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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5)화 (34/1,192)

제35화

돌아가는 길에도 백천범은 가마를, 묵용감은 말을 탔다. 영구와 가동이 그 곁을 따랐다.

묵용감 일행이 길을 꺾어 금성대로에 들어섰다. 금성대로는 임안성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거리마다 상점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고 여기저기 크고 작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찻집, 주막, 객잔, 음악당, 비단 상점, 재봉소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길 양옆에 줄지어 놓인 노점에는 각종 군것질거리와 장난감 따위를 팔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흥을 더했다.

땅콩, 경단, 계란 전병, 엿, 꽈배기뿐만 아니라 바람개비, 대나무 잠자리, 연, 연지, 눈썹먹, 두건 등……. 볼 게 너무 많아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초왕의 가마가 지나가자 여기저기서 더욱 큰 목소리로 호객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백천범은 아직 영락없는 아이였다. 가는 길에 이미 한차례 묵용감에게 꾸중을 듣긴 했지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창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떠들썩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앞에서 말을 몰고 가던 묵용감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백천범이 가느다란 목을 내밀고 길가의 음식을 눈이 빠져라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가마꾼들에게 잠시 멈추라 지시한 뒤 백천범에게 물었다.

“이곳을 둘러보고 싶은 것이오?”

백천범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백 승상의 집에 있었을 땐, 집 밖으로 나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초왕의 저택으로 온 뒤에도 처음으로 외출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밖을 자유롭게 거닐고 싶었다. 저택과 안과 다르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자유롭게.

묵용감이 백천범에게 바깥 구경을 시켜 주는 이유는 그녀가 황궁에서 겪은 일 때문이었다. 백천범이 그런 일을 당한 것은 그녀를 잘 보살피지 못한 자신의 탓이기도 했다.

비록 이씨 부인에게 복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백천범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었으니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그날 머리를 빗겨 주었듯 오늘은 저잣거리 구경을 허락한 것이다.

금성대로는 초왕의 저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묵용감은 가동과 가마꾼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영구와 셋이 함께 거닐다 돌아갈 계획이었다.

백천범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나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그녀는 가지고 있던 용돈으로 계란 전병을 사 묵용감과 영구에게 주었다.

두 남자 모두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의 뜻을 보이자 백천범은 오히려 신이 나서 세 개를 겹쳐 입에 넣었고, 눈이 초승달처럼 가느다래질 정도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기홍이 해 준 것보다 맛있진 않았지만 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으면 확실히 맛이 없는 것도 맛있게 느껴졌다.

계란 전병을 먹으면서 무예 공연을 구경하던 백천범이 동전 한 닢을 던져 주었다. 여덟, 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조금 민망했던 백천범은 다시 은자 부스러기를 꺼내 깡통에 넣었다.

묵용감이 매일 말을 타고 지나다니던 곳이기 때문에 그에겐 시끄럽기만 할 뿐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무료했던 그는 뒷짐을 진 채 서화를 파는 노점 앞에 서서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한 그는 영구를 불러 자신은 먼저 돌아가겠으니 백천범을 잘 보필하여 돌아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갑자기 앞쪽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어떤 부녀자가 좀도둑에게 당한 듯 애타게 소리를 지른 것이다.

“천하에 죽일 도둑놈 같으니! 그건 우리 아버지께 드릴 약재 값이라고! 거기서! 도둑이다! 도둑 잡아라!”

불의를 지나치지 못하는 묵용감은 재빨리 영구에게 고갯짓을 했다.

“쫓거라.”

영구는 곧장 군중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비집고 들어가더니 재빨리 앞으로 치고 나갔다. 구경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묵용감은 길가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는 다리에 힘을 주고 상황을 지켜보려 목을 내밀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확인하기 어려웠다.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로 보아 영구가 먼 곳까지 쫓아갔으리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동월국의 안전은 그가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그가 관여해야 했다. 영구가 뒤를 쫓았으니 이제 그리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그제야 백천범이 떠오른 그는 고개를 돌려 무예 공연을 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백천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떠들썩한 사람들의 모습만 보일 뿐, 그 어디에도 백천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이상했다. 멀리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어디로 가 버렸단 말인가?

백범천을 찾아 길을 따라 걷던 그는 어느새 저택 입구에 다다랐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고리만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날 뿐이었다.

열려 있는 측문에는 문을 지키는 어린 머슴이 서 있었다. 묵용감을 본 머슴이 곧장 예를 갖춰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묵용감이 물었다.

“왕비는 돌아왔느냐?”

사실 머슴은 왕비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왕야의 물음이니 머슴은 제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오전에 집에 들어온 여인은 세 명이었다. 한 명은 빨래를 담당하는 노파, 한 명은 새로 온 주방 시녀, 나머지 한 명은 집에 다녀온 계집종이었으니 그중 왕비는 없었다.

“왕야께 아룁니다. 왕비 마마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묵용감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니 어린 계집이라도 알아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지나자 영구가 돌아왔고 도둑을 잡아 관아로 넘겼다고 보고했다.

묵용감은 알겠다고 대답하곤 나가라고 손짓했다. 하품이 쏟아지는 게 낮잠을 한숨 자고 싶었다.

