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9)화 (38/1,192)

제39화

백천범이 납치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초왕의 저택에 또 한 차례 서신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문 틈새에 끼워 놓은 게 아니라 한 어린아이가 직접 가지고 왔다. 씩씩하고 건실해 보이는 체격이었지만, 높은 문턱에 조금은 위축된 모습이었다. 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하기 위해 꽤 신경 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르신, 어떤 복면을 쓴 괴한이 제게 이 서신을 가져다드리라 하였습니다. 서신을 다 읽은 다음에는 꼭 답변을 받아 오라고도 하였습니다.”

문을 지키는 머슴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 강도들이랑 한패가 아니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자들의 심부름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겁을 집어먹은 아이는 황급히 땅에 무릎을 꿇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 강도가 저의 형제를 붙잡고는 서신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동생을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협박했습니다. 만일 오늘 동생을 데려가지 못하면 전 부모님께 맞아 죽을 것입니다.”

아이는 왈칵 서러움이 밀려온 듯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안쪽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야께서 납시신다. 문을 열어라.”

초왕의 저택에서는 평소엔 측문만 사용했지만, 묵용감이 말을 타고 조정에 나가거나 돌아올 때는 대문을 열었다.

머슴이 재빨리 아이를 꾸짖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나오시니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냉큼 떨어지거라.”

저택의 모든 이들은 이틀간의 소란으로 왕비에 대한 초왕의 태도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오늘 이 서신도 왕야의 흥미를 끌지 못할 게 분명했다. 머슴은 괜한 심려를 끼치는 대신 아예 보고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묵용감은 이미 그 아이를 본 뒤였다. 그는 그 아이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임안성의 아이들은 먼 길을 돌아서 가는 한이 있어도 초왕의 저택 앞으로 지나다니는 법이 없거늘. 이 아이는 무서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입구에 다다른 그가 고삐를 붙잡고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소란스럽게 뭘 떠드는 것이냐?”

왕야의 물음에 머슴은 하는 수 없이 솔직히 말했다. 머슴의 말은 들은 묵용감이 아이에게 물었다.

“답변은 전갈로 요구하였는가? 아님 서신으로?”

아이는 그의 얼굴도 바라보지 못한 채 대답했다.

“제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할까 봐 서신으로 받아오라 하였습니다.”

묵용감이 물었다.

“내가 사람을 보내 네 뒤를 쫓을 수도 있는데 두렵지도 않다고 하더냐?”

“그자가 서신을 어디에 가져다 놓아야 하는지 미리 말해 주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가져다 놔야 동생을 풀어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 해도 내가 그 지역을 포위하고 있으면 잡히지 않겠느냐?”

아이가 눈을 껌벅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저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붙잡히면 더 좋은 일이지요. 저는 그저 그가 제 동생을 풀어 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될 뿐입니다.”

묵용감이 아이를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어디 사느냐? 성씨는 무엇이고?”

아이가 대답했다.

“우두산촌에 살고 있고, 성은 우씨입니다. 부모님과 누이,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오늘 동생과 놀러 가는 길에 복면을 쓴 괴한과 마주쳤습니다. 그자가 동생을 잡아가면서 제게 서신을 가져다드리라 한 것입니다.”

“이곳까지는 어찌 왔느냐?”

“그자가 말에 태워 여기로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럼 어찌 돌아갈 생각이냐?”

“성 안에 삼촌이 살고 있습니다. 삼촌께 수레로 저와 남동생을 데려다 달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끈질긴 질문 공세에도 대답에 허점이 없자 묵용감이 머슴에게 말했다.

“이 애를 총 관리인에게 데리고 가 회신을 써 주거라.”

머슴이 물었다.

“총 관리인께서 어찌 써야 하냐고 물으시면…….”

묵용감이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이리 쓰라 이르거라. 줄 돈이 없으니 목숨을 가져가려거든 그리하라고.”

머슴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허리를 숙이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고삐를 쥐고 몇 발짝 나아가던 묵용감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머슴에게 말했다.

“오늘 이 아이가 많이 놀랐을 터이니, 총 관리인에게 위로 삼아 여비를 좀 챙겨 주라고 하여라.”

개똥이는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맙습니다. 나리!”

묵용감이 멀찍이 떠나자 머슴이 개똥이를 학평관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왕야의 말을 전했다. 학평관은 별다른 말 없이 빠르게 서신을 적은 뒤, 개똥이에게 건네주며 신신당부했다.

“잃어버리지 말고, 잘 들고 가거라. 잃어버렸다간 형제를 찾지 못할 것 아니냐.”

서신을 받아 든 개똥이는 그 자리에 서서 학평관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나리께서 여비를 챙겨 주라 하셨습니다. 못 믿으시겠거든 저분한테 물어보십시오.”

개똥이가 손가락으로 머슴을 가리켰다.

여비를 챙겨 주라는 말은 이미 머슴에게 들었지만, 학평관이 모르는 척한 것이었다. 몇 냥 쥐여 준 것까지 왕야에게 보고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돈으로 보상을 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라 슬쩍 지나가면 될 줄 알았더니. 이런 도둑놈 심보를 가진 게 대놓고 돈을 달라 말을 꺼낸 것이다.

학평관은 이곳의 총 관리인이었으니 체면을 잃을 수는 없는 법. 그는 할 수 없이 은자 조각을 꺼내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일을 마친 개똥이는 좋은 답변을 듣진 못했지만, 그래도 여비를 챙겼으니 마음은 한결 편했다.

