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백천범의 옷을 본 귀비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초왕비가 입궁을 하는데 이런 옷을 입다니? 초왕이 새 옷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이냐? 아무리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다 한들 어찌 그 화풀이를 너에게 하신단 말이냐?
우리 백씨 가문의 딸이 입궁을 하는데 그럴싸한 옷도 입히질 않으시니 다른 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겠구나. 채운彩云아, 헌 옷들 중에 깨끗한 걸로 골라 다섯째에게 보내 주거라.”
그에 채운이라는 궁녀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백천범이 재빨리 대꾸했다.
“귀비 마마의 마음만 받겠습니다. 저는 이미 옷이 많은걸요. 왕야께서 제 나이가 어리니 너무 사치스러운 것을 입으면 감당을 할 수 없을 거라 여겨 이 옷을 골라 주신 것입니다.
귀비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오해를 했구나. 보아하니 초왕야께서 네게 퍽 잘해 주시는 모양이구나.”
그녀가 백천범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왕야께서 네게 잘해 주시니 그 은혜에 보답하려면 하루빨리 대를 이어야겠지.”
백천범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저는 아직 어리니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씨 부인이 콧방귀를 뀌더니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이 애도 아직 어린데 애가 어찌 애를 낳겠느냐? 네 아버지가 천벌 받을 짓을 한 게지.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애를 초왕에게 보내다니. 혼사를 치르던 날, 신방에서 죽진 않을까 걱정했잖니. 팔도 다리도 이리 가느다란데 어찌 초왕야의 힘을…….”
이씨 부인이 아무 거리낌 없이 말을 내뱉자 몇몇 궁녀들이 얼굴을 붉혔다. 낯부끄러운 얘기에 귀비가 재빨리 말을 끊었다.
“너와 초왕야의 혼사는 황제 폐하께서 이어 주신 것이다. 보아하니 황제 폐하께서도 꽤나 미안하게 여기시는 눈치더구나. 하여 초왕야께 두 명의 첩을 보내 주실 것 같았다.
첩이 들어오면 너는 정실이 되는 것이니 체면을 차리고 다른 이에게 업신여김을 당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백씨 집안의 딸들은 그 어디에서도 무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
고개를 숙인 채 귀비의 말을 듣고 있던 백천범이 속으로 생각했다.
‘밖에서는 그나마 낫죠. 백씨 집안에서 가장 많이 무시를 당했는걸요.’
귀비는 말을 마치자마자 발걸음을 돌렸다. 이씨 부인이 곧장 귀비를 붙잡고 조용히 물었다.
“그냥 이렇게 간다고?”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귀비가 이씨 부인에게 토로했다.
“어머니, 대체 무엇을 더 하시려고요?”
이씨 부인이 목소리를 더 낮게 깔았다.
“이 어미가 분풀이를 해 달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이대로 가겠다고?”
귀비가 답했다.
“여기는 황궁입니다.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이씨 부인은 딸의 말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귀비에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저 애 혼자 떨어졌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귀비가 자포자기하듯 말했다.
“절 끌어들일 생각 마시고 어머니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누군가 나타날까 걱정된 이씨 부인은 속전속결로 진행하기로 했다. 원래는 백천범의 뺨을 한 대 때리려 했으나 보는 눈이 많으니 차마 그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이씨 부인은 결심한 듯 백천범에게 손짓했다.
“이리 오너라.”
백천범은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고명 부인,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이씨 부인이 생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이제 좀 컸다고 불러도 꼼짝 않는구나.”
백천범이 움직이지 않자 그녀가 직접 백천범에게 향했다. 그리곤 손을 빠르게 내밀더니 백천범의 팔뚝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지난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호되게 꼬집힌 백천범이 소리를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귀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씨 부인을 불렀다.
“어머니, 무얼 꾸물대십니까. 어서 가시지요.”
말을 마친 그녀가 고개를 돌리곤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초왕이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그는 언제부터 저기 서 있었단 말인가?
귀비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자 이씨 부인은 곧장 그녀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보았다. 초왕을 보고 깜짝 놀란 이씨 부인은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더니 이내 귀비를 잡아끌고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묵용감이 큰 보폭으로 걸어왔다. 두세 걸음 만에 그녀들을 막아서더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찌 날 보자마자 가려는 것이오?”
황궁의 규율대로라면 귀비에게 먼저 인사를 올려야 했지만, 백 승상과 관련된 사람들은 애당초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귀비 또한 제멋대로인 그의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웃음만 지었다.
“왕야께서 어찌 나오셨습니까?”
묵용감이 노골적으로 대답했다.
“내 왕비를 찾으러 왔소.”
그가 백천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오시오.”
백천범이 곧장 그에게 다가갔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건넸다. 묵용감이 그녀의 팔을 잡더니 옷소매를 조심스레 걷어 올렸다. 이씨 부인이 있는 힘껏 꼬집은 곳에 벌건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곁눈질로 흘겨보던 이씨 부인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방금 꼬집은 자국 때문이 아니라 백천범의 팔 전체에 새겨진 시퍼런 멍 때문이었다.
지난번 주방 시녀들에게 맞고 꼬집혀 생긴 상처는 많이 나아지고 있었다. 피멍 자국도 많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이 보기엔 끔찍한 흔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이씨 부인은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게 된 것처럼 음흉한 미소를 내비쳤다. 하지만 묵용감의 서슬 퍼런 눈빛에 금방 사그라졌다.