녹하가 허리를 숙여 향을 피웠고, 기홍은 왕야의 탈의를 도왔다. 늘 백천범을 걱정하는 기홍이 왕야에게 물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함께 돌아오시지 않은 것인지요?”

묵용감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는 길거리에서 공연을 보는 중이다. 실컷 놀면 알아서 올 것이니 걱정 말거라.”

기홍은 묻고 싶은 게 더 많았지만 연회에서 술을 마셔 피곤해하는 그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부군이 부인을 저잣거리에 내버려 두고 홀로 돌아온단 말인가? 곁을 지킬 게 아니라면 하인이라도 붙여 줬어야 했다. 기홍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태웠다.

묵용감이 잠들자 기홍이 방을 나왔다. 잠시 고민한 끝에 총 관리인을 찾아갔다.

학평관은 왕비의 일로 몇 차례 곤장을 맞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신중한 태도였다. 기홍의 말을 들은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왕야가 왕비를 길거리에 버리고 왔는데, 주인의 분부도 없이 마음대로 왕비를 찾아올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왕비에 대한 왕야의 태도도 아직 불확실하니 괜히 나서는 것보단 신중히 행동하는 게 낫겠다.’

그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기홍 양, 왕비 마마께서 모처럼 외출을 하셨으니 왕야께서 마음껏 즐길 기회를 주신 듯합니다. 좀 더 지켜보다가 그때도 돌아오지 않으시면 왕비 마마를 찾을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기홍은 조금 의아했다.

“왕비 마마가 밖에 혼자 계신데 시중들 사람도 보내질 않는 것입니까?”

“백 승상 댁에서 보내 준 왕비 마마의 시녀는 남월각에 있질 않습니까? 사실 그 시녀들이 왕비 마마를 제대로 모시지 않는 것은 왕야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왕야께서도 신경 쓰시지 않는 일에 제가 관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어쨌든 왕비 마마는 백 승상 댁 따님이시니 왕야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왕야를 모시는 우리는 왕야께서 분부를 내리시는 대로 따를 뿐이지요.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총 관리인의 말은 왕야의 지시 없이는 왕비를 찾을 사람을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왕야는 잠이 든 상태였다. 고로 그 누구도 왕야의 단잠을 깨울 순 없다는 뜻이었다.

왠지 모르게 기홍은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신이 직접 나가 왕비를 찾고 싶었지만 잠에서 깬 왕야가 자신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영구가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그녀가 영구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혹시 돌아오는 길에 왕비 마마를 못 보셨는지요?”

영구가 살짝 놀랐다.

“왕야와 함께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기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 말씀으로는 공연을 보고 계시다는데 신시가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네요.”

영구가 말했다.

“총 관리인께 왕비 마마를 찾을 사람을 보내라고 해야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렸는데 왕야의 지시 없인 사람을 보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영구가 눈썹을 찌푸렸다.

“또 곤장을 맞을까 무서운 모양이군요.”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동 형님에게 찾아보라 하겠습니다.”

일그러졌던 기홍의 미간이 이제야 환하게 펴졌다.

“고맙습니다, 영구 호위무사님.”

영구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게 고마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왕비 마마께서는 우리 모두의 왕비 마마이신 걸요.”

발을 걷어 올리고 방을 나오던 녹하가 둘의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찾긴 뭘 찾아, 왕비 마마께서 진즉에 남월각으로 돌아가셨을지도 모르는데. 남월각에 가서 물어보면 바로 알겠지.”

녹하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왕비의 처소는 회림각이 아니었으니 곧장 남월각으로 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홍은 왕비가 돌아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계집종을 남월각으로 보냈다.

하지만 남월각의 노비들이 백천범의 행방을 알 턱이 없었다. 어떤 이는 못 봤다 하고, 어떤 이는 후원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 했다.

하는 수 없이 계집종은 왕비를 찾아 후원을 한참이나 돌아다녔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가 되어서야 계집종이 상황을 보고하러 회림각으로 향했다.

그녀 또한 백천범이 돌아온 것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남월각 시녀들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왕비는 후원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진 못했다고 말이다.

계집종의 말에 기홍은 백천범이 저택에 돌아왔다고 여겼고,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 * *

이튿날, 아침이 되자 한 하인이 대문 앞에서 서신을 발견했다. 내용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회림각으로 향해 총관리인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은 터라 묵용감도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기홍과 녹하가 그의 세안을 돕고 있는데, 학평관이 들어와 이야기했다.

“왕야, 대문 앞에 서신 한 통이 놓여 있었는데, 왕비 마마를 납치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은자와 맞바꾸자고 합니다.”

기홍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녹하도 크게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놀란 두 사람은 하던 동작을 모두 멈추었지만 묵용감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는 어떠한 기복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서신은? 이리 가져오너라.”

학평관은 공손히 서신을 전달했다. 투박한 황마지에 삐뚤삐뚤한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초왕비는 우리 손아귀에 있다. 오늘 내로 은 오십 냥을 준비하여 우두산牛頭山으로 가져와라. 그러면 인질을 풀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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