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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50)화 (49/1,192)

제50화

깜짝 놀란 백천범은 잠시 멍하니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였다. 왕야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는 자리였지만, 왕야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양려낭이 마음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왕비가 싫었으면 왕야는 자신과 가까운 자리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며칠 동안 낙성각에서 지내면서 시녀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은 양려낭은 백천범과 초왕의 관계를 얼추 파악하고 있었다. 초왕야가 왕비를 싫어해서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것과 친정에서 보낸 남월각 시녀들에게 늘 시달리고 있다는 것까지. 그야말로 아무도 따르는 이 없는 주인이었던 셈이다.

양려낭은 대세를 따르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도와준 백천범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었지만, 그녀의 상황을 다 알고 나니 고마운 마음이 경멸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분명 그녀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양려낭에게는 더 잘된 일이었다. 경쟁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왕야의 눈에 오로지 자신만 들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전 훌륭했던 안마 덕에 왕야가 상으로 보석이 박힌 비녀를 하사했고, 그녀는 곧장 비녀를 바꿔 꽂았다. 보석이 반짝이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장식으로 달린 술까지 서로 부딪혀 작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 그녀의 비녀를 보더니 두 눈을 반짝이며 무심코 소리쳤다.

“정말 예뻐요!”

양려낭은 부끄러워하며 묵용감의 눈을 한 번 바라보았다.

“왕야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내밀며 비녀를 구경했다.

“언니 머리에 꽂으니깐 정말 잘 어울려요.”

“왕비는 질투라도 하는 것이오?”

묵용감이 그녀를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

“본왕이 왕비에게도 상을 주겠소.”

상을 주겠다니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비녀는 장신구였기 때문에 은량이 부족할 땐 언제든 맞바꿀 수 있으니 그녀에게도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녀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왕야.”

묵용감은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백천범에게 말을 걸었다.

“앉으시오. 방금 전에는 어딜 그리 바삐 간 것이오?”

“부엌에 있었습니다.”

묵용감이 쯧쯧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왕비라는 사람이 걸핏하면 부엌에나 들어가고. 모르는 이가 보면 왕비에게 밥을 주지 않는 줄 알겠소.”

양려낭이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었다. 면전에서 왕비를 놀리는 걸 보니 역시 초왕야는 왕비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었다.

백천범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부엌의 연기 냄새가 좋습니다.”

“그거 아주 잘 되었구려. 내일부터 부엌일을 돕는 게 좋겠소. 연기 냄새를 실컷 맡을 수 있을 것이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백천범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왕야, 진심이십니까?”

묵용감의 말은 물론 농담이었지만 얼굴 가득 묻어난 그녀의 기쁜 표정에 쉽사리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성가신 표정으로 말했다.

“본왕은 일언이 중천금인 사람이오. 왕비를 속여서 무엇 하겠소?”

양려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백천범이 회림각에 계속 머무르기 위해 수를 쓰는 듯했다. 그녀 역시 뒤처질 수 없었기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부엌일을 도우실 때 소인이 함께 와도 괜찮을지요? 계속 왕비 마마와 함께 있다가 갑작스레 떨어져 지내면 소인이 너무 서운할 것 같습니다. 소인도 집에서 음식을 했으니 부엌일은 다 할 수 있습니다.”

백천범은 별 생각 없이 그녀의 말에 곧장 수긍했다.

“좋아요. 언니도 저랑 함께 와요.”

백천범이 묵용감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야, 허락해 주세요.”

부드러운 백천범의 말투는 꼭 그를 주인이라 여기는 듯했다.

묵용감은 백천범의 성향을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생쥐처럼 간이 작았다가 또 어떤 때는 또 누구보다 대담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아무리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속셈을 간파하기 어려웠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리하시오.”

밥을 다 먹은 후, 묵용감이 백천범에게 비녀를 받으러 방으로 오라 말했다. 그러자 양려낭이 곧장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백천범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묵용감이 손을 흔들었다.

“양씨 아가씨는 먼저 돌아가시오. 본왕이 왕비에게 할 말이 더 남았소.”

양려낭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마음은 놓였다. 오늘 상황을 보니 초왕야가 그녀에게 제법 잘해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 오자마자 상으로 비단 옷감을 준 것도 모자라 안마에, 또다시 상으로 내린 비녀까지.

초왕야는 그녀에게 나긋나긋한 말투로 어느 지역 출신인지, 어디에 사는지, 친척들은 있는지 등을 물었다.

초왕의 얘기만 나오면 다들 두려움에 떨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다. 지금은 초왕야가 훌륭한 인품을 가진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지아비로 맞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만 같았다.

* * *

백천범을 자신의 침소로 데려간 묵용감은 그녀의 쪽머리를 가리키며 싫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다른 아가씨들은 아주 단정하게 잘 빗어 넘기는데 왕비의 머리 좀 보시오. 이쪽은 주저앉고, 이쪽은 삐뚤어지고! 무슨 오뚝이요?”

백천범이 이를 보이며 웃었다.

“제 방에는 손거울조차 없는걸요. 거울도 없이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편이지요. 왕야께서 싫어하시니 앞으로는 왕야 눈에 덜 띌게요.”

“…….”

