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백천범은 함께 지낼 단짝이 생기니 회림각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발길이 끊기자 묵용감은 회림각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너무 조용했던 것이다.
그녀가 찾아올 때에만 회림각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가 두 시녀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꼭 강호를 거니는 여자 협객처럼 바람을 일으키며 걷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그가 자주 오지 말라 했다고 정말로 그리 말을 잘 들을 줄이야.
한 번도 발길을 주지 않다가 어렵사리 찾아와 놓고는 꼭 어린 중매쟁이라도 된 것처럼 양려낭과 자신을 번갈아 보며 미소를 짓는 게 정말 얄미웠다. 꼭 자신과 양려낭이 당장 혼사라도 치러야 직성이 풀릴 듯한 모습이었다.
백천범이 백여름의 딸만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백천범을 여동생으로 삼아 잘 먹이고 잘 보살피며 귀엽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크면… 조금만 더 크면… 아니,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따금 그녀가 더 이상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는 그저 아직 자그마한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놀고 싶었다.
그가 도포 자락을 걷어 올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약간의 피로감이 밀려온 그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곧 장마철이 다가와 동쪽 저수지의 수위가 점점 불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파견해 밤낮으로 제방을 견고하게 보수할 것을 지시했다. 어젯밤 그도 현장을 찾아 야간 순찰을 돌았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조금 피곤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본 녹하가 조용히 말했다.
“왕야, 피곤하시지요. 소인이 어깨를 좀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이 답을 하기도 전에 백천범이 소리쳤다.
“왕야, 려낭 언니에게 안마를 받아 보셔요. 얼마나 편안한데요. 지난번에 제가 받아 봤는데 깜빡 잠이 들 정도였습니다.”
녹하가 속으로 생각했다.
‘하, 어린 왕비가 내 밥그릇까지 뺏으려는 것인가?’
기홍도 왕비가 남을 도우려는 마음이 정직해도 너무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학평관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딱 두 글자였다. 천치. 양려낭이 정말 왕야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본인에게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저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묵용감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양려낭도 조금은 민망했지만 꿋꿋이 자리에서 일어나 묵용감에게 사뿐히 절을 올렸다.
“왕야, 그간 왕야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보답할 길이 없었으니 소인이 왕야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은 여전히 고개 숙인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정말 기이했다. 어떤 이들은 양려낭처럼 늘 고개를 숙이는데, 어떤 이들은 항상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를테면 백천범 같은 사람. 작은 얼굴을 들어 올리고 미소를 지으며 온종일 근심이라는 것은 모르는 모습이었다.
남월각에서 악랄한 노비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해도 늘 생기가 넘쳐흘렀고 위축된 모습은 조금도 볼 수 없었다.
묵용감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적막한 분위기가 흘렀다.
양려낭도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 허리를 굽히고 있었으나 왕야께서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으니 감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이런 자세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허리가 시큰거리고 다리도 아파 왔지만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한참 뒤, 묵용감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럼 양씨 아가씨가 수고 좀 해 주시오.”
수고로울 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기회가 왔으니 반드시 왕야의 눈에 들어야 했다.
그녀는 꼭 버들가지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듯 우아한 자태로 걸어갔다. 살랑거리는 모습에 몸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곡선이 드러났다. 하! 한눈에 보아도 영락없는 여우였다.
백천범만이 부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걸음걸이가 예뻐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도 언니처럼 매혹적인 여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양려낭의 안마 솜씨는 아주 뛰어났다. 예전에 아버지가 일만 했다 하면 한나절이나 허리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 그녀가 늘 안마를 해 드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별히 의원까지 찾아가 혈자리 짚는 법을 배운 덕에 적당히 힘을 가하는 기술이 매우 훌륭했다.
양려낭이 묵용감 뒤로 자리를 옮기자 그녀에게서 나는 어렴풋한 계화꽃 향이 묵용감의 코끝에도 전해졌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의 어깨에 조심스레 놓이더니 뭉쳐 있던 근육을 조금씩 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등을 따라 그녀의 손도 천천히 아래쪽을 짚었다…….
의자 등받이 때문에 양려낭의 손이 중간에 멈춰 섰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왕야, 혹 옆쪽으로 앉아 주실 수 있으신지요? 뒤가 등받이에 막혀 있습니다.”
묵용감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세를 바꾸어 옆으로 돌아앉았다. 그녀의 두 손이 계속 아래로 내려가 그의 꼬리뼈를 누르자 저릿한 느낌이 전해졌다.
녹하와 기홍, 학평관은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담이 참으로 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데 저리도 스스럼없이 행동하다니. 굳이 그녀의 안마를 즐기고 있는 왕야도 그랬다. 정녕 새로운 부인을 얻으려는 것이란 말인가?
양려낭은 초왕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어쨌든 그가 웃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훌륭하오. 안마사 못지않군. 이리 오랜 시간 고생하였소. 잠시 기다렸다가 같이 식사를 들고 가시오.”
왕야의 칭찬에 깜짝 놀란 그녀는 급히 예를 갖춰 감사 인사를 올렸다.
