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백천범이 멋쩍어하며 침묵을 깼다.
“저 때문에 삼촌들께서 마음을 너무 많이 쓰셨네요. 제 목숨을 가져가시려거든…….”
둘째가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천범아,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가 그럴 사람이냐?”
“그러니까요.”
셋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오백 냥에 사람 목숨을 앗아가려 하다니. 악랄해도 지독하게 악랄한 여편네네.”
가장 분노했던 건 넷째였다. 어찌나 감정이 격해졌는지 얼굴까지 붉어졌다.
“내일 아예 그 못된 여편네를 납치합시다. 그 여편네는 값이 얼마나 나갈 것 같으냐?”
백천범은 삼촌들의 말에 또 한 차례 죄책감이 느껴졌다. 요즘 들어 그녀는 사람 보는 눈이 썩 신통치 않은 듯했다. 초왕이 자신에게 잘해 준다고 생각했지만, 조금도 아니었다. 또, 우씨 형제들이 돈밖에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에 약한 사람들이었다.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 백천범이 우물대며 말했다.
“삼촌들께서 제게 이리도 잘해 주시니 저 백천범, 절대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이번 생에 다 갚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라도 꼭 갚을 거예요.”
진지하고 신중하게 말을 내뱉는 백천범의 모습에 우씨 형제들은 부끄러워졌다. 둘째가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겸연쩍게 웃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널 납치한 도적인걸. 그나마 양심은 아직 남아 있는 것뿐이야. 돈 때문에 목숨을 해할 순 없지.”
백천범이 말했다.
“삼촌들께서 제게 잘해 주시는 거 알아요. 어쨌든 다들 절 원하지 않으니 아예 여기에 남아 삼촌들 일을 도울게요.”
삼형제가 깜짝 놀라 물었다.
“우리 일을 돕겠다고?”
“어쨌든 저는 백씨 가문의 딸이니까 성 안의 상황은 삼촌들보다 잘 알아요. 저도 계략 짜는 걸 도울게요.”
백천범의 말에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야. 삼촌들이 이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말렸는데. 하지만 듣지도 않고 결국 일을 저지르더니 성공은커녕 이 꼴 좀 보렴. 어린아이는 더더욱 배우면 안 될 일이란다. 왕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게 이것보단 나을 거야.”
백천범이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이모, 여기 있게 해 주세요. 이모가 해 주시는 음식이 너무 좋단 말이에요.”
백천범이 뱉은 말에 부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왔다.
백천범이 먹는 양은 못해도 2인분은 되었다. 그녀가 온 뒤로 항아리에 담아 둔 옥수수가루가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삼형제가 사냥을 해 오지 않으면 더 이상 배를 채울 게 없을 정도였다. 부인은 이 어린 왕비를 서둘러 돌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직설적으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왕비 마마가 여기서 계속 지내면 어째. 누추한 산에서 고생만 할 테니 우선 돌아갔다가 이모가 보고 싶거든 그때 다시 오는 걸로 하자. 어때?”
개똥이와 개떡이가 쏜살같이 달려와 엄마에게 소리쳤다.
“누나도 여기서 살게 해 줘요. 누나 한 명이 더 생기는 건데 얼마나 좋아요.”
부인은 두 아이의 머리에 꿀밤을 때리며 말했다.
“누나가 아니라 왕비 마마야. 어떻게 왕비를 누나로 삼을 수 있겠니?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몰라도, 지금은 꿈들 깨셔.”
백천범이 말했다.
“이모,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왕비라는 거 다 아시잖아요. 초왕의 저택에서는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친정에서는 목숨을 빼앗으면 돈을 주겠다고 하는걸요. 삼촌들이 이번 일로 헛수고를 하셨으니 제가 너무 죄송해서 그래요. 남아 있게 해 주세요, 이모. 일도 열심히 도울게요.”
