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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6)화 (45/1,192)

제46화

백천범이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니, 왕야랑 잘 아는 사이예요? 왕야는 금방 토라지는 변덕스러운 분이거든요. 저도 몇 번이나 곤란한 일을 겪었는지 모른다니까요.”

여인의 어깨에 보따리가 들려 있자 백천범이 갑자기 모든 걸 알겠다는 듯 말했다.

“왕야께 언니를 받아 달라고 청을 드리러 온 거죠?”

여인은 백천범의 말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작게 흐느껴 울었다. 자신의 말에 슬프게 우는 그녀를 보고 백천범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언니, 울지 마세요. 할 말이 있으면 저한테 하세요.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꼭 도와드릴게요. 원래 집을 나오면 다 어려운 법이에요. 언니,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얘기 좀 해 보세요.”

여인은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는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저는 참으로 박복한 사람이에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지난달엔 아버지까지 큰 병을 얻어 돌아가셨죠. 하지만 장사를 할 돈조차 없어 몸을 파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생각지 않게 웬 악질의 눈에 들었어요.

그자가 은자를 던지며 저를 그의 집에 강제로 끌고 가려 하지 뭐예요. 하지만 그건 서로가 원하는 일이어야 가능한 일이잖아요. 악명이 자자한 나쁜 놈이었으니 저는 당연히 원치 않았죠. 그런데도 저를 억지로 데려가려고 했어요. 그때 제가 벽에 심하게 부딪혀 하마터면 저도 아버지를 따라 이승을 떠나는 줄 알았어요.”

여자는 그때 생각에 끔찍한지 몸을 떨었다. 그러다 이내 말을 이었다.

“다행히 길을 가시던 초왕야께서 저를 구해 주시고는 아버지 장례를 치를 은량까지 주셨어요. 감사한 마음에 장례를 치른 뒤, 왕야를 따르고 싶었죠. 하지만 초왕야께서 반대하셨어요. 그저 보잘것없는 일을 하신 것뿐이라고 하시면서요.

사실 초왕야의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좋은 분이라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살길이 막막해 죽고 싶다가도 초왕야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뻔뻔스럽지만 이렇게 집 앞까지 찾아온 것이에요. 만약 이곳에 남게 해 주시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할 자신 있어요.”

세상살이가 늘 그렇듯 선한 사람은 이용당하고, 악한 사람은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 이 넓은 세상 어디에서든 불운한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워낙 심성이 착했던 백천범은 이 여인에게서 금세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다. 부모님을 두 분 다 잃은 그녀의 모습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보았다.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 햇빛에 번쩍이는 대문 문고리를 바라보더니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언니, 이름이 뭐예요? 원래 살던 곳은 어디고요?”

“저는 양씨예요. 려낭麗娘이라 불리고요. 양수楊樹마을에 살았습니다.”

백천범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언니, 저랑 같이 들어가요. 제가 지낼 곳을 알아봐 줄게요.”

양려낭이 미심쩍은 듯 말했다.

“저는 아직 아가씨가 누구신지도…….”

백천범이 조금 부끄러운 듯 웃어 보였다.

“저는 뭐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언니가 지낼 곳 정도는 알아봐 줄 수 있어요. 걱정 말고 저만 믿으세요. 앞으로 초왕의 저택에서 지내게 되면 그런 악질들에게 당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예요.”

백천범이 양려낭을 끌어당기며 계단을 올랐다. 고개를 돌려 노랑이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노랑아, 얼른 따라와. 안 그럼 다른 사람이 잡아가서 삶아 먹을지도 몰라.”

노랑이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그녀의 발뒤꿈치를 따라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런 노랑이를 보며 양려낭이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병아리가 참으로 총명하네요. 아가씨가 기르는 것이에요?”

“네, 제가 기르는 병아리예요. 저랑 같이 먹고 자는 각별한 사이죠.”

양려낭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의 애완동물이군요.”

“애완동물이면서 단짝이기도 해요. 노랑이는 저를 언니로, 저는 노랑이를 동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병아리지만 모르는 게 없어요. 사람이랑 다를 게 없다니까요.”

입구에 다다르자 머슴이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왕비 마마, 다녀오셨습니까?”

고개를 든 머슴이 양려낭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분은……?”

“지난번 왕야께서 도움을 주신 양씨 아가씨요. 신경 쓸 거 없소. 내가 총 관리인을 직접 찾아갈 테니.”

머슴이 연신 굽실거리며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깜짝 놀란 양려낭이 백천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가씨가 왕비 마마시라고요? 초왕비?”

머슴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아이고, 눈치도 참 좋으십니다. 우리 왕비 마마께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누군지도 모르시다니요.”

양려낭이 깜짝 놀라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소인 왕비 마마를 몰라 뵈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백천범이 그녀를 일으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저… 아이참, 여기서 계속 지내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어서 가요. 총 관리인께 데려다드릴게요.”

