단 말이냐?”

녹하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부부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다고……. 왕야가 왕비에게 선물을 주려는데 이리도 구구절절 명분을 찾다니.

그때, 학평관이 급히 달려오더니 고개를 숙이고 아뢰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의원을 모셔 올까요?”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또 쓰러졌단 말이냐?”

“아마 물에 빠지셔서 그런 것 같사옵니다. 초여름이긴 하지만 아직 물이 차가우니 심약한 왕비 마마께서 버티지 못하신 듯합니다. 기침을 하시더니 그대로 쓰러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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