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잔뜩 신이 난 백천범은 처소를 골라 보라며 양려낭을 잡아끌었다.
결국 남월각에서 가장 가까운 처소인 낙성각落星閣을 고른 양려낭은 꽤나 만족스러워했다. 낙성각에 담긴 ‘별이 떨어지는 곳’이란 뜻이 좋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라는 별이 초왕의 저택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곧 초왕야가 자신 위의 맹하디 맹한 어린 왕비가 아니라, 자신에게 흠뻑 빠지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곧 왕야의 총애를 받아 서로 사랑하며 부귀를 누리게 될 테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남월각을 보니 정원이 크긴 컸다. 하지만 달을 딴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은 누가 봐도 헛소리였다. 저리도 자그마한 왕비는 아직 사춘기도 오지 않은 듯하니 제대로 첫날밤을 보내지 못했을 것 같았다.
자신이 하루빨리 그녀를 따라잡아 초왕야의 사람이 되면 남월각은 달을 따는 처소는커녕 영원히 달을 방치하는 처소가 될 것이다.
시장 근처 마을에서 자란 양려낭은 아리따운 외모에 걸맞게 포부가 큰 여인이었기 때문에 평범한 사내는 눈에 차지 않았다. 권세에 빌붙는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 부잣집 정실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여 초왕을 따르게 된 지금, 비록 첩이라 할지라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그녀는 누군가를 해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백천범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일정한 지위에 오르면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은 자연스레 표출되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그저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더 높은 지위로 오르고 싶었다.
그곳으로 단번에 오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왕야의 세자를 낳는 것이었다. 그리할 수만 있다면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백천범은 기쁜 마음으로 그녀의 방 단장을 도왔다. 남월각에서 예쁜 화분까지 들고 와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학평관은 그녀에게 따로 시녀를 보내지 않았다. 남월각의 몇몇 노비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으니 백천범에게 보냈던 무수리 중 두 명 정도를 양려낭에게 보내는 게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왕야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으니 양려낭의 신분도 아직은 모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월각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무수리가 낙성각의 시녀가 되었다.
그들은 지위가 올라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남월각에서 두 유모들과 함께 어울리며 나쁜 짓을 배운 그들은 낙성각에서도 여전히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양려낭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없었고, 딱히 신분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왕비보다도 더 별 볼 일 없었던 것이다.
학평관이 있을 땐 두 시녀 모두 착실하게 예를 갖추더니 그가 떠나자마자 양려낭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시녀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방을 정리했고, 좋은 물건이 눈에 띄면 묻지도 않고 가져갔다. 양려낭이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에서 몸종 없이 자란 양려낭은 어떻게 사람을 부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시녀들에게 줄곧 예의를 차렸다. 시녀들은 그녀보다 더 거드름을 피우고 마구 성질을 부려 댔다.
속으로 화를 참고 있던 그녀는 왕야의 분부만 떨어지면 두 시녀와 담판을 지을 작정이었다.
모든 이들이 양려낭과 관련해 초왕야가 어떤 지시를 내리기만을 기다렸지만, 묵용감은 이 일을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매일 조정을 다녀오고 이따금씩 군영을 둘러보는 게 다였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열흘 정도가 지났다.
* * *
백천범은 매일 아침마다 후원의 꽃밭에서 무술과 기마자세를 훈련했다. 그간 가동이 짬을 내 몇 차례 지도해 준 덕분에 새로운 초식도 배울 수 있었다. 그녀는 더욱더 연습에 진지하게 임했고, 연습 후 남은 시간은 양려낭과 노랑이와 함께 저택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날 왕야와 말다툼을 벌인 후, 백천범은 회림각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양려낭이 처음 이곳에 온 날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대청으로 가야 했기에 회림각을 찾았지만, 그 다음부턴 다시 가지 않았다.
하지만 회림각을 지나칠 때마다 양려낭은 발걸음을 멈추고 답답한 듯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백천범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묵용감은 회림각에 자주 오지 말라고 한 것이지 아예 출입을 불허한 것은 아니었다.
백천범이 용기를 내어 양려낭을 이끌고 회림각에 들어섰다. 그런데 회림각 입구를 지키던 어린 머슴은 퍽 난처해했다. 왕비는 들일 수 있었지만 옆에 있는 양려낭은 아직 어떠한 명도 받은 게 없으니 마음대로 들여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슴이 양려낭을 모른다고 착각한 백천범은 그녀를 소개했다.
“이 분은 왕야의 새로운 부인이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구경 좀 시켜 주려던 참이오.”
머슴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굽실대며 말했다.
“그렇다면 소인이 총 관리인 어르신께 직접 두 분을 맞이하시라 전하겠습니다.”
이 일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다고 여긴 그는 학평관에게 책임을 돌렸다.