묵용감이 붉은 자국을 어루만지며 백천범에게 물었다.
“아프오?”
“괜찮습니다.”
백천범이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통증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묵용감이 이씨 부인을 똑바로 주시했다.
“고명 부인이 부끄러운 짓을 저질러 감히 본왕을 쳐다보지도 못하나 보오.”
이씨 부인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초왕야께서도 참, 백주 대낮에 제가 어떻게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겠습니까?”
“왜 본왕의 왕비를 꼬집은 것이오?”
이씨 부인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팔에 있는 상처에 비하면 내가 꼬집은 건 아무것도 아니거늘. 대체 무슨 낯짝으로 따져 묻는 거야?’
“초왕야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희 천범이는 피부가 약해 살짝만 부딪혀도 빨갛게 멍이 든답니다. 팔 가득한 이 자국들이 그 증거지요. 초왕야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이 부인 참으로 억울합니다.”
묵용감이 옅은 미소를 짓더니 백천범의 소매를 다시 내렸다.
“그렇소? 하마터면 본왕이 오해를 할 뻔했군. 본왕은 성질도 고약하지만 모욕적인 일을 당하는 건 더더욱 참지 못하는 사람이오. 그 누구라도 초왕비를 괴롭혔다간 본왕이 반드시 본때를 보여 줄 것이오.”
“아무렴, 지당하신 말씀이지요.”
이씨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야께서 지켜 주시는데 감히 누가 초왕비를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이 부인은 어린 계집아이가 철이 없어 왕야의 심기를 건드릴까 참으로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왕야께서 이리도 보호해 주시는 것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호호, 계집아이가 참 복도 많지.”
초왕이 두려웠던 귀비는 서둘러 자리를 뜨고 싶어 살짝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왕야,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 이만 들어가야겠습니다.”
초왕이 한쪽으로 물러서며 예의 있게 말했다.
“조심해서 가시오.”
서둘러 귀비를 따라가던 이씨 부인은 돌연 발이 걸려 땅 위로 곤두박질쳤다. 그녀의 앓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크게 놀란 궁녀들은 서둘러 이씨 부인을 부축하며 자책했다. 이씨 부인은 나이가 많진 않았지만 평소 사치스럽고 안일하게 지냈기 때문에 뚱뚱한 체격이었고, 걸을 때에도 늘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심하게 넘어진 걸 보니 꽤나 고통스러운 듯했다.
아픈 건 그렇다 쳐도 체면을 구긴 게 더 문제였다. 이렇게 많은 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나자빠지다니,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왜 넘어졌는지는 아주 명백했다. 궁녀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그녀는 초왕야를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초왕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고명 부인, 어찌 그리 본왕을 쳐다보는 것이오? 설마 본왕의 얼굴에 꽃이라도 피었소?”
이씨 부인이 어떻게 넘어졌는지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초왕야의 짓이란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이씨 부인이 초왕비를 꼬집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였다. 초왕야가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든 체면을 찾으려 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귀비가 분을 참지 못했다. 이씨 부인은 엄연히 백천범의 적모였다. 한낱 개를 때릴 때에도 주인이 누군지 봐야 한다 했거늘. 초왕야와 백씨 집안이 아무리 원수라 할지라도 이건 너무나 모욕적인 짓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귀비이질 않는가? 비록 황후 밑에서 굽실거려야 하지만 누구보다 존귀한 존재였다. 초왕야가 어찌 감히 귀비의 친모를 모욕한단 말인가?
귀비가 어두워진 낯빛으로 작게 헛기침을 했다. 한기가 서린 두 눈으로 초왕야를 똑바로 응시하며 무슨 말을 꺼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초왕야는 도리어 박장대소를 했다.
“고명 부인의 다리 힘이 부족한가 보오. 앞으로는 외출을 자제하시는 게 좋겠소.”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백천범의 손을 잡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
분을 이기지 못한 이씨 부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손가락으로 초왕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저, 저게, 어찌 이런 짓을…….”
황궁만 아니었다면 마구 발길질을 해 대며 욕을 했을 텐데!
귀비는 얼굴이 벌게진 채 이를 갈았다.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고 반드시 앙갚음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제멋대로 구는 이 포악한 자를 기필코 눌러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초왕의 손에 이끌려 가던 백천범은 마음이 편안했다. 자신의 머리를 빗겨 준 것도 모자라 자신을 위해 직접 나서 주다니. 정말 큰오빠와 닮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계속 걷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이 길은 연회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초왕야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란 말인가?
얼떨떨해 하고 있는데 묵용감이 그녀의 손을 놓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기는 사라져 있었고, 무엇인가 망설이는 듯하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되었다. 안 가면 그만이지.”
백천범이 물었다.
“어디를 가는데요?”
키가 큰 묵용감 앞에 서면 늘 그림자가 졌기 때문에 그의 안색도 어두워 보였다. 묵용감이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돌아가야겠다.”
백천범이 말했다.
“그냥 이렇게 가는 것입니까? 황제 폐하께 인사도 안 하고요?”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 폐하를 뵙고 싶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멀리서 뵌걸요.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왕야와는 좀 다르신 듯했어요.”
“…….”
황제를 처음 뵈었으면서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과 닮은 것만 신경 쓰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