부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자신의 일을 돕긴 뭘 돕는단 말인가. 하루종일 두 개구쟁이들과 소란만 피울 게 뻔했다.
개똥이는 엄마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주머니에서 부서진 은자 조각을 꺼내 보이며 호탕하게 말했다.
“엄마, 걱정 마세요. 아들이 오늘 돈을 벌어 왔다고요. 누나 한 명쯤은 더 있어도 끄떡없을 거예요.”
부인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이 은자 조각으로 쌀과 밀가루를 사면 코앞의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끓여 온 물을 삼촌들에게 따라 주던 딸아이가 은자 조각을 보며 말했다.
“어머니, 그냥 있게 해 주세요. 앞으로 제가 덜 먹을게요.”
그녀도 백천범이 좋았다. 백천범이 있으면 남동생들을 그나마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삼촌들을 바라봤다. 둘째는 잔뜩 기대에 부푼 백천범의 눈을 바라보며 하는 수 없이 말했다.
“천범이가 가기 싫어하니, 며칠 더 놀게 둡시다.”
넷째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기껏해야 매일 나가서 꿩이나 토끼 같은 걸 잡아 오면 되는걸요, 뭐. 굶어 죽을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이리하여 백천범은 산에 더 머무르게 되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두 남동생과 뛰어다니다가도 함께 무술 연습을 꾸준히 했다. 가동이 가르쳐 주었던 초식과 기마자세를 남동생들에게도 알려 주었다.
늘 제멋대로만 굴던 두 남동생들이 어찌 그 고통을 참을 수 있었을까. 초식은 그런대로 잘 연습했지만 기마자세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그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백천범이 가볍게 곁눈질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가지고 사내라고 할 수나 있겠어?”
말을 마친 뒤, 백천범은 땅에 향을 피우고 기마자세를 취했다. 두 남동생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자 백천범의 표정이 꽤나 무거워졌다. 이마에는 땀이 나기 시작했고, 얼굴은 새빨개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세를 유지했다.
개똥이와 개떡이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뒤 슬그머니 일어나 백천범의 뒤에서 진지하게 기마자세를 했다.
집에서 나온 부인이 아이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줄곧 산만하기만 하던 두 아들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자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서서 아들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느새 딸아이도 나와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정신 사납던 아이들이 스승님을 만났나 봐요.”
부인이 말했다.
“저 애들을 기선 제압할 재간이 있는 걸 보니 왕비는 왕비인가 보구나.”
딸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천범이가 여기에 남으면 어머니의 가장 큰 수고를 덜어 주겠네요! 아무도 천범이를 원하지 않으니 그냥 우리가 받아 준 셈 치죠, 뭐.”
“그러게나 말이다. 저 두 녀석은 제대로 된 일은 하나도 하질 않잖니. 천범이가 애들을 돌보는 데 재능이 있긴 하다만, 그래도 왕비는 왕비이니 여기서 계속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며칠 더 놀다가 둘째 삼촌에게 돌려보내라고 해야겠다.”
개구쟁이 두 형제는 백천범과 정말 인연이라도 있는 듯 항상 붙어 있으려 했다. 게다가 그녀가 무술도 할 줄 알자 더더욱 그녀를 대단하게 여기며 말끝마다 그녀를 사부라고 불러 주었다.
백천범이 말했다.
“사부는 아무렇게나 부르는 게 아니야. 진짜 날 사부라고 생각한다면 예를 갖추고 스승으로 모셔야 돼.”
개똥이와 개떡이는 군말 않고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백천범도 사양하지 않고 바위 위에 앉아 꽤나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너희는 내 제자다. 누가 너희를 업신여기는 일이 있거든 이 사부가 절대 참지 않을 것이다.”
개똥이가 물었다.
“만약에 사부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면요?”
백천범이 빠르게 개똥이를 흘겨보았다.
“겁낼 게 뭐 있니? 내가 못 이기면 내 스승님도 계신걸. 내 스승님은 군신 초왕야를 보필하는 일급 호위무사라고.”
