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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1)화 (50/1,192)

제51화

묵용감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꼭 온순한 고양이 같았다. 틀어 올린 동그란 머리는 고양이의 귀 같았고, 가늘게 뜬 눈에서는 천진난만함이 묻어 나왔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난번처럼 자신을 꼬집으려는 줄 알았던 백천범이 황급히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왕야, 걸핏하면 꼬집으려 하다니요. 이건 아주 나쁜 버릇이에요. 어른이 그렇게 가볍게 손을 놀리시면 어떡해요. 사실 엄청 아프다고요. 지난번에도 자국이 이틀이나 갔어요.”

퍼뜩 정신을 차린 묵용감이 두 눈을 껌벅거렸다. 아래를 바라보니 백천범이 자그마한 두 손으로 자신의 커다란 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포동포동한 손등이 복스러웠다.

그가 담담히 자신의 손을 빼내며 말했다.

“왕비가 오해했소. 꼬집으려던 것이 아니오. 더러운 게 묻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점이었구려.”

백천범이 말괄량이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우물거렸다.

“려낭 언니한테 왕야께서 여인은 때리시지 않는다고 말해 놓고 오히려 제가 착각을 했네요.”

“여인을 때리지 않는다고 누가 그러오?”

묵용감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본왕을 성나게 하면 누구든 벌을 피할 수 없소.”

백천범이 의심스러운 듯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를 짓고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왕야, 지금 제게 농담하시는 것이지요?”

돌연 묵용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만 돌아가시오. 본왕은 피곤하니 좀 쉬어야겠소.”

묵용감의 굳은 표정에 깜짝 놀란 백천범은 재빨리 문을 나섰다.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밖으로 나오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왕야가 또 변덕을 부린 것이다. 자신은 이미 그런 그의 모습에 익숙했지만 려낭 언니가 놀랄까 봐 걱정이었다.

* * *

조정을 다녀오니 백천범이 이틀 연속 회림각에 와 있었다. 묵용감과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는지 백천범은 그를 봐도 더 이상 숨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양려낭도 그의 옆에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요염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께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묵용감은 짧게 답한 뒤, 방으로 들어가며 학평관에게 물었다.

“이틀 동안 왕비가 부엌일을 도우러 온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학평관은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더니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기가 매울까 봐 기홍 아가씨가 밖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지만, 왕비 마마께서 그렇게 하기는 싫으셨는지 줄곧 왕야의 지시라고 말씀하시며 부엌에 계셨습니다.

어제는 아궁이에 직접 불을 붙이시는 바람에 코가 새카매지시더니, 오늘은 물을 떠 와 신발을 닦으셨습니다. 지금은 기홍 아가씨의 신을 신고 계시지요. 소인이 보기에는 왕비 마마께서 아주 즐거워하시는 듯합니다.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응석받이로 자라신 게 아니라서 그런지 무슨 일이든 다 즐겁게 하십니다. 다들 그런 왕비 마마를 잘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말을 하면서 묵용감의 표정을 살폈다.

왕비가 저택에 돌아온 후, 왕비를 대하는 왕야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왕비가 저택으로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바람에 성가신 일이 벌어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평화롭게 일이 풀리고 있었다. 게다가 왕야가 양려낭이 저택에 묵는 것을 허락했다.

학평관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기 때문에 왕야가 양려낭을 마음에 두는 것은 아니라는 걸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녀보다 예쁜 여자는 흔하디흔했다. 어디에 내놓을 수도 없는 초라한 집안의 아가씨가 어찌 왕야의 눈에 들 수 있단 말인가.

저택에 머무르라 허락한 것은 그저 왕비의 청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왕비를 구하러 가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던 왕야가 다양한 방식으로 왕비에게 마음의 빚을 갚고 있는 것뿐이었다.

원수의 딸에게 미안한 마을을 갖는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왕야 스스로 제 발등을 찍는 일이기도 했다. 학평관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하여간 어쨌든 요즘 왕야의 마음속에 왕비는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왕야, 녹하 아가씨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를까요?”

묵용감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다 불쑥 무엇인가 생각난 듯 학평관에게 물었다.

“방금 왕비가 무슨 일이든 즐겁게 한다 하였느냐?”

“예, 왕비 마마께서 하실 수 있을 법한 일감을 나누어 드리면 금세 신이 나셔서 하십니다!”

“그럼 본왕의 목욕 시중을 들라 하라.”

깜짝 놀란 학평관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되물었다.

“예?”

학평관은 곧장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아, 예. 소인이 왕비 마마께 명을 전하겠습니다.”

학평관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물러섰다. 늙수그레한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왕야께서 정녕 마음의 벽을 허물고, 왕비 마마와 정을 나누려는 것인가? 그렇게만 된다면 두 분의 결실로 후손이 번성하게 될 테니, 그 또한 선황제에게 면목이 서는 것이었다.

* * *

백천범은 밖에서 자신의 신을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노랑이가 그 주변을 맴돌더니 갑자기 신의 겉면을 쪼아댔다. 그녀가 손을 저으며 서둘러 노랑이를 다른 쪽으로 보냈다.

“야, 이 바보야. 내 신은 왜 그렇게 쪼아대는 거야. 쌀알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양려낭이 부엌 입구에서 소리쳤다.

“왕비 마마, 땔감이 떨어졌습니다.”

