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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3)화 (32/1,192)

제33화

황후는 현명하고 어진 사람이었고 황제와의 금슬도 매우 좋았다. 만일 그녀의 몸이 약하지 않았다면 귀비가 그 자리에 오르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은 몸을 숙이고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이 어리석은 여편네가 일을 오히려 망치려 하고 있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 백 승상은 술잔을 들고 동료들에게 향했다. 그때, 초왕이 반대편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둘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인사치레에 능한 백 승상은 곧장 웃는 얼굴로 안부를 물었다.

“왕야, 요즘 무탈하신지요?”

묵용감은 백 승상의 가식적인 모습이 눈꼴사나웠다. 그는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처럼 안부를 물어 왔지만, 사실 매일 같이 조정에서 보는 얼굴이었다. 묵용감이 입꼬리를 올려 한 번 웃어 보이더니 백 승상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감히 늙은 영감쟁이가 모자란 계집으로 본왕을 어찌 해 보려는 수작인 듯한데, 이 일은 조만간 반드시 갚아 줄 것이니 각오하시오.”

백 승상이 크게 당황하며 말했다.

“와, 왕야, 어찌 그리 모욕적인 말을 하십니까?”

“욕에 그쳤으니 다행인 줄 아시오. 때리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니까.”

묵용감은 어깨로 그를 밀친 뒤 큰 보폭으로 빠르게 가 버렸다.

백 승상은 뒤에서 있는 힘껏 침을 뱉고 싶었지만, 이곳은 황궁이었기 때문에 차마 그런 짓은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울분을 토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쳤다.

“둘이 귓속말을 나누는 것을 짐이 다 보았다네. 초왕과 화해라도 한 것인가?”

황제가 놀리자 백 승상은 더 이상 티를 내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사돈이 되었으니 잘 지내야겠지요.”

그 말에 황제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그는 무겁게 말을 꺼냈다.

“승상, 이 혼사는 짐이 추진한 것이라네. 자네가 미인을 보낼 것이라 단언하질 않았는가? 하지만 좀 보시게. 저리도 자그마한 초왕비라니. 초왕에게 자네 대신 딸을 키워 달라 보낸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백 승상이 땅에 무릎을 꿇으려 하자 황제가 곧장 제지했다.

“되었네. 짐을 속인 죄는 더 이상 묻지 않겠네. 허나 내가 무슨 낯으로 초왕을 본단 말인가?”

백 승상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붉어지기를 반복했다.

애당초 백천범을 초왕에게 보낸 것은 그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다른 딸들은 초왕에게 시집을 갈 수 없다며 죽네 사네 소란을 피워 댔기에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백천범은 자신의 집에 더 머물렀다간 머지않아 목숨을 잃을 것 같았다. 그는 아비로서 연명할 길을 찾아 준 것이기도 했다. 초왕이 자신의 원수이긴 해도 그의 성격상 작은 아이를 건드리진 않을 것이란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초왕의 저택에서 지내는 것이야말로 백천범이 가장 안전하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백 승상이 백천범과 그녀의 친모에게 그나마 해 줄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을 행동이기도 했다.

모든 면에서 최선의 선택이었기에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황제에게 미인이라는 말을 했을 때, 후에 백천범을 본 황제가 화를 낼 것이란 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왕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자신은 조정의 세력을 쥐고 있었다. 황제가 초왕을 견제할 땐 필히 자신과 한편에 서야 했으니 그리 겁낼 필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속셈이 탄로 난다 하더라도 황제에게 욕 몇 마디 얻어먹으면 그만이었다. 황제가 분노에 찬 초왕처럼 가슴을 발로 찰 일은 없었다.

황제의 태도는 그의 예상과 딱 들어맞았기에 그는 그저 겁먹은 시늉만 하며 황제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한쪽에선 귀비가 사람을 보내 이씨 부인을 불렀다. 귀비인 딸에게 친모 또한 극진한 예를 다해야 했지만, 오늘은 춘계 연회였으니 형식만 차리면 되었다.

귀비가 준비한 자리에서 두 모녀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겪은 치욕적인 일에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이씨 부인은 딸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 도둑년 봤니? 방금 전에 도끼눈을 뜨고 날 똑바로 쳐다보더라. 네 아버지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건너가서 뺨따귀를 날렸을 텐데.”

귀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친모였지만 시야가 너무 좁은 게 탈이었다. 그녀가 살짝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머니, 여긴 황궁입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가 계신 곳이니 어머니도 체통을 지키시어요.”

이씨 부인이 성내며 말했다.

“알았다. 너도 네 아버지와 똑같구나. 나는 머리가 장식인 줄 아느냐? 황제 폐하 면전인데 내가 진짜 손찌검을 했을 리 만무하지. 하지만 넌 다르질 않니.