양려낭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초왕야가 백 승상의 아가씨와 혼사를 치렀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분명 단아하고 우아한 대감 집 규수일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있는 왕비는 자그마한 체구에 삐뚤게 쪽을 지고 있었고, 애완동물이라며 병아리를 데리고 다녔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괴이한 이 사람이 초왕비라니……. 도통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양려낭은 자신을 구해 준 초왕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다짐하고 이곳까지 왔다. 초왕야가 위엄 있는 모습으로 불구덩이에 떨어진 자신을 구해 주었을 때 감사한 마음 말고도 간절한 마음이 피어났다. 그렇게 이번 생에 초왕에게 헌신하지 않으면 죽음밖에는 대신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악질인 이강이 불쑥 찾아와 자꾸만 협박을 했다. 염치없는 말이었지만, 초왕의 저택을 찾은 것은 이곳에서 살면 그의 마수가 뻗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양려낭은 초왕비가 지독한 사람일 거라 예상했다. 초왕의 저택에서 아무리 고단한 일을 겪는다고 해도 참고 견디려고 했다. 초왕의 눈에만 들면 힘든 생활은 벗어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수많은 상상을 한 그녀였지만 초왕비가 이렇게 볼품없는 계집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걱정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고 심지어 기쁘기까지 했다.

외모면 외모, 몸매면 몸매까지, 멀쩡한 눈을 가진 사내라면 초왕이 누구를 원할지 뻔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백천범과 함께 총 관리인을 만나러 갔다.

백천범의 이야기를 들은 학평관은 손을 비비며 난감해 했다.

“왕비 마마, 이 일은… 소인 생각에는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택에서 일하는 계집이나 머슴의 일이라면 제가 결정할 수 있지만 이렇게 큰일은 소인의 간이 아무리 크다 한들 곧장 결정을 내릴 수 없사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후원에 그렇게 빈 정원이 많은데도요? 다 왕야의 부인들 처소라던데. 게다가 이렇게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나쁠 게 뭐가 있어요? 총 관리인께서도 한번 보세요. 이렇게나 예쁜데. 외모면 외모, 몸매면 몸매, 왕야와 얼마나 잘 어울려요?”

학평관이 속으로 생각했다.

‘세상이 변해도 한참 변했구나. 왕비가 직접 부군의 첩을 데려오시다니.’

백천범 뒤에 서 있던 양려낭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백천범이 어찌나 목청을 높여 자신을 추켜세우는지 꼭 장마당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내지르는 소리와 비슷했다.

사실 그녀는 마음씨가 착한 왕비에게 살짝 감동했다. 마냥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더니 자신이 초왕야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왕야가 좋은 여인을 맞이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얘기해도 총 관리인이 꿈쩍 않자 백천범이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일단 제가 후원으로 데리고 갈 테니까 왕야가 오시면 물어봐 주세요. 왕야께서 동의하시면 언니가 묵을 수 있게 정원을 단장해 주시고요.”

학평관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어린 왕비는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제 코가 석 자인 줄도 모르고 다른 이에게까지 마음을 쓰다니…….

어젯밤 왕비와 왕야가 한바탕 말싸움을 하는 동안 문밖을 지키고 있던 그는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초왕이 왕비를 내쫓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왕야는 아무런 명도 내리지 않고 서재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침소에 들었다.

아침에도 그는 별말이 없었다. 그제야 이번 소란이 마무리되었다고 여겼건만.

어린 왕비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았다. 초왕의 곁을 오랫동안 지킨 그였지만 목소리를 높여 왕야를 책망하고도 아무런 죗값도 치르지 않은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영광을 얻은 사람은 어린 왕비가 유일했다.

백천범은 양려낭을 끌고 후원으로 향했고, 이 일로 심란해진 학평관은 뒷짐을 진 채 뜰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를 본 녹하가 말을 걸었다.

“아이고, 무슨 근심이 그리도 많으신지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답니까?”

학평관이 한숨을 내쉬며 방금 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깜짝 놀란 녹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 우리 왕비 마마께서는 참으로 마음씨가 넓으십니다. 왕야의 첩을 직접 데려 오시다니요. 어젯밤 왕야와 한바탕 말다툼을 하시더니 간도 같이 커지셨나 봅니다. 왕비 마마를 구하러 가지 않은 일에 왕야께서도 죄책감을 느끼셔서 어젯밤 일의 책임을 묻지 않으신 것이거늘.

특히 왕야께서는 제멋대로 여인을 맞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아 아가씨가 그리 되시면서 왕야의 마음도 이미 닫힌 것이나 다름없는데 말이지요. 황제 폐하께서 정하신 혼사만 아니었다면 왕비 마마께서도 이곳에 오실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혼사마저도 왕야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데 이렇게 여인까지 데려오시면…….”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 이번 일은 아무리 왕비 마마라 해도 힘들 것 같습니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학평관이 깊은 수심에 잠겼다.

“그래서 지금 이 일로 고민을 하고 있었지요. 왕비 마마의 마음씨는 참으로 곱지만……. 가여운 왕비 마마… 자신이 무슨 화를 불러오는지도 모르시고.

이 문제로 누가 감히 왕야의 화를 감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왕야께서 마음이 넓은 분이었다면 그동안 이곳으로 보내진 아가씨들로 후원이 넘쳐났겠지요.”

그때 멀리서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학평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초왕이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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