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유모 유씨에게 끌려가면서 백천범에게 몇 차례 더 얻어맞은 제씨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는 마구 소리를 지르며 백천범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하지만 싸움을 지속할 자신이 없던 백천범은 창문으로 다가가 이내 창문을 기어오르며 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유모 제씨가 그새 그녀의 다리를 잡아끌었고, 이에 질세라 백천범도 허리를 굽혀 유모 제씨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머리카락이 뜯겨나가는 고통에 유모 제씨가 손을 놓자 백천범이 그 틈을 타 힘껏 발을 내질렀고, 유모 제씨의 뺨을 걷어찼다. 꽤나 세게 걷어차였는지 유모 제씨는 얼굴을 감싸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천범은 서둘러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땅으로 떨어지면서 살짝 넘어지긴 했지만 그다지 심하게 다치진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몸을 일으켜 남월각을 빠져나왔다.
유모 제씨는 어찌나 성이 났는지 눈에 핏발이 설 정도였다. 그녀와 처음 맞붙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싸운 적은 없었다. 그녀가 있는 힘껏 침을 내뱉자 이 하나가 튀어 나왔다. 원래 조금씩 흔들리던 이가 백천범 때문에 뽑혀 나온 것이었다.
난장판이 벌어진 곳을 정리하고 유모와 시녀들이 다 같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총 관리인의 시종 차씨였다. 나이 어린 애송이였지만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심하게 우쭐댔다.
“왕비 마마 계시오?”
기분이 언짢았던 유모 제씨가 말했다.
“죽었소.”
차씨가 흠칫 놀라 되물었다.
“뭐요?”
유모 유씨가 급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안 계십니다. 방금 전 사소한 말다툼을 벌였는데 마음이 답답하셨는지 나가셨습니다.”
차씨가 시녀들을 흘겨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주인께서 안 계신데도 아주 즐겁게 밥을 먹고 있구려.”
유모 유씨가 서둘러 해명했다.
“소인들은 왕비 마마의 식사 시중을 이미 마쳤습니다. 마마께서 외출을 하셨으니 이제야 한 술 뜨는 것이지요.”
차씨는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몸을 돌려 남월각을 빠져나왔다. 후원을 한 바퀴 돌며 왕비를 찾아 다녔지만 어디에도 왕비의 모습은 없었다. 다시 앞뜰로 간 차씨는 그곳에서도 왕비를 찾을 수 없자 하는 수 없이 회림각으로 돌아갔다.
* * *
식사를 할 때가 되어도 백천범이 보이지 않자 묵용감은 그제야 그녀가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왠지 그녀가 없으니 분위기가 살지 않는 느낌이었다. 양려낭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 왔지만, 그는 아예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학평관에게 백천범을 찾아오라 분부했다. 하지만 학평관이 심부름을 보낸 차씨는 어디에서도 왕비를 찾지 못했다.
가동은 직접 나서겠다며 묵용감에게 청했다.
“왕야, 소인은 왕비 마마께서 평소 자주 가시는 곳을 잘 알고 있으니 소인이 가 보겠습니다.”
가동까지 나서자 묵용감은 괜스레 성가셨다.
“되었다. 본왕이 몇 마디 했다고 어딘가에 틀어박혀 있겠지. 신경 쓸 거 없다.”
그의 말에 양려낭만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제 백천범이 비를 맞게 일을 꾸민 것은 그녀가 감기에 걸리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집아이가 면역력이 어찌나 좋은지 비를 흠뻑 맞고도 감기는커녕 아침부터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 모습에 양려낭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백천범이 없으니 드디어 묵용감과 단둘이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밥을 먹은 뒤 묵용감의 뭉친 근육을 풀어 주겠노라 다짐했다. 어깨를 주무르고 쓰다듬다 보면 피차 외로운 남녀 간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식사 전, 진왕이 찾아오는 바람에 양려낭은 자리를 떠야 했다. 아직 출가도 하지 않은 젊은 여인이 얼굴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두 시녀와 함께 밥을 먹었다. 흔치 않은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양려낭이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뜨거운 찻잔을 들고 복도에 한편에 기대어 선 채, 먼발치에서나마 술을 마시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초왕과 진왕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둘 다 조각같이 멋있는 미남들이었다. 초왕과 진왕 둘 중 누구라도 좋았지만 그래도 양려낭은 초왕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진왕은 수많은 여인들과 각별한 사이라고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족 가문의 군주부터 기방의 내로라하는 기녀까지 그 폭도 다양하다고 하니, 자신이 낄 틈이 없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초왕에게 여자라고는 별 볼 일 없는 백천범이 유일했다. 역시 그녀는 조금 근엄하기는 해도 초왕에게 더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간절히 원할수록 더 얻기 힘들어지는 듯했다. 지금 그녀는 자신의 몸을 누일 곳이 아닌 초왕이라는 사람을 더 원했다. 평소 위엄 있고 냉정하기만 한 묵용감이 자상하게 백천범의 머리를 빗겨 주는 모습을 보고 나니 그가 더욱 간절해졌다.
백천범을 싫어하면서도 아이라는 생각에 그리 가엾게 여기는데, 정말 좋아하는 여인이 생긴다면 얼마나 따스하게 대해 줄까? 아마 그 따스함에 몸이 녹아내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그의 따스한 사랑에 숨이 막혀 죽는 한이 있어도 그의 여인이고 싶었다.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기홍이 다가왔다.
