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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4)화 (53/1,192)

제54화

양려낭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서둘러 복도로 뛰어 들어갔다.

백천범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번개가 친 하늘을 바라보았다.

‘번개가 저기에서 나오는 거였구나!’

방금 막 푸른빛이 번득 스치는 모습을 본 그녀였다.

복도에 서 있던 양려낭이 왕비를 부르려 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백천범을 적중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정신을 차렸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치마가 펄럭였다. 백천범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천히 복도로 향했다.

그때, 두어 걸음을 뗀 그녀가 갑작스레 시끄럽게 소리를 냈다. 콩알만 한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머리와 얼굴, 몸을 가리지 않고 마구 퍼부었던 것이다. 비를 피하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것 같았기 때문에 백천범은 빠르게 치맛자락을 들고 복도로 뛰어갔다.

양려낭이 원망하듯 말했다.

“어서 오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습니다.”

백천범은 조금도 속상해하지 않고 헤헤 웃으며 소매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냈다.

“괜찮아요. 조금 젖은 것뿐이에요. 금방 마를 거예요.”

빗줄기가 점점 더 거세졌다. 꼭 하얀색 장막을 쳐 놓은 듯 희끄무레한 안개가 피어올라 사람도 잘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시중을 드는 사람이 없던 백천범과 양려낭은 우산을 가져다줄 사람이 없으니 복도에 서서 비가 그치기만 기다려야 했다.

온도가 낮진 않았지만 비가 내리면서 바람이 불어오니 습한 공기가 쌀쌀하게 느껴졌다. 백천범은 어깨를 감싸 안고 억수같이 내리는 장대비를 바라봤다. 쏴아 하는 소리가 꼭 폭포 소리 같았다.

양려낭은 다른 기둥에 기대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깜짝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소리에 깜짝 놀란 백천범이 다급히 물었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양려낭이 허둥지둥 자신의 귀를 만지며 말했다.

“귀걸이가 떨어졌습니다. 저희 어머니 유품인데, 방금 전 뛰어오다가 땅에 떨어뜨린 듯합니다.”

백천범이 목을 내밀어 바닥을 살펴보았지만 새하얀 안개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니 혹여 냇가로 떠내려가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녀가 빗속을 뚫고 나가려 했지만 거세게 빗물이 튀자 금세 움츠러들었다. 가냘픈 모습이 참으로 가여웠다.

백천범이 말했다.

“언니, 가지 말아요. 제가 가서 찾아볼게요. 저는 이미 다 젖었으니까 괜찮아요.”

양려낭은 당연히 거절했다.

“왕비 마마, 아니 됩니다. 저 때문에 비를 맞으며 귀걸이를 찾으시겠다니, 몸이라도 상하시면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저는 튼튼하니까 그럴 리 없어요. 비를 처음 맞는 것도 아니고 별일 아니에요.”

백천범이 곧장 빗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양려낭은 복도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백천범의 작은 체구가 폭포같이 쏟아지는 장대비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체가 점점 더 흐릿해졌다.

그녀가 입꼬리를 비틀며 주먹을 쥐고 있던 왼손을 펴 보였다. 뜻밖에도 그녀의 손바닥에는 귀걸이가 있었다. 그녀가 아무렇게나 휙 던져 버리자 귀걸이는 멀지 않은 돌길 위에 그대로 떨어졌다.

한참 뒤에 백천범이 돌아왔다. 온몸이 홀딱 젖은 모습이었다. 추운지 어깨를 잔뜩 웅크리곤 기침을 했다. 그녀는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언니, 못 찾았어요.”

양려낭이 잔뜩 실망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다 하늘의 뜻이겠지요.”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백천범의 물기를 닦아 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어서 옷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이대로 계시다간 병이 날 것입니다.”

“저는 튼튼해서 쉽게 병이 나지 않으니, 괜찮아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이내 잠시 고개를 숙이고 코를 비볐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복도 밖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바닥의 귀걸이를 집어 들며 말했다.

“언니, 이거 언니 귀걸이에요?”

양려낭이 답했다.

“아이참, 여기에 떨어져 있었군요. 왕비 마마께서 오랫동안 찾아 주셨는데, 소인이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백천범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찾았으니 되었습니다. 제 눈이 좀 예리한 편이라 자그마한 것들도 잘 보거든요. 어서 잘 챙겨 두세요, 또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요.”

양려낭이 서둘러 귀걸이를 다시 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요리조리 관찰하던 백천범이 부러워하며 말했다.

“와, 참으로 예뻐요. 저는 귀걸이를 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되었거든요.”

양려낭이 물었다.

“어린 아가씨들도 다들 귀걸이를 하는데 왕비 마마께서는 어찌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백천범이 웃으며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뚫었던 게 이미 다 막혀 버렸어요.”

백천범이 귀를 뚫었을 때, 유모가 진주 귀걸이를 선물해 주었었다. 가느다란 은으로 만든 술 장식에 작지만 투명한 진주가 달려 있는 귀걸이는 참으로 우아해 보였다.

하지만 샘이 많은 넷째 언니 눈에 띄고 말았다. 그녀의 귀걸이를 갖고 싶다는 넷째 언니의 말에 백천범이 줄 수 없다고 맞받아치자 넷째 언니는 백천범의 귀걸이를 손으로 낚아채 그대로 가져갔다.

