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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6)화 (35/1,192)

제36화

대충 서신을 읽어 넘긴 그의 시선이 우두산 세 글자에 머물렀다. 그도 아는 곳이었다. 성을 나선 후, 서쪽으로 대략 스무 리쯤 가야 했다. 빠르게 말을 몰고 가면 한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산 아래에 있는 마을도 우두산의 이름을 따 우두산촌이라 불렸다.

그래서 서신에 적힌 우두산은 우두산촌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높이 솟은 산봉우리를 말하는 것인가?

묵용감이 서신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어제 왕비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냐?”

학평관의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대답을 하기 전에 기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소인이 계집종을 남월각에 보내 확인해 보았지만, 왕비가 돌아왔는지 아닌지 정확히 아는 시녀가 없었습니다.”

묵용감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럴 법도 하지. 늘 제멋대로 돌아다니며 신출귀몰하지 않더냐?”

학평관이 입을 열었다.

“왕야, 소인이 남월각으로 사람을 보내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왕비 마마께서 침소에 계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묵용감이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가동을 보내거라. 왕비가 어디에 자주 가는지 가동은 알 것이다.”

문 앞에 서 있던 가동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그 또한 백천범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무술이라고는 시늉만 할 줄 아는 어린아이가 정말 도적들에게 납치라도 당했다면 온갖 시련을 겪고 있을 게 뻔했다.

남월각은 어떤 미동도 없이 조용했다. 가동은 마음이 급해졌다.

마침 눈을 비비며 황급히 변소를 가는 무수리와 마주쳤다. 아직 잠이 덜 깬 무수리에게 백천범의 방이 어딘지 물었다. 그렇게 백천범의 방을 찾아가 문을 열어 보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부자리가 깔끔하게 개어져 있는 게 잠을 청한 흔적조차 없었다.

가동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 명호 주변과 화원, 동산, 심지어 비어 있는 다른 처소까지 일일이 확인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백천범은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앞뜰로 향했다. 아침 준비가 한창인 부엌은 정신이 없었다. 몇몇 어린 머슴들이 찬합을 들고 줄을 서고 있었지만, 백천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왕비는 정말 저택에 없는 듯했다.

돌아가 사실을 보고하자 기홍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그녀가 묵용감에게 애원했다.

“왕야, 왕비 마마를 구해 주십시오!”

묵용감은 여전히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허리에 찬 옥패를 매만진 뒤 그가 입을 열었다.

“한가하게 무릎을 꿇고 있을 시간에 아침이나 내어 오거라.”

기홍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수라를 올렸다. 다들 묵용감이 지시를 내릴 거라는 생각에 그의 곁을 지켰지만, 묵용감은 태연히 아침밥을 먹은 뒤 평소처럼 가동과 영구를 데리고 조정으로 향했다.

순간적으로 그 뒤를 쫓으려는 기홍을 녹하가 잡아끌더니 소리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지만 초왕의 태도는 매우 분명했다.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슬픔에 젖은 기홍이 연신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자 녹하가 그녀를 위로했다.

“조급해할 게 뭐 있어. 우리 왕비 마마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분명 애를 먹고 계시진 않을 거야.”

말 세 필이 유유히 대문을 나섰다. 준수한 세 남자의 낯빛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만 적막하게 울려 퍼졌다.

영구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백천범을 도둑으로 오해해 다치게 했지만, 자발적으로 주방 시녀들을 호되게 벌함으로써 왕비에게 진 빚을 청산했다고 생각했다. 만일 왕비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이제 그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가동은 달랐다. 백천범은 가동에게 사부라 부르며 절까지 올렸고, 수업료도 지불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상, 사부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만 온종일 초왕의 곁을 지켜야 하니 가동도 지금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묵용감은 반성을 하고 있었다. 어제 궁에서 일어났던 일을 돌이켜보니 후회가 밀려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백천범 때문에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씨 부인과 백천범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백 승상 집안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가 개입할 필요 없었다.

그들끼리 내분이 일어나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어차피 오래 있지 않을 사람이니 괜히 얽힐 필요 없었다.

마침 백천범이 납치를 당했으니 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면 도적들은 분명 백 승상을 찾아갈 것이다.

그녀의 친부인 백 승상은 딸을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자연스레 딸을 다시 데려갈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왕비를 폐위시킬 구실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제 태비 마마를 뵙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뵈었다간 일이 더 커질 뻔했다. 그가 백천범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면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억지로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백천범은 자신이 어떻게 산속에 오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구불거리는 산길을 빙빙 돌아 끝없이 올라온 끝에 인가 하나를 발견했다. 자그마한 농부의 집이었다. 한 여인이 정원에서 옷을 널고 있었다.

