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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2)화 (41/1,192)

제42화

사장풍은 서둘러 말에서 내려 그를 노려보았다.

“어서 가서 가마를 가져오너라.”

“예.”

사병은 예를 갖춘 뒤 뒤를 돌아 빠르게 뛰어갔다.

사장풍이 백천범을 말에서 내려 주었다. 땅에 발을 디디자마자 백천범이 앓는 소리를 냈다. 두 다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이었다. 비틀거리다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지만, 사장풍이 그녀를 붙잡아 준 덕분에 화를 면했다.

“조심하십시오, 왕비 마마.”

“괜찮아요.”

백천범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그의 팔을 붙잡은 채 발을 몇 차례 굴렸다. 조금은 감각이 돌아오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병은 청피목으로 만든 작은 가마와 가마꾼 두 명을 대령했다. 사장풍은 백천범을 부축해 가마에 태운 뒤, 가마꾼에게 초왕의 저택으로 데려가라 명했다.

옆에 서 있던 사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독이 무엇 하러 자신의 약혼녀를 초왕의 저택에 보낸단 말인가?

백천범이 재차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가마의 발을 내리고 가마꾼들이 가마를 들어 올리자 사장풍이 예를 다해 인사를 올렸다.

“조심히 가십시오, 왕비 마마.”

사병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어린 계집아이는 약혼녀가 아니라 초왕비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관을 한 번 바라본 뒤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독 나리가 초왕비와…….”

* * *

가마가 금성대로로 들어서자 백천범은 만감이 교차했다.

한 달여 전, 꽃가마를 타고 이 길을 지나 초왕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이 길에서 납치를 당했다. 그런데 지금은 또다시 가마를 타고 이곳에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초왕의 저택이 자신의 집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가 며칠이나 납치를 당했는데도 초왕의 반응은 싸늘했으니 자신을 싫어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난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이토록 넓은 땅덩어리에 그녀가 편히 살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또다시 마음이 시큰해진 백천범은 아직 저택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가마꾼들을 멈춰 세웠다. 혼자 저택에 들어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야 문 앞에서 거절을 당한다 해도 혼자만 망신을 당할 것이었다.

몇 걸음 걸어가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말을 타고 왔으니 뱃가죽이 등에 붙은 건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녀는 유독 배고픔을 참지 못했다. 한번 배가 고프면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먹을 걸 지니고 다녔지만 우두산에 모든 걸 두고 온 지금은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천천히 걷던 그녀가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라 측문으로 향했다. 측문을 지키는 머슴은 웬 계집아이가 한눈을 팔다 문에 부딪히는 줄 알고 호통을 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것 같았다. 왕비를 본 적 없지만, 소문으로 전해 듣던 왕비의 모습과 꽤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왕비 마마께서 오신 것입니까?”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백천범도 머슴을 바라보았다. 머슴이 자신에게 성을 내려는 것 같지 않자 그녀는 그렇다고 짧게 대답하고는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들어섰다.

머슴이 곧장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모셔다 드릴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머슴은 백천범의 대답도 듣지 않고 뒤로 돌아 가더니 다른 머슴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에게 백천범을 지켜보라는 것이었다. 왕야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었던 머슴은 우선 상부에 보고부터 한 뒤 지시를 따를 생각이었다.

머슴이 쏜살같이 회림각으로 향하던 중 중문에서 학평관의 시종 차씨와 마주쳤다. 차씨는 뛰어다니는 머슴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그는 늘 거드름을 피웠다.

“어찌 그리 헐레벌떡 뛰는 것이냐? 왕야께서 점심식사 중이시거늘. 가서 부딪히기라도 하려고 그러느냐?”

머슴은 빠르게 왕비가 온 소식을 전했다. 차씨는 아무 대꾸도 없이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머슴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헐레벌떡 뛰지 말라고 하더니! 본인은 더 날쌔게 뛰어다녔다. 저러다 왕야의 식탁까지 날릴 기세였다.

* * *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묵용감은 여유롭게 국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때 차씨가 허겁지겁 뛰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고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셨다 합니다.”

깜짝 놀란 묵용감은 들이켠 국을 입 밖으로 뿜었다. 기홍이 서둘러 수건을 꺼내 닦아 주었다. 하지만 그녀도 어찌나 놀랐는지 손을 파르르 떨 정도였다.

왕비가 납치된 후 초왕야의 태도는 분명했다. 아예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왕비를 다시 받아 줄지는 불확실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답변만 기다렸다.

몇 명은 마음을 졸이며 걱정했고, 몇 명은 아무런 심경의 변화도 없었다. 일순간 주변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한동안 말이 없던 묵용감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왕비가 어찌 온 것이냐?”

그는 꼭 출가한 여동생이 친정에 온 듯한 말투로 물었다.

학평관은 그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입을 열고 싶어도 급박한 사안인 것 같아 말을 아끼고 기다리는 게 더 좋을 듯했다.

“뭘 빤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냐? 어서 왕비를 맞이하거라.”

묵용감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가 저리 나올지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학평관은 꿈에서 깨기라도 한 듯 탄식을 내뱉고는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차씨에게 자신이 가마를 준비할 테니 우선 대문으로 가 왕비 마마를 모시고 있으라고 분부했다.