“양씨 아가씨, 왕비 마마께서도 후원으로 돌아가셨는데, 아가씨께서는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양려낭은 녹하와 기홍이 자신을 적대시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시녀는 백천범과 사이가 좋으니 자신이 백천범의 자리를 빼앗을까 봐 경계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 정도 지위를 가질 만한 사람이라는 것은 두 시녀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아는 사실인데 유독 초왕만 진지하게 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이곳에서 지내게 된 이상 날마다 초왕을 볼 수 있으니 우선은 그것으로 족했다. 다음 일은 앞으로 두고 볼 일이었다.
“이것만 마시고 돌아가겠습니다.”
“송구하지만 후원에 가시면 우리 왕비 마마 좀 찾아 주시겠습니까? 혹 점심을 제대로 드시지 못했으면 저녁은 기홍 언니가 맛있는 걸 해 줄 테니 이쪽에서 드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네, 기홍 아가씨. 꼭 전할게요.”
양려낭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찻잔을 기홍에게 주며 말했다.
“잘 마셨습니다. 이만 돌아가 볼게요.”
초왕만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나면 저 두 시녀는 정리할 수 있었다. 저들이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자신 또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그만이었다.
후원으로 돌아온 양려낭은 남월각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하나같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 왕비의 행방을 아는 이는 없었다. 한 늙은 유모는 눈꼬리를 치켜세운 채 백천범은 죽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물론 죽은 것이 아니라 왕비를 저주하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을 저주하는 말은 아니었으니 양려낭은 그러려니 생각했다.
사실 그녀는 남월각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하인들은 대체 백천범에게 왜 그리도 못되게 구는지, 묵용감은 어째서 백천범에게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것인지, 그러면서 회림각 출입은 왜 허락한 것인지 등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지금은 별수 없이 자신의 처소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양려낭이 낙성각에 돌아갈 때, 백천범은 이미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유모 제씨와 싸운 뒤 그녀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문을 꼼꼼히 걸어 잠갔다.
춥지 않은 날씨라 옷을 걸칠 생각도 않고, 속적삼과 속바지만 입은 채였다. 잠을 자고 일어나 탁자에 엎드린 그녀는 삶은 땅콩을 꺼내 먹었다.
삶은 땅콩은 어제 아침 앞뜰 부엌에서 안 조리사가 키에 잔뜩 담아 챙겨 준 것이었다. 백천범은 남월각 시녀들이 볼 수 없게 넓은 소맷자락으로 키를 덮고 몰래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침대 밑에 잘 숨겨 두었다.
저녁으로도 충분할 만큼의 양이었지만, 많이 먹으면 물이 마시고 싶어질 테고 물을 많이 마시면 뒷간에 가야 하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전 상황을 떠올려 보면 지금은 그래도 안전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유모 제씨도 부상을 당했으니 휴식을 취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동에게 배워 둔 초식은 제법 유용했지만, 악랄한 무리와 전력을 다해 싸우고 나니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여기저기에서 밀려왔다. 힘을 너무 쓴 탓도 있었지만 대부분 몸싸움 때 생긴 상처 때문이었다.
땅콩을 다 먹은 그녀는 상처를 살피며 연고를 바른 뒤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깊게 잠들지는 못했다. 오늘 일어난 일을 유모 제씨가 눈감아 줄 리 없으니 앞으로는 더욱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 * *
유모 제씨도 나이를 먹은 탓에 꽤 오랜 시간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장의자에 반쯤 누워 있는 제씨의 곁에서 청매는 어깨를 주무르고 청지는 다리를 안마했다.
유모 제씨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그녀가 훈계했던 사람 중 감히 반항을 하는 이는 없었다. 그녀가 있는 힘껏 따귀를 때리면 그 미천한 것들은 모두 고개만 숙인 채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백천범은 예외였다. 백 승상의 저택에서 그녀를 혼낼 때 어찌나 약삭빠르게 구는지 온갖 방법으로 제씨를 방해했고, 손이라도 대는 날에는 늘 자신만의 방법으로 복수를 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가 좀 컸다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과 맞붙으려 하는 것이었다.
유모 유씨가 제씨를 타일렀다.
“분을 삭이면 회복이 더디니 자네도 마음 좀 추스르게. 아직 갈 길이 멀다네.”
유모 제씨가 살기 어린 웃음소리를 냈다.
“갈 길이 멀지요. 헌데 형님도 그러시질 않았습니까. 그 미천한 계집이 초왕과 가깝게 지낸다고요. 날마다 회림각에 가서 정말 초왕과 한통속이라도 되는 날엔 말짱 도루묵입니다. 서둘러 손을 쓰지 않으면 마님께서도…….”
“에헴, 에헴!”
유모 유씨가 급히 기침을 하며 제씨에게 눈짓했다. 유모들이 하는 일은 시녀들에게도 비밀이었다.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발각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두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밖으로 새어 나갔다간 아무리 이씨 부인이라도 유모들을 구할 방도가 없을 것이었다.
유모 제씨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너희는 그만 나가 보거라.”
두 시녀는 곧장 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문에 바짝 붙어 안에서 나누는 얘기를 몰래 엿들었다.
청병과 청수가 어떻게 죽은 것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매일 유모들 곁을 따라다니다 보니 몇몇 흔적은 얼추 알아낼 수 있었다. 두 유모가 무서웠던 시녀들은 혹여 미움을 사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까 봐 그들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하지만 너무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통에 아무리 들으려 해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때 별안간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시녀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숨을 죽이고 있는데 느리고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꼭 저승사자 발걸음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묵직했다.
그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겁에 질린 시녀들은 황급히 몸을 돌려 미친 듯이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