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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1)화 (40/1,192)

제41화

이튿날 아침, 백천범과 같은 방을 쓰던 소녀는 침대에 그녀가 없자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바깥에서 그녀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온 소녀는 탁자 위에서 부서진 은자 조각을 발견했다. 그 옆으로는 대추 과자 몇 개와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깜짝 놀란 소녀는 급히 삼촌들을 불렀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둘째는 뒷마당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조카딸이 헐레벌떡 손에 편지를 들고 오자 초왕의 저택이나 백 승상의 집에서 소식이 온 줄 알았다. 그가 서둘러 편지를 받아 읽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모, 둘째 삼촌, 셋째 삼촌, 넷째 삼촌, 언니, 개똥이, 개떡아. 저는 이제 돌아갈게요. 얼마 되지 않지만 돈을 조금 두고 가니 제가 며칠 동안 먹은 식비라 생각하시고 받아 주세요. 대추 과자는 춘계 연회에 갔을 때, 황궁에서 몰래 들고 온 거예요. 맛이 아주 좋으니까 조금씩 맛보세요. 여유가 생기면 또 만나러 올 테니 다들 걱정 마세요.」

소녀는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둘째 삼촌의 표정이 어둡자 초조해졌다.

“둘째 삼촌, 천범이가 편지를 남겨 놓고 떠난 것이에요?”

둘째는 완벽하진 않지만 글자를 읽을 수는 있었기에 대략 백천범이 떠난다는 내용은 알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범이가 떠났구나.”

그녀의 눈이 한순간에 붉어졌다.

“계집애, 어떻게 말도 없이 갈 수가 있어……. 내려가는 길이 많아 산길을 헤매다가 호랑이나 멧돼지라도 만나면 어떡하죠?”

둘째가 허리띠를 바짝 조이며 말했다.

“시간이 이르니 괜찮을 거다. 셋째랑 넷째를 불러서 같이 찾아봐야겠어.”

그때, 부인이 뒷문으로 나오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탁자에 누가 은자 조각을 가져다 놓았대요? 과자도 있고.”

삼촌 앞에서 울음을 꾹꾹 눌러 참던 소녀는 엄마의 목소리에 끝내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 천범이가 떠났어요. 그건 천범이가 두고 간 것들이에요.”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고, 걔도 참. 한마디 말도 없이 이런 거까지 남기고 갔다니. 산에서 내려가는 길도 모를 텐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둘째 삼촌, 나머지 삼촌들이랑 같이 찾아보는 게 좋겠어요.”

안에서 대화를 들은 셋째가 옷을 챙겨 입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나머지 형제들 역시 흩어져 산 아래로 향했다.

한편 잠에서 깬 개똥이와 개떡이는 백천범이 떠났단 소리에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고, 소녀는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부인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백천범이 떠났다고 다들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어 대느라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 * *

백천범은 워낙 길눈이 밝아 한번 왔던 길은 잊는 법이 거의 없었지만, 잡혀 온 날은 기억이 없어 그저 감으로 산을 내려갈 뿐이었다.

우두산은 갈림길이 워낙 많았다. 길을 잘못 들어서면 빙빙 돌다 다시 산 위쪽으로 향하는 길이 나왔다.

백천범도 두 번이나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다시 원래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느라 한나절이나 꾸물거렸다. 산허리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여전히 산 정상보다 더 먼 거리였다.

늦은 봄이었기 때문에 산에는 뱀이나 벌레가 꽤 많았다. 담력이 좋은 백천범이라 해도 뱀만큼은 무서워서 꺾은 나뭇가지를 계속 손에 쥐고 다녔다. 뱀을 마주치면 나뭇가지로 찔러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뱀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나무 뒤에 숨은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쉽게 들키지 않을 그였지만 백천범의 감각에는 소용이 없었다. 주변에 살아 숨 쉬는 무언가가 있으면 결국 그녀의 눈에 띄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숨어 있는 자가 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기에 손에 쥔 나뭇가지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더니, 백천범을 꼼꼼히 훑어보며 물었다.

“초왕비가 맞으신지요?”

백천범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누구세요?”

그 사람이 천천히 걸어왔다. 호리호리한 몸에 짙은 눈썹, 큰 눈에서 기풍이 넘쳐흐르는 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가 갑자기 그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깜짝 놀란 백천범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대체 누구신지요?”

그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저는 구문제독 사장풍社長風입니다. 왕비 마마를 모시러 왔습니다.”

백천범이 의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낸 것이에요? 초왕이요?”

사장풍이 겸연쩍게 웃었다. 그녀가 실망할까 걱정되는 눈치였다.

“초왕야는 아니고 가동이 보냈습니다. 제가 그에게 빚을 진 게 있어서 가동 대신 왕비 마마를 모시러 왔습니다.”

그의 말에 백천범은 크게 기뻐했다.

“사부님이 보낸 거군요. 근데 왜 사부님이 직접 오지 않은 거예요?”

“그게… 가동은 초왕의 호위무사니 주인 곁을 떠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대신 이렇게…….”

