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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3)화 (42/1,192)

제43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잠들어 있는 백천범의 안색은 창백했다. 가지런히 펼쳐진 손바닥 가운데에는 무엇인가를 힘주어 잡은 듯 쓸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간 묵용감이 봐 왔던 백천범은 늘 기운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렇게 야위고 아픈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의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 미간에 진 옅은 주름을 어루만졌다.

이번 일이 백천범 스스로 꾸민 짓이건 아니건 집을 나가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홍에게 말했다.

“왕비의 몸에 상처가 있나 살펴보거라.”

“예, 왕야. 소인이 잘 살펴보겠습니다.”

묵용감은 방을 나가지는 않고 등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기홍이 헉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묵용감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향했다.

백천범의 다리 안쪽이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무엇인가에 쓸려서 상처가 난 듯했다. 피가 번진 모습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묵용감도 깜짝 놀라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다리 안쪽을 다쳤으니 사람들의 오해를 살 만도 했다. 마음을 졸이던 묵용감도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냉정해야 했기에 직접 허리를 굽히고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던 그가 이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른 게 아니라 말을 타다 안장에 쓸린 상처였다. 그의 사병들도 처음 말을 탈 때 이런 상처가 생기곤 했다. 다만 어린 여자아이의 살갗이었기 때문에 더 심하게 상처가 난 듯했다.

그는 손으로 상처 부위를 매만졌다. 부드럽고 따스한 살갗 위에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담담한 그녀의 눈매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외모였지만 피부결이 참 고왔다. 백옥 같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피부였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그녀의 얼굴을 한차례 꼬집었다. 역시나 비단결처럼 보드라웠다. 진지하지 못한 그의 행동은 마치 어린 여동생을 꼬집고 괴롭히면서 동생의 짜증스런 모습을 즐기는 오빠 같았다. 단순히 그녀를 어린아이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백천범은 깊은 잠에 빠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묵용감의 장난기는 끊이지 않았다. 얼굴을 꼬집은 뒤엔 코끝을 한 번 꼬집었다.

감히 자신에게 성질을 부렸겠다. 그는 백천범이 깨어나면 꼭 훈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홍과 녹하는 한쪽에 서서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왕야께서 왜 저러신단 말인가? 왕비가 깨어나기 전에 사심이라도 채우려는 것인가?

그러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나자 묵용감은 재빨리 백천범의 속바지를 정리해 주고 이불을 정성껏 덮어 주었다.

학평관이 의원을 모시고 방으로 들어섰다. 종종 초왕의 저택에 문진을 오는 유일첩劉一貼 의원이었다. 그는 금성대로에 약방을 차리고 직접 문진까지 보았다. 저택에서 누군가 잔병치레를 할 경우 늘 그를 부르곤 했다.

유일첩은 초왕에게 인사를 올리고 침대 앞으로 향했다. 그가 맥을 짚기 편하도록 기홍이 백천범의 손목을 들어 올렸다.

유일첩이 두 손가락으로 백천범의 맥을 짚었다. 잠시 온정신을 진맥에 집중했다. 그러다 백천범의 눈꺼풀을 뒤집더니 이내 결론을 내린 듯했다. 그가 초왕에게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했다.

“왕야, 이 아가씨는 원기가 부족하십니다. 배 속에 힘이 하나도 없는 데다가 피로가 심하게 누적되어 이리 쓰러지신 것입니다. 약을 지을 필요는 없고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생강을 넣은 미음을 차려 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미음을 드신 다음 제대로 끼니를 챙기고, 휴식을 충분히 취하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의원의 말에 마음이 놓인 묵용감은 다시 그에게 물었다.

“말을 타다 다리도 쓸린 듯하오. 상처에 바를 연고 같은 건 없소?”

그렇지 않아도 유일첩이 직접 제조한 상처 연고는 이미 이름이 나 있었다. 종기, 부스럼, 짓무른 피부, 피가 멈추지 않는 상처 등에 그의 연고만 며칠 바르면 잘 아물었다.

왕비의 다리는 유일첩이 직접 살펴볼 수 없었다. 그는 말을 타다 쓸린 상처라는 말에 어림짐작으로 자신의 견해를 고했다.

“어린아이들이 바르는 환옥고還玉膏라는 연고가 있습니다. 상처 부위가 잘 아물고 새살이 돋는 데 제격이지요. 사흘 정도 바르면 흉 하나 남지 않을 것입니다.”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초왕의 인사를 받자 유일첩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전에도 초왕의 저택에 문진을 오긴 했지만 회림각을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한 초왕을 본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늘 문진을 본 계집아이는 초왕이 곁을 지키는 걸로 봐선 평범한 아이는 아닌 듯했다. 초왕이 어린 계집과 혼례를 치렀다더니, 저 아이가 바로 소문의 초왕비인 모양이었다.