개똥이가 말했다.
“사부님, 앞으로 열심히 배우면 초왕의 군대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럼. 조정에는 나라를 지킬 젊은 청년이 많이 필요하니 열심히만 하면 사병은 물론이고, 장군까지 될 수 있을 거야.”
개똥이가 가슴을 쫙 펴고 호기롭게 말했다.
“나중에 크면 꼭 장군이 될래요.”
개떡이가 말했다.
“형이 장군이면 나는 부장군 할래.”
“그래. 내가 이끄는 사병 만 명 중에서 천 명 정도는 너한테 줄게.”
“왜 천 명밖에 안 줘? 절반은 줘야지.”
“너는 부장군이잖아. 그렇게 사병을 많이 둬서 뭐 해. 너 다 줘 버리면 내가 돋보이질 않는데.”
“그래도 천 명은 너무 적어. 삼천은 줘야지.”
“관둬. 너 같은 코흘리개가 무슨 부장군이야.”
“우씨…….”
개떡이가 주먹을 날렸다. 개똥이는 가볍게 피하긴 했지만, 결국 서로 뒤엉켜 싸움이 나고 말았다.
백천범은 고개를 저으며 굳은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
“멈춰라. 감히 사부 앞에서 싸우다니, 그게 무슨 경우란 말이냐? 향을 꽂고 기마자세를 실시한다. 꾀를 부리는 사람에게 저녁밥은 없다.”
두 형제는 씩씩거리며 기마자세를 하러 갔다. 잔뜩 울상을 짓고 있는 두 아이의 모습에 백천범은 은근히 성취감이 느껴졌다. 자신이 정말 많이 큰 듯한 기분이었다. 잡혀 온 도적 소굴에서 제자를 둘씩이나 거두다니.
* * *
산속에서의 삶은 물 흐르듯 순탄했고 즐거웠다. 두 개구쟁이를 가르치는 것 말고도 닭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닭을 보고 있으면 노랑이가 떠올랐다. 홀로 남월각으로 보내져 괴롭힘을 당하거나 배를 곯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자신도 모르게 풀이 죽었다. 초왕의 저택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홍 언니, 사부님, 노랑이, 명호, 꽃밭까지 떠올랐다.
기홍 언니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하진 않을지, 사부가 자신을 기억하는지, 노랑이가 나쁜 시녀들에게 잡아먹히지는 않았는지 다 궁금해졌다. 명호의 연꽃도 지금쯤 꽃망울이 져 곧 꽃을 피우겠지…….
바위 위에서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는데, 부인이 집에서 나와 둘째 삼촌에게 은비녀를 쥐여 주는 모습을 발견했다. 둘째 삼촌이 받으려 하지 않는데도 그녀는 억지로 그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형수, 이건 형수가 시집올 때 가져온 거잖아요. 추억이 담긴 거니 가지고 계세요. 쌀 문제는 제가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요.”
그녀가 화를 내다시피 말했다.
“가져가면 그래도 몇 푼이라도 받을 수 있다니까요. 사내아이들도 한창 클 때라 먹성이 좀 좋아야 말이죠. 애들이 조금만 더 크면 나도 바느질이라도 해서 푼돈 좀 벌어 볼게요.”
둘째는 그래도 계속 거절했다.
“셋째, 넷째도 다 사냥하러 나갔어요. 걔들이 뭐라도 잡아 오면 곧장 장에 내다 팔아 쌀을 사 올 거라니까요.”
결국 둘째는 형수의 은비녀를 끝끝내 거절하고 급히 산을 내려갔다.
백천범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 때문에 그들의 삶이 더 팍팍해진 것이었다. 어렵사리 자신을 받아 줄 곳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자신을 거둬 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백천범은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무룩한 그녀의 모습에 소녀가 제기를 차자고 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백천범은 홀로 볼록한 바위 위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