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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4)화 (43/1,192)

제44화

“왕비의 식사를 잘 보필하거라. 날 따라올 필요 없다.”

기홍과 녹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음식이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백천범이 입고 있던 옷은 심하게 더러웠기 때문에 기홍이 무수리에게 빨아 놓으라고 일러둔 상태였다. 기홍은 자신의 옷을 꺼내 백천범에게 주었고, 백천범은 허리를 바짝 조이고 소매를 걷어 올려 자신의 몸에 맞게 입었다.

기홍은 의사의 말대로 미음을 끓여 왔다. 우선 미음부터 먹은 다음에 밥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백천범은 미음 그릇을 들고 한 번에 입 안으로 다 쓸어 넣었다. 입 안에 미음이 가득해 말을 할 수 없던 백천범은 빈 그릇을 뒤집어 기홍에게 보여 주었다.

기홍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다.

“왕비 마마, 천천히 드시어요. 시간도 많은걸요.”

백천범은 입 안에 있던 미음을 꿀떡 삼켰다.

“날이 벌써 어두워졌는걸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배가 고파 쓰러질 만도 하죠. 어서 다시 보충을 해 줘야 해요.”

기름진 요리를 올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기홍은 특별히 담백한 반찬들을 준비했다. 백천범이 밥을 반쯤 먹었을 무렵 배가 얼추 차자 그제야 조금 아쉬운 듯 말했다.

“닭백숙이랑 닭고기 볶음, 족발이 없는 게 조금 아쉽네요.”

녹하가 백천범을 흘겨보며 말했다.

“아유, 왕비 마마는 입맛도 참으로 좋으십니다. 이 음식들을 내오기 전에 진작 알았더라면 기홍이 만들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죠.”

기홍이 자신을 위해 특별히 담백한 음식을 만든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가 조금은 겸연쩍은 듯 말했다.

“기홍 언니가 만들어 준 건 다 맛있죠.”

“왕비 마마께서 드시고 싶은 것들은 소인이 내일 다 만들어 드릴게요.”

기홍이 국을 한 그릇 더 담아 백천범에게 내어 주었다.

“내일 많이 드시려면 오늘 밤에 푹 주무셔야 돼요. 몸을 회복하셔야죠.”

백천범이 국을 후루룩 마시며 말했다.

“오늘 오후 내내 잔 덕에 정신이 이렇게나 말똥말똥한걸요. 적어도 해시亥時까지는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그때 또 배가 고플까 봐 걱정이에요.”

“배가 고프시면 소인이 왕비 마마께 밤참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좋죠! 그럼 이따가 언니가 좀 만들어 주면 안 될까요? 남월각으로 돌아갈 때 들고 갈게요.”

“그렇게 미리 만들면 다 식어서 아니 됩니다. 왕야께서도 늦게까지 공문을 보시느라 밤참을 드시니 그때 왕야와 함께 드셔요.”

백천범은 마지막 남은 밥 한 톨까지 비운 뒤, 트림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절대 안 돼요. 왕야와 저는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이니 같이 먹을 수 없어요.”

녹하는 백천범의 말이 우스워 그녀를 놀려 댔다.

“아이고,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니요.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왕야와 왕비 마마는 엄연히 부부입니다!”

방금 묵용감이 한 말이 떠오른 백천범은 불쑥 궁금한 것이 떠올랐다.

“기홍 언니, 왕야께서 혹시 무슨 절망을 겪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기홍이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런 걸 물으시는 것인지요?”

“왕야께서 이번 생에는 처를 들이지 않을 거라 하셨어요.”

녹하가 웃으며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는 왕야의 처가 아니십니까?”

“아이참, 전 지금 진지하다고요. 제일 이상한 건 그게 제 아버지와 관련이 된 일이래요.”

기홍은 비통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왕야께서도 참으로 불운한 분이십니다.”

백천범이 그녀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네요. 얘기해 줘요, 언니. 왕야가 어느 집 아가씨를 좋아했는데요? 그 아가씨는 왕야의 악명이 무서워 도망간 것이에요?”

“황보 어르신의 가문…….”

기홍이 말을 꺼내려 하자 녹하가 기침을 하며 말을 끊었다. 기홍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 이 일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왕야께서 들으시기라도 하면 이 하찮은 목숨이 금방 날아갈 것입니다.”

초왕야가 엄격한 규율로 자신의 수하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백천범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마음대로 추측했다.

“설마 그 아가씨가 저희 아버지를 좋아한 거예요? 그래서 초왕과 저희 아버지가 원수지간이 되었군요? 하지만 아버지는 쉰이 넘으셨고, 초왕야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는데… 그 아가씨도 참…….

초왕야에 대한 소문이 나쁘긴 해도 인물이 좋은 편이긴 하잖아요. 하지만 저희 아버지도 엄청 자상하시긴 해요. 여섯째 이모가 그 모습에 홀딱 반했거든요. 아, 그러니까 그 아가씨는 낭군을 선택할 때 외모나 재능, 재력보다는 자신을 더 아껴 주는 사람을 찾은 거군요!”

백천범의 말이 우스웠던 녹하는 일부러 짓궂은 질문을 했다.

“아버지께서 여섯째 이모를 어찌 그리 반하게 하셨답니까?”