두 사람의 연이 이어지자 백천범은 크게 기뻐했다. 자신과는 더 이상 상관없는 일이라 여긴 그녀는 조심스레 문간으로 빠져나가 가동에게 말을 걸었다.
“사부님, 지난번에 알려 주신 초식은 거의 다 연습했으니깐 시간 날 때 다른 초식들도 좀 알려 주셔요.”
가동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영구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참지 못한 영구가 한마디 했다.
“고약한 심보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다니.”
그에 가동이 말했다.
“아이 참, 영구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나는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성격이라고. 왕비 마마께서 수업료까지 주셨는데, 어떻게 중간에 그만두겠니?”
백천범이 영구에게 바짝 붙으며 말했다.
“혹여 밀고라도 하는 날엔 영구 무사님을 사부로 삼을 거예요.”
가동이 입을 틀어막으며 킥킥댔다. 영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왕비가 점점 더 영악해졌기 때문에 일을 적게 만드는 편이 더 나았다.
백천범이 안을 바라보자 묵용감과 양려낭은 여전히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찻잔을 거두고 밖으로 나온 기홍이 백천범을 잡아당기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왕비 마마,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정말 왕야와 양씨 아가씨를 이어 주기라도 하려는 것이에요?”
백천범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려낭 언니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려고 자신을 팔 수밖에 없었대요. 왕야께서 은자를 주셨으니 왕야를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죠.
제가 보기에 려낭 언니가 왕야를 엄청 좋아해요. 왕야께서 이번 생에 처를 들이지 않겠다고 하시긴 했지만, 이제 곧 서른인데 또 어떻게 평생을 홀로 살 수 있겠어요.
려낭 언니는 얼굴도 예쁘니까 왕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왕야가 정말 려낭 언니를 좋아하게 되어서 마음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면 진정한 일석이조 아니겠어요?”
기홍이 답답해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늘 다른 이에게만 관심을 주시고, 어찌 자신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신경 쓰시지 않는 바람에 이곳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은데, 새로운 사람까지 들여오다니요!
정말 양씨 아가씨가 왕야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왕비 마마는 어찌 되겠습니까? 왕비 마마께서 물러나신 이후의 방도는 생각해 두신 겁니까?”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야께서 계속 이곳에 살아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저도 제 분수는 알아요. 그날 왕야께서 저택에 돌아온 절 보고 위로의 말을 건네시긴 했지만, 기뻐하지는 않으셨어요.
저는 지금 그저 하루하루 견디며 지내고 있는 것뿐이에요. 절 죽이지는 않아도 조만간 절 내쫓으시겠죠. 왕야께서 나쁜 사람은 아니시니 저도 진심을 다해 왕야를 보살펴 줄 사람을 찾아 주고 싶어요.”
“…….”
어린 왕비의 마음이 참… 바다보다 넓었다. 하지만 왕비가 왕야의 여인 문제까지 책임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랑하는 낭군과 단둘이 함께하는 삶을 마다하는 신부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왕비는 자신의 부군을 다른 여인의 품으로 떠밀고 있었다.
백천범은 묵용감과 함께 점심을 먹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쨌든 왕야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것도 아니니 기홍의 뒤꽁무니만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재료는 무수리들이 이미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기홍의 요리만 기다리면 되었다.
백천범은 노랑이를 위해 쌀독에서 쌀을 한 줌 꺼내 땅에 뿌려 주었다. 그리고는 의자를 가져와 앉은 뒤 밥이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
기홍이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가셔서 왕야와 함께 드십시오. 부엌은 기름 냄새가 심합니다.”
백천범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 냄새가 좋은걸요. 입맛이 더 좋아진다니까요.”
녹하가 들어오며 백천범에게 말했다.
“하, 왕비 마마께서 여기에 계셨군요? 어서 정자로 드시지요. 왕야께서 찾으십니다.”
백천범은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다.
“왕야께서 왜 절 찾으세요? 려낭 언니랑 같이 드시려는 거 아니에요?”
녹하는 기홍처럼 백천범을 따스하게 대하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백천범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흥분한 탓에 그녀의 손가락이 하마터면 백천범의 이마를 찌를 뻔했다.
“왕비 마마는 정말 바보십니까? 그 양씨 아가씨인지가 정말 왕야의 첩이라도 된다면 왕비 마마는 그 아가씨한테 크게 당할 일만 남았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에이, 려낭 언니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녹하가 냉소를 지었다.
“두고 보십시오.”
백천범이 꿈쩍도 않자 녹하는 아예 그녀를 잡아끌었다.
“가셔야 합니다. 왕야께서 기다리신다니까요. 왕비 마마께서 안 오시면 성을 내실 테니 양씨 아가씨가 놀랄 것입니다.”
녹하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초왕야는 변덕스러운 사람이니 려낭 언니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되었다.
녹하는 백천범을 끌고 정자로 향했다. 식탁 앞에 앉아 있던 양려낭은 백천범을 보고 미소를 짓더니 다시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백천범이 묵용감의 왼쪽 빈자리에 앉으려 하자 갑작스레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왕비는 저쪽에 앉으시오.”
그가 가리킨 자리는 묵용감의 맞은편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