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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5)화 (54/1,192)

제55화

녹하와 양려낭이 인사를 올리자 그가 손을 올려 예를 갖출 필요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열심히 제기를 차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눈을 내리깔고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슬쩍 발걸음을 옮겨 작은 돌멩이를 발끝으로 가볍게 찼다.

자그마한 돌멩이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재빨리 날아갔고, 백천범의 동작을 방해했다. 놀란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한 발 늦게 다리를 올리는 바람에 제기가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녹하가 크게 입을 벌리더니 느릿하게 수를 셌다.

“마흔여덟.”

백천범은 분을 이기지 못해 자리에서 깡충 뛰어올랐다. 이길 수 있었는데 하나가 부족해서 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녹하가 마흔아홉을 불러 줄 것이라 확신하던 그녀가 중대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패하였으니 어찌 쉽게 승복할 수 있었을까?

돈을 잃는 것은 그렇다 쳐도 고지를 코앞에 두고 실수를 한 게 너무나 괴로웠다. 모든 일에 늘 최선을 다하는 그녀는 열심히 노력을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에도 자신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더 이상 무리하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자신이 왜 졌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회색빛을 띠는 무언가가 날아든 것 같아 깜짝 놀랐고, 한 박자 늦게 발을 들어 올린 게 이런 결과를 가져오다니…….

묵용감은 그제야 백천범이 자신을 바라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의 정신은 아직 제기에 가 있었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온 힘을 실어 두 차례나 발을 구르고는 이를 악물어 보였다. 그런 백천범의 모습을 본 그가 당황했다.

하지만 곧이어 안정을 되찾더니 돈주머니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양려낭에게 주었다. 녹하는 세 닢을 꺼내 들었다. 묵용감 앞에서 돈을 받는 건 부끄러웠는지 양려낭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와 녹하 언니가 절 봐주신 것이지요.”

그제야 이해한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내기를 건 것이오?”

이 정도 놀이쯤은 왕야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녹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예, 왕야. 방금 왕비 마마께서 한 개 차이로 지셨습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정신이 없던 백천범은 인사를 올리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잔뜩 기가 꺾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아깝게 지셔서 참으로 속상하신 것 같습니다.”

살짝 죄책감이 든 묵용감은 그녀에게 다가가 슬쩍 물었다.

“진 게 분한 것이오?”

백천범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저 진 게 조금 이상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분명 이길 수 있었는데…….”

묵용감이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내며 말했다.

“아주 잘 차더군, 상으로 주겠소.”

백천범은 은자를 보고도 별로 감흥이 없는 듯했다.

“저는 잘 못 찼습니다. 려낭 언니에게 상을 주셔야 합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돈을 잃지 않았소? 보상이라 생각하고 받으시오.”

백천범이 살짝 주저하며 물었다.

“녹하 언니에게도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까?”

은자를 쥔 손을 한참이나 내밀고 있던 묵용감은 결국 짜증을 참지 못했다.

“녹하는 당신보다 돈이 많소.”

결국 은자를 집어 손바닥에 올려놓고 유심히 들여다보던 백천범은 그제야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문득 양려낭의 일이 떠오른 그녀가 묵용감에게 물었다.

“왕야, 려낭 언니가 저택에 온 지도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런 말씀도 없이 후원에만 내버려 두십니까? 그러니 시녀들마저 제대로 언니의 시중을 들지 않고 있습니다. 언니와 언제쯤 혼사를 올리실 것인지요?”

묵용감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지더니 곧장 그녀의 손에 있던 은자를 다시 뺏어 들었다.

“필요 없으면 관두시오. 군소리가 저리 많아서야, 원!”

백천범은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준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가져가 버리다니!

녹하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탓했다.

“왕비 마마, 어찌 또 왕야의 심기를 건드리신 것입니까?”

양려낭도 다가와 한마디 거들었다.

“왕야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백천범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왕야는 정말 변덕이 심하다니까요. 려낭 언니, 그래도 왕야한테 시집올 거예요?”

* * *

화가 난 묵용감과 함께 밥을 먹기 무서웠던 백천범은 후원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양려낭은 계속 남고 싶어 했기 때문에 백천범은 그녀를 두고 홀로 후원으로 돌아왔다.

왕야의 성격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잠시 그의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남월각으로 돌아오니 무수리가 막 찬합에 음식을 담아 오고 있었다. 찬합을 식탁에 펼쳐 놓더니 두 유모를 불렀다. 주인이 옆에 있든 없든 상관없는 모습이었다.

밖으로 나온 유모 유씨는 백천범을 보더니 눈을 번쩍이며 위아래로 훑었다.

“옷이 참으로 예쁩니다, 왕비 마마. 어디서 난 것입니까?”

백천범이 말했다.

“회림각의 녹하 언니가 해 준 것이오.”

“왕야를 모시는 두 시녀에 대해서는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둘 다 재주가 뛰어나 한 명은 음식을, 한 명은 옷을 책임진다더니 역시…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이어서 유모 제씨가 나오더니 가느다랗고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세상에, 참으로 고운 옷을 입으셨습니다, 왕비 마마. 옷이 날개라더니 틀린 말이 없군요.”

