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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7)화 (36/1,192)

제37화

백천범은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엔 중정이 있어 채광이 좋았다. 잡목으로 만든 가구들은 조금 낡아 보였다.

그 소녀는 투박한 찻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백천범에게 주며 말했다.

“집에 있는 거라곤 옥수수떡밖에 없어서…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아 줘.”

백천범이 대답했다.

“불쾌하긴요. 먹을 수 있는 거라면 다 좋아요.”

소녀는 환하게 웃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한 손에는 옅은 노란색 옥수수떡을, 다른 한 손에는 짠지를 들고 왔다.

음식이 눈앞에 놓이자 백천범은 배고픔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제 저녁도 먹지 않아 뱃가죽이 등에 붙는 것 같았다. 백천범은 아무런 말도 없이 옥수수떡 하나를 집어 그대로 입에 넣었다.

굵직한 옥수수가루로 만든 떡이었기 때문에 조금 딱딱했다. 목구멍에 붙어 잘 넘어가지 않자 그녀는 재빨리 물을 마시며 꾸역꾸역 삼켰다.

옆에서 턱을 괴고 백천범을 쳐다보던 소녀는 침착한 백천범의 모습이 약간 의아했다. 갑작스레 낯선 곳에 떨어지면 누구라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법인데, 이 어린 아이는 신기하게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소녀가 백천범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백천범은 먹고 있던 떡을 꿀떡 삼키며 대답했다.

“산속이요.”

“어떻게 오게 된 건지는?”

“당신들에게 잡혀 왔겠죠.”

소녀는 조금 부끄러운 듯 머리카락 끝을 빙빙 감으며 말했다.

“내가 잡아 온 건 아니고 삼촌들이 데려온 거야.”

백천범이 물었다.

“인질로 삼아서 돈을 요구하려고요?”

소녀가 멋쩍게 대답했다.

“삼촌들은 그럴 생각인 듯해.”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걱정 마.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돈만 받으면 곧장 풀어 준다고 하셨어.”

백천범이 젓가락으로 빈 접시를 콕콕 찍으며 물었다.

“더 있어요?”

소녀는 접시가 빈 걸 그제야 발견했다. 애초에 예의를 차린다고 두 개를 더 담은 것이었기 때문에 백천범이 부족해 할 거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마음씨 착했던 소녀는 백천범에게 마음의 빚이라도 진 것처럼 곧장 부엌에서 한 접시를 더 내어왔다.

소녀는 접시를 내려놓은 뒤 밖으로 나갔다. 이내 밖에서 그녀와 부인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이 물었다.

“뭘 좀 먹였니?”

“네, 옥수수떡 여섯 개를 먹고도 부족해 하던걸요. 돈 있는 집 아가씨 같진 않았어요. 혹시 삼촌들이 잘못 데려온 건 아니겠죠?”

부인이 답했다.

“그건 아닐 거야. 정확히 어느 집 아가씨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부잣집인 건 확실해.”

“근데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무서워하는 기색도 전혀 없고요.”

“귀한 집 아가씨니 식견이 좀 넓겠니. 자연스레 배포도 크겠지. 어쨌든 절대 푸대접해서는 안 된다. 삼촌들이 돈만 받고 나면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채로 돌려보내야 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천범은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극악무도한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하는 수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르는 듯했다. 어쨌든 돈만 받으면 그녀는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옥수수떡 두 개를 남겨 소매에 잘 넣어 두었다. 갑자기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그녀는 잔에 남아 있는 물을 모두 마신 뒤 소맷단에 입을 대충 닦고 밖으로 향했다.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백천범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모, 언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부인과 소녀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백천범의 모습에 당황한 듯 보였다. 그들은 경계심이 담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인이 물었다.

“무얼 물어보려고?”

“저를 얼마에 맞바꾸기로 하신 거예요?”

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없단다. 그저 잘 보살펴 주는 일만 맡고 있거든.”

백천범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양손으로 턱을 괸 채 물었다.

“이미 서신을 보낸 것이어요?”

“아마 그랬을 거야.”

백천범은 조금 울적했다.

“보내기 전에 저한테 먼저 물어보시지……. 사실 저는 그리 값이 나가는 사람이 아닌걸요.”

* * *

백천범을 잡아 온 이들은 우씨 성을 가진 삼형제였다. 산에 사는 이들은 이름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서대로 우씨네 둘째, 셋째, 넷째로 불렸다. 첫째도 있었지만 작년 관아에서 호랑이 사냥꾼을 하다가 그만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

관아에서 붙인 방에는 사냥 중 화를 입으면 관아에서 보상을 할 것이라는 내용이 분명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우씨 형제들이 관아에 보상을 요구하자 관리들은 끝까지 시치미를 떼더니 첫째가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다는 증거를 가져오라며 억지를 부렸다.

호랑이에게 잡아 먹혔는데 어찌 증거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첫째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아 배를 갈라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설사 그 호랑이를 찾는다 해도 이미 시일이 많이 지난 뒤였으니 진즉에 다 소화했을 터.

가여운 첫째의 부인과 자녀들은 가장을 잃고 어려운 나날을 보냈고, 삼형제는 관리들과 다투는 바람에 초주검이 되도록 호되게 곤장을 맞았다.

