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8)화 (37/1,192)

제38화

셋째가 소리를 질렀다.

“오백 냥? 힘들게 잡아 왔는데 오백 냥을 달라고 하라고? 값어치가 이리도 없어서야, 원!”

둘째가 말했다.

“그건 안 된다. 최소 이천 냥은 받아야 해.”

넷째가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칼을 뽑더니 식탁에 내리꽂으며 백천범을 노려보았다.

“이천 냥도 안 주면 죽여 버리겠어!”

삼형제는 이 어린 계집에게 겁을 주면 두려움에 벌벌 떨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고 곁눈질만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백천범은 오히려 차분한 태도로 물었다.

“저를 납치한 목적이 뭐예요? 돈을 받으려고 잡아 온 거 아니에요? 절 죽이면 살인을 했다는 이유로 평생을 쫓기며 숨어 지내야 하잖아요.

초왕야가 저희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는 건 맞지만 저를 죽이면 분명 원수를 떠나 두 분이 함께 살인자부터 잡아들일 거예요. 한 분은 승상이고 한 분은 군신인데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세 분한텐 이모, 언니, 개똥이, 개떡이까지 있잖아요.”

그녀의 일장 연설에 우씨 삼형제는 고개를 떨궜다. 그들의 계획에 살인은 없었다. 돈과 인질을 교환하는 공정한 매매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어째서 저리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단 말인가?

둘째가 한참을 고민하다 물었다.

“그래도 오백 냥은 너무 적다. 조금 더 올리면 안 되겠나?”

백천범이 정색을 한 채 고개를 저었다.

“초왕야에게 저는 이 정도 가치밖에 안 돼요. 더는 주지 않을 거예요.”

넷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형님, 너무 적어요. 이왕 힘겹게 한탕 하는 거 좀 더 부릅시다.”

둘째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오백 냥이면 오백 냥이라지. 없는 것보단 낫질 않냐.”

* * *

이튿날 아침, 초왕의 저택 대문에 또 한 차례 서신이 날아들었다.

서신을 읽은 학평관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 어제는 오천 냥을 달라던 이들이 오늘은 오백 냥을 요구하다니. 이러다 내일은 오십 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납치범의 가격 깎는 솜씨가 참으로 대단했다.

서신은 곧장 묵용감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서신을 책상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오백 냥 세 글자를 탁탁 치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석은 납치범은 없을 것이다. 기껏 사람을 납치해 놓고 오천 냥에서 오백 냥으로 값을 낮추다니. 아무리 겁을 먹었다 한들 수고비도 챙기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납치범의 소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일은 백천범이 스스로 꾸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왜 이런 일까지 꾸민단 말인가? 돈이 필요했던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그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끌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가 아직 청수의 일을 캐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혐의를 벗기 어렵다 여긴 그녀가 이런 짓을 꾸며낸 것이 분명했다.

“왕야, 이 일을 어찌…….”

묵용감은 서신을 구겨 대바구니에 던졌다.

“신경 쓸 것 없다.”

학평관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며칠 전부터 왕야가 왕비에게 잘 대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모두 그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초왕야가 백 승상 댁 아가씨에게 넘어갈 리 없었다.

* * *

이번만큼은 어떻게든 돈을 받아 내야 했기에 우씨네 형제들은 일찌감치 산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한없이 기다리던 와중에 꿩 두 마리를 잡기도 했다. 어제저녁 백천범이 먹는 양을 보니 식재료를 더 구해 가지 않으면 먹을 게 부족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가 넘어갈 때까지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초왕야가 은자 오백 냥조차 내놓지 않는단 말인가? 화가 치밀어 오른 삼형제는 욕설을 퍼부으며 산을 올랐다.

백천범이 길목에 서서 하염없이 삼형제를 기다렸다. 그들이 돈만 받아 오면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둘째, 셋째의 손은 텅텅 비어 있었고, 넷째만 한 손에 꿩 한 마리씩을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맥이 풀린 모습이었다.

오백 냥도 물거품이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백천범은 실망감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초왕에게 자신은 오백 냥의 가치조차 되지 않는단 말인가?

자신의 머리를 빗겨 주고, 이씨 부인을 혼내 준 것도 모자라 함께 저잣거리 구경을 해 준 묵용감을 떠올려 보면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오백 냥도 내어 주질 않는단 말인가?

속상함에 잔뜩 울상을 짓던 백천범은 허리춤에 달린 술 장식만 만지작거렸다.

안 그래도 성이 나던 삼형제는 백천범의 모습에 또 한 번 부아가 치밀었다. 무려 초왕비인데 오백 냥의 가치도 안 되다니! 분명 그녀 스스로도 상심이 클 터였다.

둘째가 그녀를 위로했다.

“되었다. 다시 셈을 따져 보면 그만이지. 얼마가 적당하겠냐?”

백천범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버림받은 기분에 마음이 시큰거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니 초왕야가 잘해 주었던 것들도 물에 비친 달처럼 천천히 일그러져 사라지는 듯했다. 희망을 품지 말았어야 했던 자신을 탓할 뿐 다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넷째가 꿩을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한번 봐라. 특별히 너 주려고 잡아 온 거니깐. 진정한 산해진미가 뭔지 오늘 보여 줄 테니깐 기대하라고.”

먹는 거라면 고민 따위는 곧바로 잊어버리는 그녀였기에 금세 관심이 꿩에 쏠렸다.