백천범은 그의 말이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평소 그런 대우를 받아 본 적 없는 자신과는 달리 총 관리인이 직접 맞이하면 왕야가 새 부인을 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평관을 기다리는 동안 백천범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노랑이에게 장난을 쳤다. 그 옆에서 양려낭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옷매무새와 머리를 가다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평관이 문 앞으로 다가와 백천범에게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 오셨습니까? 소인, 왕비 마마께 문안 인사를 올립니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의 새로운 부인을 데려왔어요. 감사하게도 총 관리인께서 이렇게 직접 나와 주셨네요.”
학평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왕야가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거늘, 감히 왕비가 양려낭을 새로운 부인이라 칭하다니. 남을 도우려는 그녀의 마음에 거의 감동할 지경이었다.
학평관은 어리석지 않았다. 묵용감이 지금껏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것은 잊어버린 게 아니라 아예 아무런 마음도 없다는 뜻이었다. 백천범과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던 그는 양려낭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가씨, 왕비 마마께서 이곳의 규율을 말씀드리지 않으셨나 봅니다. 회림각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왕야의 허락을 받아 출입이 가능하신 것이지요. 지금은 왕야께서 계시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으시거든 저에게 말씀하시지요.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눈치가 빨랐던 양려낭은 그의 말에서 중요한 정보 두 가지를 파악했다. 그가 그녀를 아가씨라고 부른다는 것과 그녀에게는 소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
그 말은 그녀를 주인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만 단순히 총 관리인의 개인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왕야의 뜻인지 그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든 그녀가 멋쩍어하며 돌아가려는 찰나,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눈 깜짝할 새에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백천범과 양려낭은 황급히 한쪽으로 비켜섰다. 학평관은 앞으로 나가 예를 갖춰 왕야에게 인사를 올렸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말에서 내린 묵용감은 고삐를 머슴에게 넘긴 뒤, 백천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왕비가 오늘은 어쩐 일로 이곳엘 다 찾아왔소? 본왕은 왕비에게 단짝이 생겨 회림각에는 올 일이 없을 줄 알았소.”
백천범도 그와 말다툼을 한 이후 발걸음을 끊은 지 열흘 정도 되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그리 자주 오는 편은 아니질 않은가?
백천범이 작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언니에게 구경을 시켜 주려고 왔습니다.”
묵용감이 곁눈질로 양려낭을 훑었다. 안타깝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단정한 머리와 은비녀만 보일 뿐이었다. 그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들어오시오.”
백천범은 기쁜 마음에 양려낭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빠르게 걸어가는 묵용감의 힘찬 모습에 양려낭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애정이 넘치는 그녀의 두 눈은 본 백천범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누가 봐도 초왕을 사모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초왕의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언니가 풀어 줄 수만 있다면 그녀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비록 자신에게 매정하게 대하는 초왕이지만 자신도 똑같이 냉정하게만 대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가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으니 뭐라도 꼭 보답을 해야 했다.
묵용감은 문을 들어서며 기홍에게 말했다.
“며칠 전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비단을 가져오너라.”
기홍은 무수리를 데리고 창고로 가 비단을 가지고 돌아왔다.
묵용감은 꽃문양이 조각된 팔걸이의자에 앉아 녹하가 내어 온 차를 마시면서 탁자 위에 놓인 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궁에서 하사하신 것이니 가져가서 옷이라도 몇 벌 해 입으시오.”
그의 말은 조금 모호했다.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천범은 그간 회림각에 드나들면서 한 번도 왕야가 상을 내리는 걸 본 적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저택에 온 양려낭의 체면을 살려 주려고 그녀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백천범이 양려낭에게 눈짓을 보내자 영리한 양려낭은 곧장 왕야에게 사뿐히 절을 올렸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왕야.”
의자에 앉아 있던 묵용감은 손에 쥔 찻잔을 깨부수고 싶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자신에게 주는 것도 모르고 인심 좋게 남에게 다 퍼 주다니!
그는 무표정하게 찻잔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탁자로 다가가 비단 한 필을 골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비단은 색이 너무 수수하니 왕비가 가지도록 하시오.”
백천범도 사양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도 예쁜 색이 더 좋긴 했지만, 몇 년 동안이나 새 옷을 입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비단을 만져 보았다. 부드러운 것이 더워진 날씨에 딱 좋은 옷감이었다. 그녀가 재빨리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왕야.”
자그마한 몸집이 눈앞에서 고개를 약간 숙이자 삐뚤어진 쪽머리가 흔들렸다. 묵용감은 순간 내뱉으려던 말을 삼키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차갑게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소.”
그녀에게만큼은 마음을 모질게 먹지 못하는 그였다.
그도 자신의 무른 마음을 알고 있었다. 매번 그녀에게 마음의 빚이 있을 때마다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그는 흠씬 맞고 온 날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었고, 황궁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땐 그녀를 위해 직접 나서 주었다.
지난번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했을 땐 더 이상 이곳에서 힘든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그녀가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돌아왔고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의 눈과 마음을 찔러 댔다. 그녀 다리에 생긴 상처에 마음이 아팠던 그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해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그런 백천범이 홀로 있는 후원이 쓸쓸하다며 양려낭을 데리고 왔을 때, 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