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학평관은 서둘러 문 앞으로 달려가 묵용감을 맞이했다. 잰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던 학평관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꺼냈다.
“더운 날씨에 말을 타고 오셨으니 분명 더우시겠지요. 목욕물을 받으라고 이를까요?”
묵용감이 곁눈질로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할 말이 있거든 곧장 하여라. 한 번만 더 빙빙 돌렸다간 본왕의 발이 날아갈 것이다.”
학평관도 왕야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미 초왕의 곁에서 십 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니 왕야도 자신을 거의 꿰고 있었다.
다만 가끔 왕야는 학평관이 스스로 털어놓는지 지켜보기도 했다. 끝까지 털어놓지 않는 날에는 지난번처럼 형방에 가 채찍을 맞아야 했다.
그가 몸을 낮게 숙이며 아뢰었다.
“왕야, 다름이 아니오라 지난번 거리에서 구해 주신 아가씨가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자신을 팔기로 했는데 왕야께서 은자를 주셔서 이제 왕야의 사람이 되었다고…….”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일도 나에게 고해야 하느냐? 이렇게 꽉 막혀서야 원, 구슬려서 내보내면 될 것 아니더냐?”
깜짝 놀란 학평관은 몸을 더 낮추었다. 백천범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그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 그녀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간 자신이 곤장을 맞게 생긴 것이다.
“그게… 왕비께서 그 아가씨를…….”
그가 말을 이으며 조심스레 묵용감의 안색을 살폈다.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왕비와 무슨 상관인가?”
학평관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왕비 마마께서 아가씨를 데려오셨습니다. 왕야께서 구해 주셨으니 마땅히 왕야를 따라야 한다고 하시더니 또 무슨 말씀을 하셨더라… 아가씨가 외모면 외모, 몸매면 몸매 부족한 것이 없으니 왕야와 얼마나 잘 어울리겠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가씨를 후원으로 데리고 가시면서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거취를 결정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묵용감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멍하니 서서 물었다.
“왕비가 정말 그리 말하였더냐?”
“소인이 어찌 감히 거짓을 보태겠나이까?”
꼿꼿이 서 있던 묵용감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학평관은 왕야의 성미를 건드려 애꿎은 자신부터 봉변을 당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잠시 후 묵용감이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을 받아 놓거라. 목욕을 한 뒤 그 처자를 좀 봐야겠다. 남월각으로 가서 왕비와 그 처자를 대청으로 불러오너라.”
“예.”
명을 받든 학평관은 서둘러 초왕에게서 멀어졌다.
그는 기홍과 녹하에게 물을 준비하라 이른 뒤 차씨를 불러 후원에 전갈을 보냈다.
묵용감이 목욕간에서 씻는 동안 학평관과 녹하, 기홍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밖을 지키고 있었다. 녹하에게 모든 걸 전해 들은 기홍은 이번 일만큼은 백천범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왕야에게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거늘. 그 선을 넘었다간 어린 왕비가 큰코다칠 게 뻔했다. 기홍은 자신이 백천범에게 이러한 얘기를 미리 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며 스스로를 꾸짖었다.
* * *
차씨가 헐레벌떡 후원으로 달려갔지만 역시나 남월각에서는 백천범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명호로 뛰어갔다. 백천범이 아가씨를 데리고 거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왕비 마마, 학평관 어르신이 전할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목소리에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차씨를 본 그녀는 손 인사를 하며 양려낭에게 그를 소개했다.
“저 사람은 총 관리인의 약삭빠른 시종 차씨예요. 왕야께서 돌아오셔서 우리를 부르시나 봐요.”
그 말에 긴장감이 돈 양려낭은 자신의 옷을 쥐며 얼굴을 붉혔다.
“왕야께서 정말 그렇게 무서우신가요?”
백천범은 양려낭이 안심할 수 있게 말했다.
“언니는 이미 왕야를 만난 적 있잖아요. 왕야께선 절 미워하시니까 저에겐 무섭게 대하시는 거고, 언니한테는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마세요. 어쨌든…….”
초왕의 좋은 점을 말하고 싶었던 그녀는 한참 고민한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어쨌든 왕야께서 때리실 일은 없을 거예요.”
양려낭이 물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때리신 적도 있으십니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왕야께서 여인은 때리시지 않는 것 같아요. 대신 꾸지람은 많이 들었어요.”
양려낭이 말했다.
“여인은 때리지 않는 남자라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닐 거예요. 저희 옆집에 살던 백정 천씨는 매일 밤 부인을 때려서 부인의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거든요. 다음 날 아침이면 부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데 그게 더 가엽지 뭐예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차씨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두 아가씨를 대청으로 모셔 오라고 하십니다.”
그의 말에 백천범이 크게 기뻐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직접 저택까지 찾아왔는데 왕야께서 어찌 돌려보내시겠어요. 방금 얘기한 정원들은 하나같이 다 괜찮은 곳이니까 어디에서 지내고 싶은지 한번 고민해 보세요. 이제 언니가 여기에 묵으면 서로의 처소에 놀러 갈 수도 있겠네요!”
