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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2)화 (51/1,192)

제52화

묵용감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녹하가 백천범의 머리를 마른 수건으로 말려 주는 중이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백천범은 새로운 한 벌짜리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가볍고 얇은 원단에 연한 자색으로 테를 두른 옷이었다. 담청색 바탕에 덩굴이 휘감긴 정교한 정향나무 자수에서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눈에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기에 한 벌짜리 치마를 입을 때마다 늘 어색하기 짝이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보니 여린 소녀처럼 보이는 게 제법 잘 어울렸다.

마치 초봄에 꽃봉오리를 반쯤 벌린 복사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하얀 꽃송이를 소중히 보살펴야 할 것만 같았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묵용감은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백천범의 몸에 맞게 제작된 옷이었기 때문이다.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으니 그녀의 생김새가 더 돋보였다. 그녀가 늘 입던 옷들은 영 몸에 맞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묵용감의 시선을 곁눈질로 확인한 녹하의 기분도 들뜨기 시작했다. 백천범이 입고 있는 옷은 그녀가 어제부터 오늘까지 공들여 만든 옷이었기 때문이다.

허풍을 떠는 것이 아니라 바느질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던 그녀였다. 애초에 기홍은 음식, 녹하는 바느질에 뛰어났기 때문에 초왕도 그 둘을 시녀로 삼은 것이었다.

예전에 초왕이 유독 좋아하던 공작새 깃털이 달린 외투가 있었는데 그만 불씨에 닿아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워낙 정교하게 가공된 원단이었기 때문에 황궁에서 바느질과 자수를 담당하던 이들도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하지만 녹하는 달랐다.

그녀는 밤새 외투를 손본 뒤 왕야의 책상 위에 가져다 놓았다. 다음 날 아침, 기홍이 왕야의 환복을 도왔을 때, 구멍을 메운 곳이 어디인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크게 감동한 왕야는 녹하에게 진주로 만든 귀걸이를 상으로 내렸다.

어제 상으로 옷감을 내린 왕야가 그녀에게 왕비의 옷을 만들어 주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곧장 왕비의 치수를 잰 뒤 오늘 옷을 완성한 것이었다.

왕비는 연못에 자신의 몸을 유심히 비춰 보고는 몹시 기뻐했다. 혹여 옷이 더러워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노랑이가 몸을 문지르려고 다가오자 크게 소리를 지르며 옷에 붙지도 못하게 할 정도였다.

묵용감이 조심스레 그들 쪽으로 걸어왔다. 녹하는 지금에서야 왕야를 본 것처럼 황급히 예를 갖췄다.

“왕야.”

의자에 앉아 있던 백천범이 인사를 하기 위해 일어나려 했지만 묵용감이 어깨를 누르는 바람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형식적으로 칭찬했다.

“옷을 만들기에 꽤 괜찮은 원단이구나.”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입으시니 예쁜 것입니다.”

남을 치켜세우는 데 도가 튼 백천범은 급히 입을 열었다.

“녹하 언니의 솜씨가 좋은 것이지요. 바늘땀이 아주 촘촘하고 가지런한 데다가 테두리는 얼마나 팽팽한데요. 그리고 이 소매 좀 보시어요. 연잎이 둥둥 떠다니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녀의 칭찬에 녹하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소인을 그리 치켜세워 주시니 앞으로 왕비 마마의 의복은 소인이 책임지겠습니다.”

묵용감이 옆에서 껴들었다.

“허면, 창고에 비단 두 필이 더 있으니 그걸로 왕비에게 옷 두 벌을 더 만들어 주어라.”

눈치 빠른 녹하는 몸을 굽혀 대답했다.

“예, 왕야. 하면 소인은 창고에 가 보겠습니다.”

묵용감은 얼떨결에 녹하가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네받았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백천범의 머리를 마저 말려 주었다. 그러다 그가 문득 생각난 듯 그녀에게 물었다.

“어제 상으로 준 그 장신구는 어째서 오늘 하지 않은 것이오?”

백천범이 멋쩍어하며 말했다.

“그건 어제 해 주신 머리랑 제일 잘 어울리는데 제가 묶는 법을 몰라서요.”

묵용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왕비가 내게 또 덤터기를 씌우려 하는 것 같구려.”

그가 고개를 돌려 무수리에게 참빗을 가져오라 분부했다.

부엌 입구에 서 있던 양려낭은 초왕야와 백천범이 복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초왕야가 앉아 있는 왕비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양려낭은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땔감도 떨어뜨릴 뻔했다. 초왕야가 백천범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어떻게 머리를 빗겨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어제 백천범의 올림머리를 본 양려낭은 시녀들이 빗겨 주었다고 생각했다. 헌데 시녀가 아니라 초왕야였다니! 하늘 같은 군신 초왕야가 이렇게 부드럽게 왕비를 대하다니!

깜짝 놀란 그녀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부엌에서 나온 기홍이 먼발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왕야와 왕비 마마께서 금실이 참 좋으셔요. 그렇죠, 양씨 아가씨?”

양려낭이 겸연쩍게 말했다.

“그렇네요.”

‘이런 요물 같은 것. 옷 한 번 갈아입었다고 하루아침에 선녀라도 될 줄 알고?’