우씨 형제들은 울분을 겨우 억누르고 몸이 낫길 기다리며 서로 머리를 맞댔다. 더 이상 열심히 사냥만 하지 말고 아예 도적질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민가를 약탈하되 벼슬아치의 집만 털기로 했다.

첫 범행을 시작하기 전, 그들은 꽤 오랜 시간 동안 계획을 세웠다. 이왕 할 거면 한탕 크게 하기로 한 것이었다. 백천범은 초왕비이자 승상의 딸이었으니 만일 이번 일을 성공리에 마친다면 앞으로 은자 걱정을 할 일은 없었다.

삼형제는 산 아래 매복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은자 오천 냥은 수레에 실을 양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목표물이 나타나면 곧바로 약탈할 계획이었다. 그들은 산 지형에 매우 익숙했기 때문에 다른 이를 따돌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우선 돈을 찾은 뒤에 백천범을 돌려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오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한나절을 기다려도 수레를 끄는 무리는커녕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삼형제는 하는 수 없이 풀이 죽어 돌아갔다.

그들은 원래 산 아래에 살지만, 큰일을 도모하기로 마음먹은 후 아예 산 위에 집을 지어 거처를 옮겼다. 공교롭게도 집 근처에 외부와 차단된 암실이 있었다.

깊은 산중에 대체 누가 이런 것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병사들이 혹여 이곳을 찾아낸다 해도 암실에 숨어들어 가 다른 쪽 출구로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신통한 병사라도 찾아내기 불가능했다.

모든 과정이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니 결과는 둘 중 하나였다. 누군가 수레를 끌고 오거나 병사들이 들이닥치거나.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서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다니?

상대의 뜻을 알 길이 없자 삼형제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산 위로 돌아와 막 집으로 들어선 삼형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잡아 온 계집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두 조카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잔뜩 겁에 질리거나 대성통곡을 할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들의 상상과는 전혀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삼형제를 발견한 부인은 서둘러 그들을 맞이하며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쫓아오는 사람은 없겠죠?”

“없어요. 그쪽에서 아예 사람을 보내질 않았어요.”

둘째가 풀이 죽어 말하더니 백천범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어찌 개똥이 개떡이랑 저리 잘 놀고 있는 거예요?”

부인이 말했다.

“아직 애잖아요. 애들끼리는 원래 금방 사귀니까요.”

셋째가 끼어들었다.

“애는 무슨. 왕비예요, 왕비.”

부인은 깜짝 놀랐다. 삼촌들이 왕비를 데려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가 벌벌 떨며 말했다.

“와, 왕비라고요? 그럼 황제 폐하의 가족이잖아요? 세상에, 내가 삼촌들 간이 부어도 너무 부었다고 했죠? 어떻게 왕비를 잡아 올 수가 있어요? 어서 돌려보내요, 어서! 푸대접하진 않았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지 정말.”

넷째는 하나도 두려울 게 없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형수님, 무서워할게 뭐 있어요. 둘째 형 말처럼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한탕 해야죠. 이름만 날리면 앞으로 돈 걱정은 없다고요.”

부인이 딸에게 소리쳤다.

“딸, 삼촌들께 물 좀 드리렴.”

그녀는 삼촌들에게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사실 백천범도 그들이 돌아온 걸 보았지만, 두 개구쟁이들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바람에 멈추지 못했다. 그러다 집 안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갔다.

우씨 형제들은 다음 행보에 대한 계획을 세우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백천범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잠시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조카들이 곧바로 따라 들어오는 바람에 술래잡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부인이 몇 마디 호통을 치고는 한 팔에 한 명씩 안아 올려 밖으로 내보냈다.

백천범은 그제야 숨을 좀 골랐다. 그리곤 스스로 의자를 찾아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돈은 못 받으셨어요?”

둘째가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건 왜 묻는 거지?”

백천범은 옷에 묻은 먼지를 튕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까 이모랑도 얘기해 봤는데, 제가 하자는 대로 해야 돈을 받을 확률이 좀 더 높아질 거예요.”

둘째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는 유심히 살폈다.

“어째서? 설마 돈을 많이 요구해서 저자들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냐?”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를 잡기 전에 자세히 알아보지 않으셨나 봐요. 제가 백 승상의 딸이고 초왕에게 시집을 가긴 했지만 초왕은 저희 아버지와 원수지간이거든요. 당연히 저한테는 관심을 주지 않죠. 돈을 많이 요구한다면 초왕야는 줄 생각도 없을걸요.”

넷째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고작 오천 냥밖에 요구하질 않았는데 이게 뭐가 많아?”

백천범이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했다. 초왕에게 오천 냥은 분명 그리 큰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돈을 그녀에게 쓸 마음이 있을지 고민해 보면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녀는 초왕야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곤경에 빠진 자신을 도와주고, 저잣거리 구경까지 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구하러 오지 않을 리는 없지만 이들이 요구한 금액이 높지 않음에도 돈을 주고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는 건, 그녀가 그에게 그 정도의 가치도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늘 저들이 돈을 받지 못한 것은 그녀의 값어치가 오천 냥이 되지 않기 때문인 듯하여, 백천범이 고민 끝에 말했다.

“그래도 좀 많은 것 같아요. 오백 냥으로 줄이는 게 좋겠어요. 아깝지 않다면 그 정도는 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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