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묵용감은 얼이 빠진 듯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천범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고개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절 안 좋아하시는 건 잘 알고 있어요. 심지어 싫어하시는 것도요. 그러면 그날 절 구해 주지 않으셔야 했어요. 머리도 빗겨 주시지 않으셨어야 했고, 절 데리고 연회도 가지 않으셨어야 해요. 저잣거리 구경은 더더욱 시켜 주지 않으셨어야 했고요.
제가 왕야를 좋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왕야가 구해 주러 오길 산에서 얼마나 바랐는데요. 은자가 오천 냥에서 오백 냥까지 줄었으니 그 정도는 왕야에게 큰돈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눈이 빠지게 기다려도 돈을 가져오는 사람은 없었죠.
다시 생각해 보니 오백 냥도 좀 많은 듯해서 또다시 절반으로 줄였어요. 근데 왕야께서 뭐라고 하셨죠? ‘줄 돈이 없으니 목숨을 가져가려 하거든 그리하거라’…….”
백천범은 분에 차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요. 왕야께서 절 싫어하신다는 걸요. 그것도 엄청 많이요. 저한테 잘해 주지 마세요. 희망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저는 왕야가 저희 큰오빠같이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라 절 돌봐 주시는 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니었죠. 그저 절 놀리고 장난치신 거에 불과했어요. 제가 아직 어려서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 거겠죠!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왕야께 제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 잘 알았으니 앞으로 절 가엽게 여기실 거란 과분한 기대 따위는 하지 않을 거예요! 저를 쫓아내시든 죽이시든 다 왕야의 뜻에 따를게요.”
낭랑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야무지게 내뱉는 말에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던 묵용감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그도 어찌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커다란 바위가 심장을 누르는 듯했고, 무거운 발걸음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천천히 한 걸음씩 발을 떼며 그가 서재로 향했다.
그는 팔걸이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녹하가 조심스레 들어와 등잔에 기름을 더해 불을 붙이고, 향까지 피운 뒤 다시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그녀가 문 앞에서 뒤를 돌아 묵용감을 보니 마치 혼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백천범의 말이 그에게 제법 큰 충격을 준 듯했다. 녹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문 앞을 지켰다.
어떤 때는 무심코 한 행동이 상대방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때때로 그 흔적은 뿌리를 내리거나 싹을 틔우기도 했다. 왕비가 겪은 상황에서 매정하게 대한 것은 확실히 심한 상처였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어린 왕비가 정말 가여웠다.
지금껏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그였지만, 마음속 진솔한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천범이 말한 착각할 만한 일들은 그저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마음을 많이 쓰지도 않은 일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녀를 구하러 올 줄 알았다지만, 하! 대체 무슨 근거로? 아무것도 아닌 그 보잘것없는 일들을 해 주었다고 해서? 그녀는 분명 백여름의 딸이니 자신의 신분을 잊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탁자를 툭툭 치려고 손가락을 굽혔다. 탁자를 치는 건 그가 생각에 잠길 때 늘 습관적으로 하던 행동이었지만 손가락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바라보니 부드럽고 따스했던 그녀의 촉감이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그녀는 백여름의 딸이기도 했지만 어린아이기도 했다. 집안사람들에게 늘 천대만 받던 아이가 몇 차례 따뜻함을 느꼈다고 크게 감격하여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여긴 것이다. 이번 일로 그녀가 상처를 받은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어쩐지 돌아오자마자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라니……. 정말 그가 잘못을 한 것인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그가 차를 올리라 분부했다. 녹하가 차를 내와 조심스레 탁자에 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왕야, 방금 우려낸 것입니다. 뜨거우니 조심하십시오.”
묵용감은 최상급의 도자기 찻잔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녹하야, 내가 왕비를 구하러 가지 않은 게 잘못된 것이냐?”
* * *
그날 밤, 백천범은 남월각으로 돌아와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웅크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사실 산에서 모든 것을 깨닫고 난 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이런 상황까지 와 버린 것이었다.
대체 담이 얼마나 크길래 감히 초왕야와 말다툼을 벌였단 말인가?
그때 문 앞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녀가 목소리를 잔뜩 깔고 물었다.
“누구냐?”
이내 가볍게 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살며시 문 앞으로 다가갔다.
“노랑이니?”
문밖에서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문을 열자 노랑이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발 주위를 맴돌았다.
백천범은 문을 닫고 노랑이를 품에 안았다. 등불 아래에서 꼼꼼히 살펴보니 털엔 윤기가 흘렀고, 눈이 맑았다. 노랑이가 밥을 굶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노랑이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노랑아, 언니 보고 싶었어? 나는 엄청 보고 싶었는데. 내가 있던 곳에도 닭이 있었거든. 매일 모이를 주다 보니까 네 생각이 났어. 잘 지내는지, 먹을 게 부족하진 않은지 말이야. 그리고 혹시 누가 괴롭힐까 봐 너무 걱정이 돼서 다시 돌아왔지.
노랑이 정말 대단하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데도 씩씩하게 잘 지내다니. 그건 언니랑 많이 닮았네? 역시 가족 아니랄까 봐, 히히.”