여인이 몸을 돌려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유난히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비록 무명으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미간에는 화전花鈿을 그려 넣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화전이 아니라 붉은 반점이었다. 예쁜 두 눈엔 청록빛 물이 고여 있는 듯 우아했다. 여인이 백천범을 향해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영阿英아, 돌아왔구나.”

백천범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저는 아영이가 아니고 백천범이라고 해요. 산에서 길을 잃었어요. 혹시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그 여인은 백천범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다정하게 그녀를 불렀다.

“아영아, 왜 그렇게 가만히 서 있어, 어서 엄마한테 오렴.”

백천범은 점점 더 이상함을 느꼈다. 설마 이 예쁜 여인이 바보란 말인가? 열여덟, 열아홉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어찌 이렇게 큰 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자신은 아영이가 아닌데 왜 자꾸 아영이라고 부르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당 문이 저절로 열렸고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 여인이 백천범을 끌어당겼다. 살갗에 닿은 그녀의 손은 한없이 부드럽고 매끈했다. 전혀 산속 여인의 손 같지 않았다.

어디선가 맑고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 그 여인에게서 나는 향이었다. 백천범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여인이 백천범을 품 안에 끌어안고는 아기를 쓰다듬듯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영아, 돌아왔으니 됐다.”

적잖이 당황한 백천범이 여인을 밀어냈다. 눈을 떠 보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알고 보니 꿈이었던 것이다. 피곤함에 다시 눈을 감던 그녀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지? 백천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완전히 낯선 장소였다. 좁고 초라한 방에는 검은색 나무 침대가 놓여 있었고, 하얀 바탕에 파란 꽃이 그려진 침대보와 무명천에 빨간 꽃이 그려진 이불이 놓여 있었다. 알록달록한 색상에 눈이 다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창밖의 햇빛이 스며들자 가느다란 빛줄기에 수많은 먼지가 떠다녔다. 백천범은 있는 힘껏 얼굴을 문지른 뒤,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신발을 질질 끌며 창가로 다가갔다.

밖을 둘러본 그녀는 깜짝 놀라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아마 깊은 산속에 있는 듯했다.

정말 이상했다. 누가 이런 산속에 집을 지었을까? 여기는 어디지? 대체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백천범은 열심히 기억을 되짚었다. 하지만 기억나는 거라곤 건장한 남자가 큰 칼을 휘두르며 검술을 선보이던 걸 구경하던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그녀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리고는… 기억나는 건 이게 다였다.

분명 누군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백 승상의 딸이자 초왕의 왕비라고 하면 퍽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었다. 그저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딸, 남편에게 관심도 받지 못하는 부인일 뿐이었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녀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뒤에 아무런 미동도 없자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밖은 방 안보다 더 어두웠다. 벽에 걸린 자그마한 촛불 하나가 미약하게나마 통로 한편을 비추고 있었다. 앞뒤로 길게 복도가 이어져 있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서둘러 결정을 해야 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대충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기로 했다. 자신의 운을 믿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따라 벽을 짚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비슷한 간격으로 벽에 작은 촛불이 하나씩 걸려 있었고, 어디에서 새어 들어오는지 알 수 없는 약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일렁이는 그림자를 드리워 꽤나 무서웠지만, 어려서부터 수많은 경험으로 다져진 덕에 웬만한 일에는 겁먹지 않는 그녀였다. 백천범은 용감하게 앞을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이 나타났다. 사뿐사뿐 계단을 밟자 햇빛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출구를 찾은 듯했다. 그녀는 뛸 듯이 기뻤지만 행동엔 더욱 신중을 기했다.

벽에 바짝 붙어 고개를 내밀고 밖을 살피던 그녀는 마당을 보고 또 한 차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또 집이 있었던 것이다.

낮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제법 운치 있었다. 동쪽에 심어진 커다란 회화나무는 새하얀 꽃을 드리우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두 아이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누렁이 두 마리가 아이들 뒤를 따랐고, 꽤 많은 닭들이 땅을 쪼아 대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가 백천범 앞으로 와 목을 내밀며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백천범이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입구를 빠져나오자 닭이 푸드덕거리며 요란스럽게 도망쳤다. 그 소리에 콩을 널고 있던 부인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백천범을 발견하자 환하게 웃었다.

“일어났구나. 배고프지? 먹을 걸 내어 줄 테니 잠시 기다리렴.”

모든 것들이 백천범이 상상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그녀는 분명 못된 악당이 자신을 이리로 데려와 인질로 삼은 뒤 돈을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부인의 모습을 보니 전혀 악당 같아 보이지 않았다.

백천범은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집 안에서 열넷,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나왔다. 소녀는 커다란 꽃무늬가 그려진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별다른 장신구 없이 양쪽으로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다.

둥근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그녀가 백천범을 보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부인에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먹을 걸 챙겨 줄게요.”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하던 일을 해야 하니 네가 대신 잘 보살펴 주렴.”

소녀가 백천범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집으로 들어와. 물 가져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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