백천범은 잔뜩 경계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모 제씨는 유씨보다 훨씬 더 악랄했다. 유모 유씨는 가끔 주저하기라도 했지만 제씨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역시나 유모 제씨가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좋은 옷이 많으시니 이 옷은 소인에게 상으로 주십시오. 소인에게 왕비 마마와 체격이 비슷한 손녀가 있는데 마침 외출할 때 입을 옷이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백천범이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내 옷이오. 손녀의 옷이 부족하면 직접 사 주면 될 것 아니오?”

“아이고, 어찌 그런 말씀을. 다른 이도 아니고 왕비 마마가 아니십니까. 좋은 것도 많으시면서 옷 한 벌에 어찌 이리 인색하게 구십니까?

저희는 노비입니다. 날마다 최선을 다해 시중을 들고 있는데 옷 한 벌마저 베풀어 주시지 않으시다니요. 이리 인색하게 구는 것은 아주 고약한 심보입니다.”

백천범은 그녀의 말이 우습기만 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나도 할 말은 해야겠소. 다음 달부터 생활비는 내가 가져갈 것이오. 유모들은 챙기는 것도 많으니 나에게도 일부는 넘겨야 할 것 아니오.”

유모 제씨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왕비 마마. 마마를 따라 초왕의 저택에 오는 바람에 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지경인데 챙기긴 뭘 챙긴단 말입니까? 사람이라면 양심이 있으셔야지요!”

“양심?”

백천범이 냉소를 지었다.

“양심은 개나 줘 버린 사람도 있질 않소!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원한을 갚으러 올지도 모르니 조심하시오!”

뼈 있는 백천범의 말에 유모 제씨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문을 잠가라.”

방금 찬합을 들고 온 무수리는 환아環兒라고 불리던 아이였다. 환아는 곧장 문을 걸어 잠갔고 청매와 청지가 문 옆을 지켰다. 곧 무언가를 벌이기라도 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요즘 떠도는 소문을 들은 유모 유씨가 작게 제씨를 타일렀다.

“관두시게, 요즘 왕비와 왕야의 사이가 좋아졌다 하지 않는가, 초왕이 캐기라도 하면 책임을 져야 할 걸세.”

유모 제씨가 측은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초왕이 정녕 왕비에게 관심을 준다고 여기십니까? 초왕도 남월각의 상황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리 손을 놓고 있는 걸 보면 그게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오십니까?”

그녀는 손을 허리에 얹고 사나운 눈을 치켜뜨더니 백천범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직접 벗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벗겨 드릴까요?”

백천범은 그동안 무술을 연마해 왔기 때문에 유모 제씨가 무섭지 않았다. 문이 가로막혀 있자 백천범이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수를 읽은 유모 제씨가 곧바로 청매에게 명령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창문을 잘 잠가라.”

원래 질이 낮았던 데다가 유모들에게 나쁜 것만 배운 시녀들은 백천범을 때릴 생각에 은근히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흔치 않은 기회가 왔으니 쉽게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모 제씨의 호령이 떨어지자 시녀들이 백천범의 몸을 마구 때리고 꼬집기 시작했다. 얼굴에 흔적이 남으면 다른 이들이 알아볼 테니 얼굴은 건드리지 않았다.

자신의 시녀들에게 두들겨 맞았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왕비가 떠벌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무술을 헛배우지 않았다. 주먹과 다리의 힘이 강해진 덕에 세 명의 시녀가 달려들어도 그녀를 제압하지 못했다. 유모 유씨가 한숨을 쉬며 타일렀다.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만들 하시게.”

유모 제씨는 들은 척도 않고 눈꺼풀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무서우면 형님은 멀리 물러나 계십시오. 괜히 피 묻히지 말고.”

유모 유씨는 결국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유모 제씨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직접 백천범에게 다가갔다. 제씨는 이씨 부인의 수하 중 몸 쓰는 것에 가장 유능했다. 그런 그녀는 늘 암암리에 사람을 해치는 일을 담당했다. 역시나 이 못된 할망구가 등장하니 판세가 금세 역전했다.

그녀는 곧장 백천범의 머리칼을 붙잡고 있는 힘껏 잡아끌었다. 허리에 묶은 끈이 풀리더니 치마가 양쪽으로 스르르 벌어져 백천범의 속바지가 드러났다.

유모 제씨가 소리쳤다.

“옷을 벗겨라.”

청매와 청지가 백천범의 손을 붙잡고 팔을 비틀며 힘겹게 옷을 벗겼다.

시녀들이 옷을 벗기는 동안 유모 제씨는 끊임없이 손을 놀려 백천범의 몸 곳곳에 손톱자국을 남겼다.

백천범은 맞아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 듯 온몸으로 저항했고 유모 제씨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모 제씨는 머리에 하고 있던 비녀를 빼내어 백천범의 몸을 마구 찔렀다.

한쪽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유모 유씨는 결국 제씨를 끌어냈다.

“도가 지나치네. 이러다 죽으면 그냥 넘어가지 못할 걸세.”

충분히 비참한 백천범의 모습에 시녀들이 손을 놓았다. 이제 백천범과 유모 제씨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찔려도 이를 악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던 백천범이 유모 제씨의 흐물흐물한 얼굴을 잡고는 사나운 목소리로 욕을 퍼부었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악랄한 할망구야! 대대손손 패가망신할 파렴치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백천범이 내뱉은 욕은 다 유모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촌사람이던 유모는 평소에는 온순하고 말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핍박을 당할 때면 사납게 욕을 퍼부었다. 늘 비슷한 표현을 반복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들어 온 백천범도 자연스레 달달 외우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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