* * *

한편 개떡이의 일은 영 순탄치 못했다. 백 승상이 집에 오긴 했지만, 문지기가 소식을 전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섯째 아가씨는 시집을 간 몸이기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은 백씨 집안과 더 이상 관련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설사 시집을 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씨 부인이 다섯째 아가씨를 구해 줄 리가 없었다. 오히려 영영 사라지는 걸 원할 테니 말이다. 이 일을 아시면 분명 박수를 치며 좋아하실 테니 자신이 가서 고한다 한들 거절을 당할 게 뻔했다.

그래도 개떡이는 당황하지 않고 대문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로 했다. 어쨌든 백 승상은 조정에 가야 하니 집밖을 나설 것이다.

한참을 기다리니 백 승상은 나오질 않고 웬 늙은 시녀가 나와 머슴에게 상황을 물었다. 상황을 파악한 시녀는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들어오너라. 승상께 데려다줄 테니.”

개떡이는 희소식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서신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백 승상의 저택은 실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시녀는 왼쪽으로 꺾었다 오른쪽으로 꺾었다 하더니 호화로운 정원으로 들어섰다.

정자에는 사치스럽게 치장한 부인이 우아한 손동작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정원에 들어오자 그녀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저런 비렁뱅이를 들인 것이냐?”

개떡이가 말했다.

“저는 비렁뱅이가 아니라 서신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개떡이가 서신을 꺼내 보였다. 하지만 이씨 부인은 받을 생각은 않고, 눈만 치켜뜬 채 차갑게 그를 주시했다.

시녀가 이씨 부인의 귓가에 무엇인가 속삭였다. 이씨 부인은 그제야 찡그린 미간을 풀며 말했다.

“이리 가져오너라, 어디 좀 보자.”

홍련이 서신을 펼쳐 그녀의 앞에 올려놓았다. 서신을 읽은 이씨 부인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고작 이런 애한테 이백오십 냥씩이나 달라니.”

그녀가 개떡이에게 물었다.

“돈을 안 주면 죽일 것이냐?”

개떡이는 재빨리 눈치를 챙겨 답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저는 서신만 전달하러 왔을 뿐입니다. 그자들이 제 형을 잡아갔습니다. 만약 답을 받아 가지 못하면 제 형을 풀어 주지 않을 것이고, 형을 데려가지 못하면 전 아버지와 어머니께 맞아 죽을 것입니다.

마님, 어찌 하실 것인지요? 돈을 주실지 말지 서둘러 답변을 주시어요. 회신을 받아 가야만 형과 맞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곧장 홍련에게 먹과 붓을 가져오라 시켰다. 그리곤 직접 붓을 들어 큰 글자로 답변을 적었다. 먹이 마르자 홍련이 고이 말아 개떡이에게 주었다.

개떡이가 돌아가려 하는데, 이씨 부인이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지금 가면 아니 된다. 잠시 있을 곳을 마련해 줄 터이니 시간이 되거든 그때 돌아가거라.”

“마님, 저는 서신을 전하러 왔을 뿐입니다. 저를 가두셔서 어찌하려는 것입니까? 서신과 형을 맞바꾸러 서둘러 가야 합니다.”

“조급해하지 말거라. 오래 있게 하진 않을 테니.”

이씨 부인이 홍련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이 애를 나뭇간에 데려가거라. 묘시가 지나면 돌아가게 해도 좋다.”

그러더니 그녀가 다시 개떡이에게 말했다.

“이번에 가면 두 번 다시는 오지 말거라. 안 그랬다간 내 너의 다리를 다 부러뜨릴 것이야!”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자 악랄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개떡이는 걸어가면서 속으로나마 그 못된 여편네를 마구 욕했다.

* * *

서신 두 통이 네모난 탁자 위에 가지런히 펼쳐졌다. 백천범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왼쪽에 놓인 서신을 읽었다. 한 문장의 짧은 내용이었지만, 족히 일각 동안 바라본 듯했다.

「줄 돈이 없으니 목숨을 가져가려거든 그리하거라.」

알고 보니 초왕에게 그녀는 단 한 푼의 값어치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의 가치가 오백 냥은 될 거라고 착각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한 문장 덕분에 희망이 완벽히 무너져 내려 그나마 있던 좋은 추억들을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이토록 그녀를 싫어하면서 어째서 머리를 빗겨 주고, 이씨 부인 앞에서 도와주었단 말인가?

그녀는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또한 첫째 오빠처럼 자신을 아껴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아버지의 원수인 초왕이었다. 그녀가 사라지기만을 바라는데 어찌 돈을 지불해 가며 다시 데려올 거라 기대를 했단 말인가.

백천범은 자신을 옭아매던 얇은 고치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한 듯 모든 것을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편, 우씨 삼형제는 오른쪽 서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내용은 간결했지만 의미는 매우 분명했다.

「죽이면 그 금액의 두 배를 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한 푼도 줄 수 없다.」

두 배는 오백 냥이었다. 우씨 형제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 고개를 끄덕인 뒤,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곁눈질로 바라본 백천범은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이씨 부인에게 한 푼의 값어치도 안 될 줄 알았더니 무려 오백 냥이나 되었던 것이다. 다만 자신을 구하기 위한 돈이 아니라 목숨을 앗아 가는 값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백천범을 향했다.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리는 듯했지만,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백천범을 납치해 돈을 뜯어내는 게 우씨 형제의 일이었고, 가족들을 위해서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 어린 목숨을 없애기란 참으로 애석했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