그가 잠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자신의 말이 그 뜻이란 말인가? 어린 것이 벌써부터 이러는 걸 보면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는 분명 탁월해 보였다.

그가 얼굴을 굳히며 딱딱하게 말했다.

“앉으시오.”

조금 무서워진 백천범은 그의 말대로 얌전히 거울 앞에 앉았다. 묵용감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물었다.

“왕야, 뭐 하시는 것이에요?”

묵용감은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명색이 초왕비라는 사람이 단정하고 깔끔해야 하는 건 말할 필요도 없거늘. 손님이 와서 보기라도 한다면 본왕의 체면이 대체 얼마나 구겨지겠소?”

그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가 원하는 대로 가만히 따랐다.

자신의 말에 굴복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퍽 좋았던 묵용감은 입가에 한줄기 미소를 지었다.

백천범과 묵용감은 말다툼을 했던 그날 밤 이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몇 번이나 그녀에게 납치당했던 일을 묻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상처받은 지난 일을 떠올릴까 봐, 특히 자신이 보낸 서신을 언급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백천범을 회림각으로 데려오라고 사람을 부르고 싶을 때가 잦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목구멍 뒤로 말을 삼켜 넘기며 꾹꾹 참았다. 그러다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 근심에 잠기곤 했는데 마침 오늘 그녀가 직접 회림각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왕비, 지난번 왕비를 납치한 그자들에 대해 기억나는 것 있소?”

백천범은 잔뜩 경계하며 거울에 비친 묵용감의 표정을 살폈다.

“왕야께서 그건 어찌 물으시는 것인지요?”

“왕비는 그자들은 잡아들이고 싶지 않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바르지 못한 길로 빠진 것뿐입니다. 게다가 절 죽이지 않으면 돈을 받지 못하는데도 살려 주었죠. 고마워해도 부족할 판국인데 왕야께서 잡아들이길 바란다니요?”

묵용감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이지 않으면 돈을 받지 못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그들은 백 승상 댁에도 몸값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어요. 이씨 부인은 늘 절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니 이때다 싶었겠죠. 절 죽여야 은자를 준다고 회신을 보냈거든요.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묵용감이 잠시 손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었다.

납치를 당해 가족들이 구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랐을 텐데, 한쪽은 줄 돈이 없으니 목숨을 가져가려면 그리 하라는 서신을 보냈고, 다른 한쪽은 오히려 죽여야 돈을 주겠다고 했다니…….

열셋의 아직 어린아이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상처였을 것이다. 그러니 돌아오자마자 그리 언성을 높이면서 말다툼을 벌인 것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왕비는 지금도 본왕을 원망하오?”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조금 그랬지만 지금은 이미 지나간 일인걸요. 제가 백 승상의 딸인데도 왕야께서는 더 해를 가하시지 않으셨잖아요. 사실 지금도 이미 충분히 좋아요.”

마음에 두지 않는다니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묵용감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가 다시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더니,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나의 불찰이오. 왕비는 왕비고 왕비의 아비는 왕비의 아비일 뿐인데. 어린 아가씨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은 대장부답지 않은 행동이었소.”

백천범은 살짝 감동이 밀려왔다. 초왕야가 자신에게 잘못을 뉘우치다니! 사실 그녀는 이 일을 진즉에 털어 버린 뒤였다. 다만 왕야와 말다툼을 한 뒤로 그를 보기 부끄러웠던 것뿐이었다.

“왕야, 잘못을 알고 바로잡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낀 묵용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살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엄하군.”

백천범은 무어라 말하는 대신 혀를 쏙 내밀어 보이고 말았다.

역시 꼼꼼함이 정교함을 낳는다 했던가. 그의 솜씨는 지난번보다 더 좋아졌다. 양쪽으로 말아 올린 머리는 적당한 크기로 올라갔고, 이마를 가린 앞머리 덕에 동그란 얼굴이 도드라져 아주 귀여웠다.

묵용감이 서랍에서 분홍색 뒤꽂이를 꺼내 왔다. 노란색 꽃술에 꽃잎은 광채가 흐르는 유리알로 꾸며진 장신구였다. 한쪽 올림머리에 하나씩 꽂자 까만 머리에서 곧장 생기가 흘러나왔다.

지난번에 그녀에게 비녀를 선물해 주겠다고 이 뒤꽂이를 준비해 두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괴한에게 납치를 당하자 다시는 줄 기회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꽂아 주고 보니 그의 근심거리 하나가 사라진 듯했다.

지금껏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 없던 그는 아무리 백여름의 딸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빚을 지는 일이 생길 때마다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야 했다.

백천범은 거울을 요리조리 비추어 보면서 환한 웃음을 지었다.

“진짜 예뻐요, 왕야. 저번보다 솜씨가 더 좋아지셨네요.”

묵용감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도 머리를 빗겨 주었으니 또 본왕을 좋은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 아니오?”

“제 아버지가 왕야의 원수만 아니었다면 왕야께서도 절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겠죠. 저도 다 알아요.”

백천범이 고개를 들고 자그마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왕야께서 잘못을 뉘우치고, 오늘 제 머리를 빗겨 주신 데다가 이렇게 예쁜 장신구까지 상으로 주셨는데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욕심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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