녹하가 예의를 차리지 않고 말했다.

“땔감이 없는데 왜 왕비 마마를 부르십니까? 여기 이 많은 무수리들이 부족하신 것입니까?”

양려낭은 민망함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비 마마께서 일하는 걸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녹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회림각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왕비 마마께 일을 시킬 수 없습니다.”

녹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 마마, 어서 물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왕야의 목욕 시중을 드시지요.”

깜짝 놀란 녹하가 밖을 내다보자 양려낭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바보로 보다니, 왕비 마마께 일을 시킬 사람이 없긴 왜 없단 말인가?

백천범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코끝을 가리키며 학평관에게 물었다.

“제가 하라고요?”

“예.”

학평관이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앞쪽으로 모시겠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가시지요, 왕야께서 기다리십니다.”

백천범은 아직 어렸지만 남녀 사이의 일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르신, 녹하 언니에게 가라고 하면 안 될까요? 저는 조금 그런데…….”

“왕비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학평관이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왕비 마마와 왕야는 서로 부부이시지 않습니까. 부인이 지아비의 목욕을 돕는 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니 피하실 필요 없습니다.”

백천범은 하는 수 없이 신을 질질 끌며 그를 따라갔다.

목욕간에 도착한 그녀는 먼저 목욕통을 닦으려고 했다. 두껍고 무거운 목욕통은 거의 그녀의 키만큼 높고 커다랬다. 백천범은 허리를 아무리 굽혀도 안쪽을 닦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목욕통에 몸을 걸쳐 놓고 한 손으로 가장자리를 잡은 채 밑으로 몸을 숙였다.

목욕통 바닥엔 청소를 할 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백천범은 솔을 들고 열심히 통을 닦았다. 가느다란 강모가 통의 표면과 마찰하면서 쓱쓱 싹싹 소리를 냈다.

묵용감이 목욕간을 들어 왔을 땐, 그녀의 몸 절반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높게 들어 올린 작은 엉덩이가 뒤뚱거리는 게 퍽 익살스러웠다.

그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용히 다가가더니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뭐 하는 것이오?”

깜짝 놀란 백천범은 손이 풀려 들고 있던 솔을 떨어뜨렸다. 다시 솔을 주우려 손을 내밀던 그녀는 꽈당 소리와 함께 통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두 차례나 사레가 들렸다.

묵용감이 재빨리 그녀를 들어 올렸다. 가여운 백천범의 머리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묵용감이 들어 올릴 때까지도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기침을 해 댔다. 물방울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지며 금방 옷까지 적셨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자신을 원망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그의 팔을 붙잡고 환하게 웃었다.

“왕야께서 제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머리카락이 물기를 뚝뚝 떨어뜨리며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삐뚤어진 쪽머리가 더욱 볼품없이 축 늘어졌다. 물기를 머금은 두 눈에서 곧 물방울이 떨어질 것 같았고, 얼굴까지 창백해졌지만 웃음을 짜내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것이다.

묵용감은 크게 웃고 싶었지만 갑작스레 죄책감이 솟구쳤다. 기분이 이상했던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향하며 오히려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는데 무엇을 하겠단 말이오?”

백천범이 우물대며 말했다.

“저는 그래도 열심히 하는걸요. 그리고 왕야께서 너무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 바람에 놀라서 그런 거예요.”

“그 말인즉슨 본왕의 잘못이란 것이오?”

“왕야를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야께서 절 구해 주셨으니 제가 꼭 보답을 해 드려야겠지요.”

묵용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됐소. 지난번 왕비를 구하지 못한 일을 만회한 것이라 생각해 주시오.”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 일은 이제 그만 자책하시어요. 다행히 착한 도적을 만나 푸대접을 당하진 않았습니다. 맛있는 것도 주고 편한 잠자리도 내어 주었어요.”

“허면 다리에 난 상처는 어찌 된 것이오?”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모든 일을 쪼르르 털어놓았다.

“더 이상 산에 머무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산을 내려오는데, 사장풍 구문제독을 만났거든요. 구문제독이 저를 데려다준 것이에요. 말을 탈 줄 모르는 데다가 산길이 험해서 다리에 상처가 났지 뭐예요.”

“그자가 거기는 뭣 하러 갔단 말이오?”

백천범이 입을 살짝 오므리며 말했다.

“화를 내시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벌도 내리지 않으시겠다고요. 그래야 말씀드릴 수 있어요.”

“약속하겠소. 말하시오.”

“실은 가동 무사님 부탁으로 저를 찾으러 온 것이에요.”

“왕비를 찾으러 갔다면서 가마도 준비하지 않았단 말이오?”

“운에 맡긴 것이겠죠, 뭐. 말 한 필만 가져온걸요.”

“말 한 필?”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타고 왔단 말이오?”

“네, 스무 리가 넘는 거린데 걸어올 수는 없잖아요?”

그녀가 반문했다.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놓고 빠른 발걸음으로 앞으로 향했다. 그리곤 먼 거리에 있는 녹하를 불렀다.

“왕비를 데려가 옷을 갈아입히거라.”

심기가 불편한 왕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녹하는 황급히 치마폭을 잡고 백천범에게 뛰어왔다.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녀의 모습에 녹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왕비 마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백천범이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별일 아니에요. 실수로 목욕통 안에 떨어졌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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