어린 아이였지만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백천범의 귀에 상처가 생긴 줄도 모르고 귀걸이만 가지고 가 버렸다.

백천범의 귀에서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리자 유모가 크게 놀랐다. 나중에 이 소식이 아버지에게까지 들어갔고, 넷째 언니는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넷째 언니가 혼난 사실을 전해 들은 이씨 부인은 격분한 나머지 귀한 도자기 병을 깨부쉈다. 이 일로 아버지와 이씨 부인은 또 한바탕 크게 다투었다. 며칠간 소란이 이어지며 바람 잘 날 없자 유모는 눈물을 머금고 백천범의 귀걸이를 빼 주었다.

나이는 어렸어도 예쁜 걸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는 울며불며 귀걸이를 하겠다고 떼를 썼다. 유모는 그런 백천범을 안고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곤 나중에 크면 다시 뚫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녀도 조금씩 세상 물정을 알아가면서 자신을 위해 유모가 귀걸이를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천범은 그 뒤로 귀걸이를 찾지 않았다. 지금은 귀에 자그마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 * *

어제는 그렇게 많은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날이 개고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다. 하늘은 유독 푸르렀고 공기도 유달리 맑았다. 양려낭과 함께 거닐던 백천범의 발걸음이 회림각에 닿았다.

부엌으로 온 왕비가 걱정된 기홍이 녹하에게 눈짓을 보냈고, 녹하가 다채로운 색의 제기를 꺼내 백천범에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왕비 마마, 소인과 제기차기 어떠십니까?”

백천범의 눈이 반짝이더니 제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두산에서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떠오른 그녀는 곧장 알겠다고 대답한 뒤 더 이상 부엌일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햇빛이 가볍게 어깨 위를 내리쬐는 초여름의 날씨도 제기차기를 하기에 제격이었다. 백천범은 화려한 원단에 커다란 연꽃이 수놓아진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몸을 휘감듯 세 겹으로 덧댄 앞자락 덕에 체구도 그렇게 작아 보이지 않았고, 하늘하늘한 자태가 돋보였다.

이 또한 녹하의 솜씨였다. 그날 왕야가 내려 주신 비단을 가져와 왕비를 위해 재빨리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새 옷을 받아 신이 난 백천범은 녹하에게도 주머니에 수를 놓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양려낭은 제기차기의 고수 중에 고수였다. 시장 근처에서 자란 여인인지라 다른 건 몰라도 제기차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등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녹하와 백천범이 함께 대적해도 그녀를 이길 수는 없었다. 지기 싫었던 녹하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다시 도전하자 양려낭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차면 재미가 없으니 내기를 하죠.”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은 녹하가 말했다.

“좋습니다.”

백천범이 자신의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언니들, 너무 많이 거시면 안 돼요. 전 돈이 별로 없거든요.”

녹하가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매달 용돈도 많이 받으시면서 다 어디에 쓰신 것입니까?”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받기도 전에 두 유모가 미리 가로채니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일일이 따지고 있지 않았지만, 묵용감과의 관계가 조금 더 좋아지면 그들을 백 승상의 집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할 계획이었다. 그들만 돌려보내면 이곳에서의 생활도 분명 더할 나위 없이 좋아질 것이다.

그날 왕야가 웃는 얼굴이 부를 가져다주고, 집안을 흥하게 한다고 말한 것은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후원은 여전히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면 왕야는 아직 자신을 미심쩍어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곳으로 같이 온 유모와 시녀들은 왕야와 관련이 없는 일이긴 했다. 결국 그녀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내기를 걸자 백천범은 제기를 차기가 조심스러웠다. 양려낭도 그리 홀가분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쨌든 다들 돈이 많지 않으니 자신의 푼돈이 다른 이의 주머니로 들어가길 모두 원치 않을 것이다.

양려낭이 먼저 마흔아홉 번을 찼다. 꽤 괜찮은 성적이었다.

성미가 급했던 녹하는 처음엔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다가 점점 조급해하더니 서른 번이 넘어가자 흐름을 잃기 시작했다. 내기에서 지더라도 양려낭만큼은 이기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서른아홉 번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양려낭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녹하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백천범은 더 말할 것도 없었으니 이번 판에 걸린 돈은 양려낭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녹하가 백천범을 응원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 힘내십시오. 꼭 이기셔야 합니다. 소인이 은자를 준비해 놓을 테니 꼭 왕비 마마가 가져가십시오.”

이럴 땐 백천범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이길 수 있는데도 이기지 않는 건 바보이기 때문이다. 평소 실력이 들쭉날쭉하긴 했지만 돈이 걸려 있으니 어느 때보다 더 집중을 해야 했다.

그녀는 차분하게 제기를 차기 시작했다. 한 번 찰 때마다 신중을 기했다. 옆에서 녹하가 숫자를 세 주었다.

“열둘, 열셋, 열넷…….”

틈틈이 응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열아홉, 스물, 좋습니다. 스물하나…….”

반월문을 들어서던 묵용감의 눈에 햇빛을 머금고 제기를 차고 있는 백천범의 모습이 들어왔다. 역시나 그녀를 상징하는 삐뚤삐뚤한 쪽머리를 하고 있었다.

몸이 움직이는 대로 쪽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먼발치에서 보면 꼭 무언가가 정수리에 애써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짓더니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가 시야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 정신을 다해 제기를 차느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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