그녀는 노랑이를 더 꽉 껴안고는 노랑이의 머리에 얼굴을 비비며 즐거워했다.
“오늘 내가 초왕한테 죄를 지어서 내일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 내가 없어도 혼자 잘 지내야 돼. 알겠지?”
노랑이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천범이 웃으며 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보 같긴. 늦었다, 어서 자자.”
노랑이가 온 뒤 백천범은 늘 노랑이와 함께 잤다. 그녀가 이불을 덮고 누우면 노랑이가 베개에 기댔다. 처음엔 침대에 실수를 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노랑이는 똑똑했다. 볼일이 보고 싶으면 늘 밖으로 달려가 흙 위에서 깨끗하게 처리했다.
백천범은 노랑이 덕분에 더 깊게 잠들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에 힘이 넘치는 듯했고, 정신이 맑으니 자연스레 기분도 더 좋았다.
어젯밤 일이 기억나 감히 회림각에 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혹여 묵용감에게 괜한 일이라도 당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랑이를 데리고 먹을 것을 구하러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관리인 안덕수가 그녀를 보더니 허둥지둥 달려와 인사를 올렸다.
“왕비 마마, 간밤에 평안하셨는지요? 오늘 아침엔 무슨 음식을 드시고 싶으십니까?”
먹는 얘기에 백천범은 금세 기운이 났다. 그녀가 부엌에서 나는 음식 냄새를 열심히 맡으며 물었다.
“어떤 게 있는데요?”
“특별히 왕비 마마를 위해 만두를 쪘습니다. 드셔 보시지요.”
어제 왕비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온 저택에 퍼졌다. 안덕수는 왕비가 부엌으로 올 것을 예상했고, 특별히 만두를 쪄 놓으라고 일러두었다.
역시나 백천범은 신이 나서 말했다.
“좋죠! 고마워요, 안 관리인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왕비 마마.”
안덕수가 안으로 드시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소인이 특별히 이곳의 방을 비워 정리해 두었습니다. 왕비 마마의 식사 공간으로 쓰시지요. 안으로 드셔서 천천히 드십시오. 두유와 짠지, 수제비도 있으니 마음껏 드십시오.”
백천범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참, 안 관리인께서 정말 세심하게 준비하셨네요. 고생하셨어요.”
“그저 제가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왕비 마마께서 이리 예를 갖춰 말씀해 주시니 제가 더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백천범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크지 않았지만, 꽤 잘 정리되어 있었다. 홍갈색 팔선상이 정중앙에, 그 앞쪽으로 네 개의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안덕수가 곧장 음식을 내어오라 지시했다.
부엌에서 내온 음식은 기홍이 만든 것처럼 정교한 멋은 없었다. 하지만 어찌나 손이 큰지 커다란 접시에 가지런하게 쌓아 올린 만두가 뜨거운 김을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백천범은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흔들며 이가 다 보이도록 활짝 웃었다.
백천범은 밥을 먹을 때 누군가 쳐다보고 있는 걸 싫어했다. 꼭 자신을 감시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래야 마음 편히 허리춤을 풀고 즐겁게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모두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밥을 먹으면서 노랑이도 잊지 않았다. 만두피를 잘게 잘라 바닥에 던지면 노랑이가 신나게 쪼아 먹었다. 오늘 아침은 백천범과 노랑이 모두에게 제법 만족스러운 끼니였다.
배불리 먹고 난 뒤,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그리곤 앞뜰을 거닐기 위해 방을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이 저택 입구까지 향했다. 그날의 떠들썩했던 거리를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문지기 머슴이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 외출을 하시려는 것입니까? 소인이 총 관리인 어르신께 말씀드려 가마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백천범은 학평관에게까지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여기 서 있으려는 것이오.”
그녀는 문턱을 넘어 저 멀리 시끌시끌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호기심이 많은 노랑이가 그녀를 따라 나오더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백천범이 급히 따라 내려가며 말했다.
“노랑아, 멀리 가면 안 돼. 어서 돌아와.”
막 계단을 내려오니 어떤 여인이 백천범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아가씨, 말씀 좀 물을게요. 여기가 초왕의 저택인가요?”
백천범이 말했다.
“네, 여기가 초왕의 저택이에요. 누구를 찾으세요, 언니?”
여인이 부끄러운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초왕야를 뵈러 왔어요.”
참으로 드문 일이었다. 초왕의 악명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평범한 여인이라면 숨어도 부족할 판국에 제 발로 직접 찾아오다니?
백천범이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죠. 초왕야께서는 조정에 가셔서 지금은 저택에 안 계셔요. 이따 다시 오시는 게 어때요?”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는 여기서 기다리면 됩니다.”
백천범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언니, 초왕야를 왜 만나러 왔는지 물어봐도 돼요? 왕야는 성질이 고약하니까 저한테 먼저 말해 주세요. 그럼 저도 같이 고민해 볼게요. 왕야를 만났을 때 제대로 고하지 못하면 성질을 내실지도 모르거든요.”
여인이 의심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아닐걸요, 제가 본 초왕야는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