* * *

백천범이 깨어났을 땐 방에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조금 어두웠다. 그녀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구름무늬 침대 가림막, 꽃무늬 조각이 새겨진 나무 침대, 양쪽으로 드리워진 장막, 침대 옆에 있는 수놓은 의자, 방 한가운데 팔선상까지…….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이 초왕의 저택에 돌아온 사실과 이곳이 기홍 언니의 방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천천히 몸을 세우던 그녀는 자신이 속바지만 입고 있는 걸 발견했다. 어쩐지 다리가 조금 서늘한 기분이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서둘러 이불을 젖히고 속바지를 걷어 올렸다. 자세히 보니 다리에 거뭇거뭇한 약이 발라져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따스해졌다. 기홍 언니가 발라 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곳에는 그녀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있었다. 기홍 언니와 다른 이에게 자신을 데려와 달라 부탁한 가동까지.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발을 올리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훤칠한 키의 남자가 어둠을 뚫고 그녀 곁으로 걸어왔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백천범은 체형만 보고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초왕이 아니면 이렇게 근엄함이 느껴지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백천범은 침대에 기대 이불을 잔뜩 끌어 올려 몸을 꽁꽁 가리고는 냉랭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실 초왕의 저택에선 자신이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걸 그녀도 모르진 않았다. 또한, 그녀는 미움을 사는 왕비였기 때문에 왕야에게 화를 낼 자격도 없었다.

천천히 걸어 들어온 묵용감이 무심하게 물었다.

“좀 괜찮아졌소?”

“죽을 리는 없죠.”

백천범은 말을 뱉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입단속이 잘 되지 않았다. 조금 걱정이 된 그녀가 묵용감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그의 심기를 건드렸을까 봐 무서웠던 것이었다.

하지만 묵용감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웃으며 말했다.

“죽지 않는 게 가장 좋지. 내 악명이 드높아질 일도 없으니 말이오. 사람들이 왕비가 나에게 온 뒤 조만간 죽을 거라 생각하고 있소.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는 없지.”

백천범은 예전 같았으면 감히 물어보지 못했겠지만, 이왕 이런 얘기가 나왔으니 단도직입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왕야께서는 이제 절 어찌 처리하실 겁니까?”

묵용감은 수놓은 의자에 앉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왕비를 꼭 처리해야 한단 말이오?”

“저는 백 승상의 딸이니까요. 왕야께서 원수의 딸을 계속 눈앞에 두시진 않으시겠죠. 매일 저를 볼 때마다 약이 오르지 않으세요? 저를 처리할 게 아니시라면 곧 쫓아내시겠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으니 제대로 말씀만 해 주세요.”

묵용감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집스런 작은 얼굴 위에 눈빛은 확고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꼭 어딘가 작은 못이 박힌 듯… 따끔거렸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묵용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본분을 잘 지키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만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살아도 좋소.”

내뱉긴 했지만 자신의 말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백천범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백천범을 쫓아낼 구실을 찾고 싶었을 뿐. 이번 납치 사건이 그에게는 좋은 기회였지만 생각지도 않게 백천범이 다시 돌아왔으니 두 번째 기회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말은… 분명 마음속으로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백천범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의 얼굴을 훑었다.

“어떻게 그리하겠어요. 왕야께서 제가 초왕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어요?”

“본왕은 이번 생에 처를 얻지 않을 것이오. 왕비의 자리는 본왕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소.”

백천범이 멍하게 그를 바라보더니 얼버무리듯 말했다.

“이번 생에 처를 얻지 않으신다는 것은 혹 저 때문인가요?”

묵용감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고 두 눈에는 냉기가 흘렀다.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며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 때문이오.”

백천범은 헉 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은 입을 납작하게 벌리고 있는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웠다. 묵용감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한 차례 꼬집었다. 아비의 과오를 자식이 갚는다 했던가? 그 또한 마음속 화가 조금 사라지는 듯했다.

그의 손은 정말 매웠다. 백천범은 아야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로 하면 되지 왜 꼬집는 거예요? 어린 아가씨한테까지 이렇게 독한 수법을 쓰다니.”

묵용감은 잠시 권위적인 모습을 벗어 던지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솟구쳐 오르던 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았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씩씩거리는 백천범의 모습이 참으로 재미있었다.

“이게 독한 수법이오?”

묵용감이 손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언제 한번 형방에 데려가리다. 진짜 독한 수법이 무엇인지 볼 수 있을 것이오.”

얼굴을 문지르던 백천범이 손을 내려놓았다. 그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그녀의 얼굴 위에 생긴 붉은 자국만 바라봤다.

“방에 들어와 불을 피우거라.”

묵용감이 큰소리로 외치자 곧바로 대답 소리가 들렸다.

기홍과 녹하는 각각 음식과 등불을 들고 왔다. 사실 일찌감치 준비를 마쳤지만 왕야와 왕비의 대화를 방해할 수 없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등불이 놓이자 한순간에 방이 환해졌고, 백천범의 얼굴에 남은 붉은 자국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깜짝 놀란 기홍이 그녀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어디에 부딪히셨습니까?”

조금 찔렸던 묵용감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심코 꼬집었을 뿐인데 그렇게 자국이 남아 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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