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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3)화 (52/1,192)

제53화

식사를 할 때면 묵용감은 여전히 백천범을 자신의 맞은편에 앉혔다. 고개를 들면 그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식사할 때 그렇게 예의를 따지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손님에게 음식을 권하는 법도 없었다. 양려낭은 신분도 그저 그랬으니 기홍 또한 예의상 몇 마디 건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관심을 백천범에게 기울였다. 어린 왕비의 먹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커다란 식탁에서 밥을 먹으니 백천범이 팔을 아무리 뻗어도 집지 못하는 음식이 있었기 때문에 몇몇 음식은 그녀가 직접 덜어 줘야 했다.

양려낭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정말 잘 드십니다.”

백천범은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지금 한창 자랄 때라서 어쩔 수 없는걸요. 많이 먹지 않으면 언제 크겠어요.”

양려낭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스스로를 아이라 생각하시는군요.”

묵용감이 한 마디 던졌다.

“왕비는 원래 아이요.”

그의 말에 양려낭은 기분이 좋아졌다. 초왕이 왕비를 아이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남녀 간의 정 따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왕비에게 머리를 빗겨 준 것도 그저 아이를 보살펴 준 것에 불과했다.

백천범이 갑자기 먹는 속도를 늦췄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묵용감에게 말했다.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봐요. 올해가 열넷이고, 다음 달에 열다섯이 되니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되는 것이에요.”

옆에서 기홍이 거들었다.

“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제대로 머리를 올려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언니가 해 주면 저야 고맙죠.”

묵용감이 비웃으며 말했다.

“왕비는 늘 정신이 없구려, 애초에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아니오? 어딜 봐서 열넷이라는 것이오? 여덟, 아홉 정도라고 해야 그나마 믿겠소.”

백천범이 빨개진 얼굴로 반박했다.

“저, 저는 천, 천천히 자라는 것뿐이에요. 태어난 날까지 잘못 기억할 수는 없지요.”

녹하가 끼어들었다.

“열다섯이면 성인이 되는 것이니, 더 이상 어린아이같이 제멋대로 행동하실 일은 없겠네요.”

묵용감의 냉담한 시선이 스치자 녹하는 곧장 눈을 내리깔고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식사를 마친 양려낭이 잠시 물러나자 묵용감이 백천범에게 물었다.

“지난번 목욕간에서 왕비의 목숨을 구해 줬으니 본왕에게 보답을 한다고 하지 않았소? 어찌 보답할 것이오?”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그리 인내심이 강한 편이 아니니 왕야께 작은 주머니를 수놓아 드리는 건 어떨까요?”

지난번 보았던 실이 잔뜩 뭉친 수틀을 떠올린 묵용감이 무시하며 말했다.

“그 솜씨로 만들면 웃음거리나 될 것이오.”

백천범이 지지 않고 말했다.

“지금 언니한테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녹하 언니가 빨리 익힌다며 칭찬까지 해 준걸요.”

묵용감이 천천히 먼 곳을 바라보더니 여전히 비웃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어디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나나 두고 봐야겠소.”

“왕야께서 정말 싫으시면 안 할게요.”

백천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저는 잘하는 게 없는걸요.”

계집아이가 잔뜩 기가 꺾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게 어찌나 우스운지 묵용감은 결국 또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

“알겠소, 본왕이 기다리리다.”

백천범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그가 재빨리 손을 거두고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나 많이 먹는데 어째 살은 찌지 않는 것 같소.”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왕야께선 아직도 지난번 일을 미안하게 생각하셔서 제게 이리 잘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럼 이러실 필요 전혀 없어요. 저는 마음에 담아 두지 않거든요. 지금껏 누구를 증오해 본 적도 없거든요.”

묵용감이 물었다.

“이씨 부인이 왕비에게 그리 모질게 대했거늘, 증오하지 않는단 말이오?”

“제게 모질게 대하긴 했지만 유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얇은 관을 보내 주었거든요. 그러니 그렇게 미워할 것도 없죠, 뭐!”

묵용감은 잠시 아무 말도 않다가 입을 열었다.

“본왕이 왕비에게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저택으로 와 나의 초왕비가 된 이상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인 셈이오. 계속 껄끄럽게 지낼 수는 없질 않소. 웃는 얼굴이 부를 가져다주고, 집안을 흥하게 한다는 말도 있으니 후원에서 마음 편히 지내시오.

나는 회림각에 있으니 종종 함께 식사를 해도 좋소. 그리고 무슨 일이 있거든 나에게 말하시오. 난처한 일만 아니면 내가 도와주겠소.”

백천범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요? 사실 왕야께 말씀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요, 왕야.”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아직 말도 채 끝나지 않았거늘. 은혜를 베풀어 달라니.

그가 백천범을 곁눈질로 흘겨보며 물었다.

“말하시오. 무엇을 부탁하고 싶은 것이오?”

백천범은 굳어진 그의 얼굴을 보자 선뜻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녀가 마치 협상을 하듯 말을 꺼냈다.