양려낭은 모든 면에서 자신이 백천범보다 낫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백천범과 같은 어린 계집에게 뒤질 리가. 그저 백천범이 더 일찍 저택에 들어왔으니 왕야가 그녀에게 조금 더 친숙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뒤꽂이가 없었기 때문에 묵용감은 녹하를 불러 비취옥으로 장식된 꽃무늬 장신구를 가져오게 했다. 백천범의 머리에 꽂아 주니 곧장 귀티가 흘렀다.

옆에 와 있던 녹하가 감탄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왕야. 나중에 군주郡主 마마께서 태어나시면 솜씨를 발휘하실 날이 더 많으시겠습니다.”

묵용감이 미소를 지었다. 군주라, 그렇게 먼 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번 생에 자식을 볼 수 있을지는 단언할 수 없었다. 처를 맞지 않는데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눈을 내리깔고 앞에 앉아 있는 이를 바라봤다. 그의 정실이자 명실상부한 초왕비였지만, 아직은 그저 아이에 불과했다.

그날 그가 백천범에게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본분을 잘 지키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만 하지 않는다면 한평생 평안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백여름의 딸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발을 잘못 들이면 모든 일을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신중함을 잃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는 이 어린 계집이 재미있었다. 이런 여동생이 있었다면…….

사실 그에게는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여동생과 사촌 여동생들, 셀 수 없이 많은 공주와 군주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쁜 얼굴에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진주 비녀를 꽂았으며 오만하거나 온순한 성격으로 고상한 분위기를 풍겼다.

말을 할 땐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로 우아하게 얘기했다. 그를 볼 때면 늘 예를 갖춰 셋째 오라버니라고 불러 주었다. 입꼬리를 살짝 오므리고 웃는 모습이 다들 어찌나 똑같은지 꼭 자로 잰 듯했다.

그들 중에 백천범같이 다양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잔꾀를 부리거나, 누군가 자신을 못 볼까 봐 손바닥만 한 얼굴을 치켜든다거나, 자그마한 이를 잔뜩 드러내며 웃는다거나. 가끔은 히히거리며 웃고 가끔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척을 하고, 가끔은 가여운 척, 또 가끔은 소란스레 웃고 떠들고…….

자신을 보필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도 잘 먹고 잘 지냈고, 억울한 일을 당해 몸을 숨기다가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보는 날엔 또 웃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낀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일까? 그의 마음속 일부분이 부드러워진 듯했다. 시녀 청수의 일을 다시 조사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녀가 저지른 일이든 그렇지 않든 그저 이렇게 종결을 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묵용감은 일단 자신이 청수를 해한 것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백천범이 거울을 요리조리 비춰 보며 조심스레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왕야, 이것도 제게 상으로 주시는 것이에요?”

묵용감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왕비가 가지고 싶다면 가져가시오. 다른 이들이 보면 본왕이 왕비에게 장신구 하나도 주려 하지 않는 아주 쩨쩨한 사람인 줄 알 것 아니오.”

곧바로 기분이 좋아진 백천범은 물가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 했다.

“와아아, 부자가 되겠네요! 이렇게 귀중한 걸 얻다니.”

묵용감은 세상 물정 모르는 그녀의 모습을 비꼬며 말했다.

“이걸로 부자가 된다니? 명색이 초왕비라는 자가 버젓한 장신구도 없어서야, 원.”

“있어요.”

백천범이 손을 뻗어 옥팔찌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희 어머니가 남겨 주신 거예요. 보세요, 빙종氷種 비취로 만들어진 거라서 색이 참으로 곱죠? 이 매끈한 광택은 또 어떻고요. 완전히 최상품이라니까요!”

묵용감은 꼭 물건을 파는 상인처럼 말하는 그녀의 말투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왕비는 역시 세상 물정을 잘 아는구려. 참으로 아는 것도 많소. 비취는 광택으로 최상품을 가리면 백옥은 무엇으로 가려내는 것이오?”

백천범은 자신의 얄팍한 밑천이 드러나자 헤헤 웃어 보였다.

묵용감은 능글맞은 백천범의 모습에 결국 참지 못하고 또다시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

* * *

화려한 옷을 입고 보석이 박힌 비녀까지 꽂은 백천범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꽤 그럴싸해 보였다.

하지만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원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백천범이 치마폭을 붙잡고 노랑이를 쫓으며 밖으로 뛰어가자 기홍이 옆에서 조마조마해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 조심하십시오. 넘어지십니다.”

묵용감은 연못가에 앉아 잉어 먹이를 주고 있었다. 학평관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했다.

“왕야, 남월각의 노비들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인이 왕비 마마를 제대로 모실 시녀들을 골라 보겠습니다.”

묵용감은 연못 안을 유유히 헤엄치는 비단잉어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왕비는 자신을 스스로 잘 돌보니 그럴 필요 없다.”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파악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가 두 번째로 백천범을 본 장소가 바로 연못가였다.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연못가에 사람이 죽어 있던 그 날이었다. 청병과 청수…….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조사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백여름 그 망할 작자가 이 계집아이를 자신에게 보낸 것은 분명 무슨 의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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