그녀의 말에 차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백천범의 옷자락을 살짝 잡으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왕비 마마, 아직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벌써 그리 말씀을 하시면 아니 될 듯합니다. 왕야께서 거절하시면 어찌하시려고 하십니까?”
백천범은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왕야께서 보자고 하셨는데도 어찌 될지 모르다니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갑게 양려낭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언니, 얼른 가요. 왕야께서 기다리겠어요.”
양려낭은 팔짱을 낀 그녀를 보며 수줍어하더니 잰걸음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대청에 도착하니 학평관이 일찌감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백천범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왕비 마마 오셨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왕야께서 목욕 후 의복을 갈아입고 계시니 잠시 후면 도착하실 듯합니다.”
양려낭을 보기 위해 초왕이 목욕을 한 뒤 옷까지 갈아입다니! 이 일에 더욱 희망이 생기는 듯했다. 백천범은 양려낭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표현이었다.
몹시 수줍었던 양려낭은 행동까지 부자연스러워졌다.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그때, 학평관이 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야께서 납십니다!”
그녀는 황급히 일어나서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검은색 비단 신을 신은 두 발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흑운 무늬가 새겨진 검은색 비단에 어두운 자색 테를 두른 도포 자락이 아래로 내리깐 두 눈 앞에서 펄럭였다.
그녀는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고개만 숙인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에게서 은은히 풍기는 침향나무 향에 더욱 긴장감이 밀려왔다.
옆에 있던 백천범도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았다. 어제 초왕과 말싸움을 벌인 후 대면하는 것이니 조금 민망했다.
묵용감은 백천범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양려낭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양려낭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백천범과는 다르게 단정하게 땋아 올린 그녀의 머리만 보였다.
백천범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자 양려낭도 그녀를 따라 인사를 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 왕야께 문안 인사드립니다.”
묵용감은 흑단으로 만든 팔걸이의자로 다가가 도포 자락을 가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리 예를 갖출 것 없소. 다들 앉으시오.”
차가 올려졌다. 그가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들이켜더니 그제야 백천범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듯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왕비가 후원에 사람을 들이자고 했다던데?”
백천범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왕야께서 언니를 구해 주셨으니 그저 보고만 계셔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금도 그 악질이 날마다 집으로 찾아와 언니를 괴롭힌다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이렇게 찾아온 것이라 합니다. 왕야께서 언니에게 도움을 주셨으니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묵용감이 큰소리로 웃었다.
“끝까지 책임을 지라니. 본왕이 못한 일을 왕비가 대신 해 주는구려.”
초왕의 애매모호한 말에 마음이 조급해진 양려낭은 부끄러움도 잊고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왕야, 부디 소인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 악질 때문에 정말인지 더 이상은 도망칠 곳이 없사옵니다. 왕야께서 그날 소인을 구해 주셨으니 소인의 몸과 마음을 왕야께 바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만일 소인이 내로라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 여기시거든 왕야의 노비로라도 거두어 주십시오. 노비라 한들 왕야를 원망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묵용감은 양려낭의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하더니 갑자기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가 후원에서 지내는 것이 적적한 것이오?”
“물론입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노랑이만 저를 따를 뿐이니까요. 만약 언니가 후원에 온다면 앞으로는 언니랑 같이 어울려 지낼 것입니다.”
“좋소. 그럼 그리하시오.”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앞으로 왕비와 함께 지낼 이가 생겼으니 회림각엔 자주 오지 않아도 되겠구려.”
그는 말을 마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백천범은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가 버린다고? 언니는 여기에 내버려 두고 대체 어찌하라는 것인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동의를 했다는 것이었다. 백천범은 재빨리 양려낭을 일으키며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왕야께서 허락하셨어요.”
이렇게 순조로우리라고 예상치 못한 양려낭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우물대며 말했다.
“하지만 왕야께서… 별로 좋은 기색은 아니신 듯해요.”
“왕야는 원래 그래요. 얼굴만 봐서는 좋고 나쁜 걸 아예 가늠할 수 없거든요.”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학평관에게 물었다.
“이 경사를 어찌 처리할 것이지요? 말씀만 하시면 저도 돕겠습니다.”
왕야가 급히 돌아가긴 했지만 학평관은 그의 어두운 안색을 똑똑히 보았다. 이 일이 어떤 후폭풍을 가져올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양려낭의 여유 있는 두 눈을 바라보며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간 고요하기만 했던 초왕의 저택에 큰 소란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백천범의 간절한 눈빛에 그는 초왕의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소인이 우선 왕야께 여쭤본 후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학평관은 묵용감이 지시를 내릴 것이라 생각했다. 분명 양려낭이 저택에 머물러도 좋다고 말한 건 왕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그는 일언반구도 없이 평소처럼 서재에서 업무를 보다 침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