“와, 털이 진짜 예뻐요.”

“털을 뽑으면 언니한테 햇볕에 말려 두었다가 제기로 만들어 달라고 해. 낮에 시간 때우기 좋을 거다.”

“와, 너무 좋죠!”

백천범은 그들과 함께 집으로 향하며 개똥이와 개떡이를 불렀다.

“얘들아, 얼른 와서 꿩 좀 봐봐.”

개구쟁이 아이들이 쪼르르 뛰어와 꿩 주위를 에워싸고 재잘대기 시작했다. 한 명은 볶아 먹자고, 다른 한 명은 삶아 먹자고 성화였다. 싸움이 나려 하자 백천범이 둘을 떼어 놓으며 말했다.

“한 마리는 볶아 먹고 한 마리는 삶아 먹으면 되잖아. 이제 됐지? 형제끼리 먹을 거 가지고 다투다니 참 잘하는 짓이다.”

개똥이와 개떡이는 평소 친누나의 말은 잘 듣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백천범이 하는 말은 잘 들었다.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백천범이 말했다.

“털을 뽑으면 게으름 피울 생각 말고 내일까지 잘 말려 두었다가 언니한테 제기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그걸로 같이 제기차기를 하는 거야.”

개똥이가 볼멘소리를 냈다.

“제기차기는 시시한데. 나 안 해.”

백천범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안 할 거면 관둬. 개떡이 너는? 할 거야? 말 거야?”

개떡이가 쩌렁쩌렁하게 답했다.

“당연히 하지!”

개똥이는 조금 고민하다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동의했다.

“알겠어. 나도 할게.”

세 아이들의 떠들썩한 모습을 본 부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백천범에게서 왕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영락없는 아이에 불과했다.

사냥꾼들이 자부하던 음식은 조리법이 매우 단순했다. 일단 한 마리는 산에서 채취한 버섯, 산나물과 함께 한 솥 가득 넣어 고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왔고, 맛있는 냄새가 솥뚜껑 틈새로 새어 나와 주변을 가득 메웠다. 아이들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함께 약속이라도 한 듯 소리쳤다.

“진짜 맛있겠다!”

세 아이들은 솥 주변에 몰려들어 몰래 고기 한 조각 집어 먹을 틈만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솥을 지키고 있는 넷째 삼촌은 눈을 부릅뜨고 아이들을 쫓아냈다.

아이들은 꺄르르 웃으며 멀리 도망쳤다가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슬쩍 다가와 넷째 삼촌이 고함을 치게 만들었다.

다른 한 마리는 부인이 요리했다. 고기를 잘게 다져 기름을 두른 솥뚜껑에 볶다가 새빨간 건고추를 넣고 생강, 마늘도 조금 넣은 뒤에 달달 볶았다. 삶는 요리와는 또 다른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들은 냄새를 맡자마자 침을 꿀떡 삼키며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부인은 마음씨가 약했기 때문에 뒤집개로 몇 번 뒤적거린 다음 잘 익은 고기 몇 조각을 꺼내 아이들에게 주었다. 아이들은 고기를 손에 쥐고 뜯으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밥 대신 여전히 옥수수떡을 먹어야 했지만, 꿩고기와 함께 먹으니 새삼스럽게 다른 맛이 났다. 아이들은 꼭 설이라도 되는 듯 와글와글 떠들며 신나게 밥을 먹었다.

그들은 누가 제일 뼈를 깨끗하게 발라먹는지 내기를 했다. 승자는 백천범이었다. 그녀는 먹는 속도가 제일 빠르기도 했지만 발라먹는 솜씨도 가장 좋았다. 그녀가 발라먹은 뼈는 강아지들조차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부인은 그런 백천범의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았다. 초왕의 저택에서 잘 지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부군과 장인이 서로 원수지간이니 말이다. 그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끼니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식사를 마치고 몇몇이 함께 달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째가 말했다.

“천범아, 오백 냥도 못 준다는 뜻이면 대체 얼마를 불러야 하는 것이냐?”

백천범은 오십 냥을 말하고 싶었지만 조금 부끄러워 눈동자를 굴렸다.

“거기에서 절반을 깎은 이백오십 냥은 어때요?”

며칠 동안 함께 지내면서 우씨 형제들은 백천범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콧대가 높지도, 나약하지도 않은 성격에 말은 또 어찌나 예쁘게 하는지. 게다가 자신들에게 직접 값까지 따져 주니 무의식적으로 백천범을 자신들 무리에 포함시킬 정도였다.

둘째가 곧장 결정을 내렸다.

“좋다. 까짓거 이백오십 냥으로 하지. 주기만 한다면야, 뭐.”

백천범은 조금 부끄러웠다.

“실망하셨죠. 저는 정말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 봐요.”

그녀는 잠시 끊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초왕야가 절 찾기 위해 돈을 낼 생각이 있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니면 백 승상 댁에 서신을 보내는 건 어때요? 대신 꼭 아버지가 볼 수 있도록 수를 써야 해요. 다른 사람들은 제가 영원히 사라지길 바라니깐 한 푼도 받기 어려울 거예요.”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넷째가 물었다.

“왜 네가 사라지길 바라는 건데? 한 식구 아니야?”

백천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야말로 진정한 식구들이죠. 그런 저택에서는 자기 이익만 따지느라 사람의 목숨 따윈 아주 하찮게 여기거든요.”

그 말을 들은 우씨 형제들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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