“저희 아버지가 여섯째 이모의 눈썹을 그려 줬어요. 그것도 엄청 꼼꼼하게요. 눈썹을 다 그린 다음에는 입술에 뽀뽀를 하고…….”

“아이참, 그만하십시오.”

기홍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왕비 마마는 이미 혼례까지 치른 왕비 마마이신데 어찌 이리 입조심도 하지 않으십니까! 무슨 말씀이든 이리 다 내뱉으시다니요.”

말을 마친 기홍이 이번엔 녹하를 나무랐다.

“너도 그래. 어린 왕비 마마께서 잘 모르시는데 막을 생각은 않고 일부러 더 놀려 대다니.”

녹하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나를 탓할 게 뭐 있어. 우리 왕비 마마께서 어리긴 하셔도 아는 게 많으셔서 그런 거지. 앞으로 우리도 왕비 마마한테 많이 배워야겠다.”

백천범은 자신이 녹하에게 큰 웃음을 준 것 같아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에 탄력을 받은 백천범이 이야기를 더 꺼내려는데 묵용감이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하는 것이냐? 본왕도 어디 들어나 보자.”

방 안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기홍은 조금 당황한 듯 눈을 내리깔고만 있었다. 그나마 담력이 좋은 녹하가 옅은 미소를 띠며 그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그를 보자마자 얼굴을 굳히고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먹어 치운 탁자 위의 빈 접시들을 훑고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다행히 입맛은 여전한 듯했다.

“어찌 아무 말도 않는 것이냐? 본왕이 흥이라도 깬 것이냐?”

녹하가 미소를 띤 얼굴로 재빨리 말했다.

“왕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여자들끼리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눈 것뿐입니다. 사실 말씀드리지 못할 내용은 아닙니다. 왕비 마마께서 저와 기홍에게 신랑감 고르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외모나 재능, 재력보다 부인을 진심으로 아껴 주는 사람이 가장 좋다고 하셨습니다.”

묵용감이 눈썹을 한 번 치켜세우더니 탁자 근처에 앉아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는 경험자라 아는 게 많나 보오.”

백천범의 마음속에는 계속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가 보내온 서신에 크게 상처를 받아 쉽게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까만 눈동자로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왕야께서 보시기엔 제 말이 틀렸나요?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고, 권력이 막강하다 해도 그런 것들은 아무 데도 쓸모없는걸요.

착한 마음씨가 없으면 낭패입니다. 아껴 주지 않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내가 사라져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내도 있으니까요. 이런 낭군은 없는 것만 못하지요.”

백천범의 말에 기홍과 녹하가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었다.

묵용감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냉소 어린 표정으로 백천범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왜 돌아온 것이오? 내가 그런 지아비인 걸 알면서 왜 굳이 돌아왔단 말이오?”

이번엔 백천범의 말문이 막혔다.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증오로 가득 찼다. 반성도 하지 않고 도리어 저리도 기세가 등등하다니. 역시 군신이라 불릴 만했다.

사람의 도리도 지키지 않는 냉혈한에게 세상 어느 여인이 시집을 오고 싶어 할까? 평생 홀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백천범이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던 묵용감은 그녀가 자신의 말에 대꾸가 없자 의기양양해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이 가련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어찌하겠어요. 초왕의 저택에 시집을 온 이상 죽어서도 이곳의 귀신이 되어야 하는걸요. 돌아오지 않으면 제가 어딜 갈 수 있겠어요?”

“그 말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왔다는 것이오?”

“시집온 첫날 말씀드렸잖아요. 언니들이 시집오기 싫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못난 제가 왔다고요.”

묵용감은 솟구치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다들 시집을 오고 싶어 하지 않아 가장 모자란 아이가 왔다니! 그의 말투에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가 치솟은 그는 오히려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왕은 강요 따윈 하지 않소. 더 이상 이곳에 머물기 싫다고 하니 본왕이 서신 한 통을 써 보내겠소. 기홍아, 붓과 먹을 가져오너라.”

묵용감의 말에 기홍이 다급히 그를 말렸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며칠간 고생을 너무 많이 하신 탓에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으시는 것이옵니다.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옵소서.”

녹하는 백천범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 그만 하십시오. 오늘 왕비 마마께서 쓰러지셔서 왕야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는데요. 급히 의원을 부르시고 저와 기홍에게 상처는 없는지 살펴보라 하셨습니다. 게다가 연고까지 사서 발라 주신걸요.

이런 세심한 마음도 보기 드문 것이지요. 소인이 회림각에 머문 긴 시간 동안 왕야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관심을 두신 적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녹하의 말에 묵용감은 수치심까지 더해져 더욱 성을 냈다.

“본왕도 왕비가 밖에서 고생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저 가여웠을 뿐이다. 헌데 끝까지 기어오르려 하는구나!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이냐!”

백천범 역시 끝장이라도 보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묵용감에게 소리를 질렀다.

“절 가엽게 여기신 분이 줄 돈이 없으니 목숨을 가져가라고 하셨습니까? 제 목숨조차 버리신 분이 대체 뭐가 가엽다는 것인지요?”

묵용감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백천범은 너무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흉부가 격하게 들썩였다. 꼭 작은 들짐승처럼 끊임없이 숨을 몰아쉬며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냉랭한 그녀의 시선에 묵용감이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설마 도적떼가 보여 준 것인가? 아니면 처음에 예상했던 것처럼 모든 게 스스로 꾸민 짓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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