“그럼 일단 화내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어요.”

묵용감이 더는 참지 못하고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말을 할 것이오, 말 것이오? 말하기 싫으면 관두시오.”

“할게요.”

백천범이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가동 호위무사님 말이에요. 예전에 제게 무술을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러다 왕야께서 알게 되셔서 벌로 채찍질을 받으셨잖아요. 그 이후로 제게 더 이상 무술을 가르쳐 주시지 않고 저도 감히 배울 수가 없어서……. 하지만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인지라…….”

묵용감이 백천범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중도에서 포기라도 했소? 지금도 가동이 몰래 가르치고, 왕비도 몰래 배우고 있질 않소? 설마 그런 일을 본왕에게 감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소? 그저 왕비에게 추궁하지 않은 것뿐이오.”

백천범이 크게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야. 저는 그럼 이만 제 사부님에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복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묵용감은 그녀를 불러 세우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이내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기지개를 펴며 방에 들어가려고 하자 양려낭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며 다가왔다.

“왕야, 피곤하시지요. 소인이 뭉친 근육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은 양려낭에게 대답하지 하지 않고 복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가 은혜를 베풀어 준 백천범과 가동이었다. 요즘 대놓고 서로를 바라보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사이가 참으로 좋아 보였다.

백천범이 말했다.

“사부님, 지난번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다음번에 수놓은 주머니를 선물로 드릴게요.”

가동이 웃으며 대꾸했다.

“아이고, 참으로 영광입니다. 소인이 먼저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맞잡은 양손을 가슴 위로 올려 보이며 왕비에게 예를 갖췄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이 제게 예를 갖추시다니요! 아, 사부님의 친구 구문제독 말이에요. 그분께도 하나 만들어 드릴게요. 절 데리고 오느라 고생했거든요. 그분 아니었으면 그날 하루종일 산 속을 헤매고 다녔을 거예요.”

한참이나 묵용감의 대답을 기다리던 양려낭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입을 떼려던 찰나, 그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가 평소에도 다른 이들과 말을 많이 하는 편이오?”

양려낭이 복도에서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아직 어리시니 말씀이 많은 편이긴 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리하시는 것은 아니옵고, 후원에서는 소인에게만 자주 말을 거십니다.”

양려낭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묵용감에게 물었다.

“왕야, 소인이 어깨를 좀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필요 없소.”

그는 복도를 따라 자신의 침소로 향했다.

* * *

묵용감의 달라진 태도 덕에 백천범의 삶은 나날이 편해졌다. 그녀를 아는 사람도 점점 많아져서 어딜 가든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앞뜰과 후원을 잇는 문을 기준으로 세상은 둘로 나뉘었다. 앞뜰의 하인들은 그녀를 보면 늘 깍듯이 예의를 차렸지만, 남월각에 돌아오면 여전히 예전과 같았다. 왕야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모든 게 예전 그대로였다.

자유분방한 백천범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로 대했다. 하지만 늘 그녀와 함께 다니는 양려낭은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의 눈앞에서 이러한 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하인들은 백천범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하면서 자신에게는 가볍게 양씨 아가씨라고 불러 주는 게 다였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저택에서 지낸 지도 벌써 한참이나 지났는데 왕야께서는 뭐라 명확히 말씀해 주지도 않으시고, 이러시면 소인이 아무리 뻔뻔하다 한들 참으로 난감합니다. 소인은 부모님을 여읜 혈혈단신이라 의지할 곳도 없는데……. 지금은 왕야께서도 저를 싫어하시니, 이리도 고독한 게 소인의 운명인가 봅니다…….”

그녀는 계속 울먹거렸다.

백천범이 급히 위로하며 말했다.

“언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왕야께서 일이 너무 바쁘셔서 잠시 잊으신 것뿐이에요. 나중에 시간이 나시거든 제가 다시 말씀드려 볼게요. 왕야께서 모른 척하실 리 없어요. 지난번엔 언니한테 상까지 내리셨잖아요.

혹여 제쳐 둔 것이라 할지라도 저랑 비교해 보면 오래된 것도 아니에요. 저는 한 달 넘게 혼자서 있었던걸요. 지금은 그래도 좋은 편이에요. 조금만 기다리면 왕야께서도 무슨 말씀이 있으실 거예요.”

양려낭은 여전히 한숨을 내쉬며 침울한 표정으로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그때, 맑은 하늘 위로 갑자기 벼락이 한 차례 내리쳤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하늘을 바라보자 새카만 먹구름이 산과 바다를 삼킬 기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순식간에 하늘의 반을 뒤덮었다. 금세 주위가 어두워지더니 ‘콰직’ 하고 번개가 내리쳤다. 갈라진 하늘의 틈으로 새파란 빛이 드러났고, 먹구름이 추를 단 듯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양려낭이 소리를 치며 말했다.

“비가 내리겠어요! 어서 몸을 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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