한쪽에 서 있던 기홍과 가동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고, 녹하와 영구도 한시름 놓은 모습이었다. 돌아온 왕비를 받아 주는 걸 보면 왕야도 그리 몰인정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쏜살같이 대문으로 뛰어간 차씨는 아무도 보이지 않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을 지키던 머슴에게 호통을 치려는 찰나, 머슴이 그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백천범이 벽에 몸을 기대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차씨는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왕비 마마,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습니까? 송구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가마를 곧 대령할 것입니다.”

백천범은 배도 고프고 피곤한 데다가 다리에 난 상처까지 계속 따끔거렸다. 그녀는 제대로 말할 기운이 없어 겨우 한 마디만 물었다.

“왕야께서 제가 돌아온 걸 아시는지요?”

“아십니다. 왕비 마마가 돌아오셨다는 말에 기뻐하시면서 곧장 왕비 마마를 맞이하라고 학평관 어르신을 보내셨습니다.”

기뻐한다고? 그럴 리가. 백천범은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 그녀가 돌아오길 바랐다면 그런 서신을 보낼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평관이 가마꾼들과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멀리서 백천범에게 예를 갖추더니 거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우리 왕비 마마님. 돌아오셨군요. 도적들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소리에 다들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왕야께서도 어찌나 초조해하시던지 제대로 식사도 하시지 못하셨답니다. 소인도 온종일 잠에 들지 못하고 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돌아오셨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옆쪽으로 물러나 있던 차씨는 학평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보통 노인이 아니라니까. 남을 속이는 일에는 거의 도가 텄구나…….’

백천범도 그의 뻔한 거짓말을 꿰뚫어보고 있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차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력이 없으니 저 좀 일으켜 주세요.”

학평관이 재빨리 몸을 숙여 팔을 내밀었다.

“왕비 마마, 소인을 붙잡고 일어나시지요.”

백천범이 그의 팔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학평관은 그녀가 가마를 탈 수 있게 부축한 뒤 함께 회림각으로 향했다.

가마에 탄 백천범은 정신이 혼미해져 어디로 가는지 물을 겨를도 없었다. 당연히 남월각으로 보낼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그저 간단히 배를 채우고 잠을 자고 싶었다. 산에서 한나절이나 헤맸고, 요동치는 말까지 타니 심하게 피곤했던 것이다.

가마는 곧장 묵용감이 있는 정자로 향했다. 기홍이 직접 발을 걷어 올리고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 마마, 그간 많이 힘드셨지요?”

말을 마칠 때쯤에는 거의 흐느끼는 듯했다.

정신이 멍했던 백천범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마에서 내렸다. 힘겹게 눈을 뜬 그녀는 앞에 있는 사람이 기홍이란 걸 알아차리자마자 곧장 기홍의 품에 파고들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기홍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작게 흐느꼈다.

“소인도 왕비 마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돌아오셨으니 되었습니다. 배고프시지요? 어서 앉으셔요. 밥을 내어 오겠습니다.”

백천범은 기홍을 안은 손을 풀지 않고 눈물 콧물 범벅을 하며 목 놓아 울었다. 기홍도 그런 백천범을 떼어 놓을 수 없어 가만히 그녀를 다독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묵용감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잠시 후, 그가 헛기침을 하자 백천범은 옷소매로 얼굴을 벅벅 문지른 뒤 고개를 들어 몰인정한 자신의 지아비를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이리 와서 같이 드시오.”

백천범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고개를 든 채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남월각으로 가서 먹겠습니다.”

묵용감은 순간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계집아이가 지금 성질을 부리는 것인가?

맛있는 냄새와 음식만 있으면 걸음을 떼지 못했던 백천범이지만, 오늘은 마음속 가득한 원망 때문에 밥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월각에서는 왕비가 돌아온 사실을 모르니 식사를 준비하지 못했을 것이오. 지금 막 상을 내어 온 것이니 같이 드시오. 우선 배부터 채우고 기력을 회복한 뒤에 돌아가도 늦지 않을 것이오.”

초왕야가 꽤나 온화한 말투로 권하며 호의를 보였다. 하지만 백천범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왕야의 호의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저는 먹는 모습이 보기 흉해 남월각에 가서 먹는 게 편합니다.”

백천범이 묵용감의 호의를 거절하며 체면을 깎자 다들 걱정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표정이 사늘하게 굳어진 묵용감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가 무엇인가 말하려는 찰나, 백천범이 맥없이 쓰러졌다. 옆에 서 있던 기홍이 재빨리 쓰러진 그녀를 안으며 소리쳤다.

“왕비 마마, 괜찮으십니까?”

묵용감도 적잖이 당황했다. 설마 자신이 탁자를 친 것 때문에 놀라서 쓰러졌단 말인가?

한바탕 소란을 겪은 뒤, 백천범은 기홍의 방에 눕혀졌다. 기홍과 녹하는 그녀 곁을 지켰고, 학평관은 문 앞에서 목을 내밀고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서늘한 시선이 느껴지자 그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묵용감과 눈이 마주쳤다.

“뭘 그리 꾸물거리고 서 있는 것이냐! 어서 의원을 불러오라.”

“앗!”

그는 빠르게 달려 나가 문밖의 머슴에게 의원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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