가동의 고충은 백천범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을 저었다.

“어서 가요. 갈림길이 많아서 두 번이나 길을 잃었는데 이젠 그럴 일 없으니 다행이네요.”

사장풍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존귀한 왕비가 걷기 힘들까 봐 일부러 천천히 걸었지만, 큰 보폭으로 재빨리 따라오는 백천범의 모습에 그도 마음을 놓았다.

사실 가동이 그를 찾아왔을 땐 이 일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초왕의 수하인 구문제독은 충성을 다하는 신하였다. 초왕의 적은 자신의 적이기도 했기 때문에 괜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가동이 끈질기게 청하지만 않았어도 이곳에 오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왕비를 찾지 못한다 한들 그의 탓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는 대충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중간쯤 올라왔을 때 이렇게 마주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분명 묘한 인연이었다.

가동이 자세히 묘사해 준 덕에 그는 한눈에 백천범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 큰 눈, 작은 체구, 담대함까지. 확실히 담이 크긴 큰 듯했다. 감히 혼자 이 험한 산을 내려오려 하다니, 들짐승들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 마마, 혼자 도망친 것입니까?”

백천범이 짧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냉담한 표정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사장풍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흉악한 도적들에게 납치를 당한 건 분명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악몽일 것이다. 다른 것들은 왕비가 안정을 찾은 뒤에 물어보는 게 더 나을 듯했다. 왕비의 증언만 있으면 머지않아 우두산의 강도들을 잡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초왕비의 용맹함은 높게 평가해야 했다. 누가 구해 주길 기다리지 않고 홀로 도망쳐 나오다니. 정말 영리한 계집이었다.

산을 내려와 사장풍이 나무에 묶어 둔 자신의 말을 풀었다.

“왕비 마마, 말을 탈 줄 아십니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장풍은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께서 말에 타십시오. 소인이 옆에서 말을 끌고 가겠습니다.”

백천범이 물었다.

“여기는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가요?”

“대략 이십 리쯤 될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걸어서 돌아간다고요? 얼마나 걸리는데요?”

“말이 한 필밖에 없는데 왕비 마마께서 말을 탈 줄 모르시니 소인도…….”

백천범이 콧방귀를 뀌었다.

“같이 말을 타고 가면 되잖아요?”

사장풍이 얼굴을 붉혔다.

“소인이 어찌 감히 왕비 마마께 그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무례할 것 없어요. 저는 아직 시집갈 나이도 안 된 가짜 왕비예요. 어서 가요. 빨리 가서 노랑이를 봐야 한다고요. 분명 절 엄청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사장풍은 그녀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짜 왕비라니? 시집갈 나이가 되지 않았다 해도 이미 혼사를 치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노랑이는 또 누구란 말인가?

“얼른 타요.”

백천범이 조급해하며 말했다.

“사내가 이렇게나 진부해서야.”

어린 계집에게 진부하다며 꾸중을 들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장풍은 조금 우스웠다. 백천범은 왕비가 된 지 얼마 안 된 데다가 나이도 어리다는 걸 이미 가동에게서도 들었다.

별수 없이 그는 곧장 말에 올라탔다. 백천범의 뒤에 앉은 그가 고삐를 쥐며 소리쳤다.

“이랴!”

말이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질주하니 온몸이 요동쳤다. 아침으로 대추 과자 한 조각을 먹고 나온 백천범은 갑자기 속에서 역류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우스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애써 참고 견디며 고삐를 꽉 붙잡았다.

사실 사장풍은 그녀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거칠게 몬 것이었다. 방금 전에는 진부하다며 자신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이번엔 부탁을 하겠지?

하지만 백천범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당당한 모습으로 부탁 따위는 하지 않았다. 흥미가 없어진 사장풍은 그제야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길이 평탄하지 않은데도 잘 타십니다. 혹여 참기 힘드시면 말씀하십시오. 말을 끌고 걸어가도 됩니다.”

백천범은 이를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저었다.

시골길을 벗어나자 길이 평탄해졌다. 심하게 흔들리는 느낌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속이 조금 나아지자 백천범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얇은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안장에 쓸린 두 다리에 계속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꼭 모래알을 다리에 벅벅 문지르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참다못해 입 밖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를 들은 사장풍이 즉각 속도를 늦췄다.

“왕비 마마, 피곤하십니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피곤한 게 아니라 다리가 아파서요.”

그녀의 말을 바로 이해한 사장풍은 두껍게 깔개를 깔지 않은 자신을 자책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왕비를 데리고 가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말이 달리지 않으면 통증도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므로 결국 그는 속도를 더 늦췄다.

결국 두 사람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성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성문을 지키는 사병은 자신의 상관인 구문제독이 다가오자 먼 거리에서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제독 나리…….”

사장풍 앞에 앉은 계집을 본 그가 서둘러 뒷말을 삼켰다. 아직 장가를 들지 않은 제독이 멀리서 어린 계집을 데리고 오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게다가 피하는 눈치도 아닌 것이 설마 제독의 약혼녀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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