너는 무려 황제 폐하의 부인인 귀비 마마이니 백천범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다. 고작 초왕의 부인 주제에, 누가 높고 낮은지는 한눈에 알 수 있는 게 아니더냐? 강벽아, 오늘 이 일은 네가 이 어미를 위해 어떻게 해서든 분풀이를 해 주려무나.”

귀비는 다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안은 나날이 부귀해지는데, 어머니는 점점 더 오만방자해졌다. 천하가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듯 굴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없애고 싶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황제가 사형을 명할 때에도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거늘, 그녀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늘 입술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무슨 말이든 가리지 않고 내뱉었다. 듣고 있는 사람도 곤란할 지경이었다.

사실 귀비는 아버지를 동정하고 있었다. 만약 어머니가 첩이었다면 그나마 조금은 나았을 것이다. 한 집안의 정실이 입만 열면 온갖 옹졸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니 집안 체면을 구기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귀비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때, 연회석에 앉아 있던 자그마한 몸이 조용히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 * *

궁궐에 아무리 좋은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한들, 백천범은 음식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연회상의 모든 음식을 맛보아도 기홍이 해 준 것보다 못했다.

고개를 들고 묵용감을 찾던 그녀는 투구와 갑옷 차림의 장군들 사이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술잔을 시원스레 비우는 게 꽤나 즐거운 듯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그녀가 봐 오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큰 키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더욱 출중해 보였고, 얼굴엔 쾌활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친왕의 예복을 입고 있었지만 위풍당당한 풍채는 갑옷을 입은 이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비범한 기상이 사람을 압도할 정도였다.

시선을 옮기니 저쪽에선 아버지와 황제 폐하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황제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곁눈질로 훔쳐볼 뿐이었다.

뚜렷이 보이진 않았지만 인자하고 자비로운 인상이었다. 말하는 모습도 온화해 보였다. 황제와 초왕은 형제였지만 생김새와 성격은 많이 달라 보였다.

황제를 계속 쳐다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백천범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단상 위에서 익숙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이씨 부인의 악랄한 눈빛이었다. 방금 전 수모를 겪었으니 귀비에게 일러바치러 갔을 것이다.

딸이 귀비의 자리에 오르자 이씨 부인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온종일 여러 사람을 핍박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시녀들에게 마구 손찌검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초왕의 저택은 상상했던 것만큼 끔찍하진 않았다. 초왕야는 소문으로 전해지는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얼굴이며 방울만 한 눈, 네모난 입, 들창코, 뾰족하게 튀어나온 이……. 그는 오히려 이런 소문과는 반대로 준수한 편이었다. 다만 성질을 잘 부리는 게 흠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볼 땐 정말이지 너무 무서웠다.

비록 그가 자신을 후원에 방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곤란하게 하진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머리를 빗겨 주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초왕야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사람 같았다.

연회상에 놓인 과실주가 달큼한 향을 내뿜자 식탐 많은 백천범은 연이어 두 잔이나 마시고 말았다. 그러자 조금 더운 느낌이 들더니 곧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공기에서도 술 냄새가 나는 듯했다. 조금 어지러웠던 그녀는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고 싶었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문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궁궐의 모든 문 앞은 소태감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보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이 앞쪽의 꽃밭을 바라보았다. 더 앞쪽에는 한눈에 담을 수 없는 큰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얀 두루미 몇 마리가 호숫가를 유유히 맴돌았다. 가느다란 목에 뾰족한 부리, 진홍빛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게 무척이나 거만한 모습이었다.

동물과 함께 있는 걸 좋아하는 백천범은 신나게 웃으며 뛰어갔다. 그녀는 두루미가 놀랄까 봐 너무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두루미의 경계심이 사라진 듯하자 성큼성큼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얘들아, 안녕. 너희 정말 예쁘다.”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두루미가 그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두루미가 도도하게 목을 비틀더니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백천범은 소매에 있던 간식을 꺼내 잘게 쪼갠 뒤, 땅에 뿌리며 두루미를 불렀다.

“이리 와서 먹어. 이건 황제 폐하께서 주신 거란다. 얼마나 맛있다고.”

한 마리가 먼저 쪼아 먹기 시작하자 나머지 두루미들도 달려들었다. 고귀해 보이는 머리를 숙이더니 빠르게 쪼아 댔다.

백천범이 헤헤 웃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쪼아 먹던 두루미 한 마리가 그녀의 앞까지 다가오자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두루미는 깜짝 놀란 듯 날개를 푸드덕거리더니 한쪽으로 날아갔다.

백천범이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겁낼 게 뭐 있어. 내가 때리는 것도 아닌데. 나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없는 착한 언니라고.”

“어머나, 누구랑 얘기를 하는 거람? 못 본 사이에 우리 다섯째가 새의 언어를 익혔나 보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백천범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일어서서 뒤를 돌아보니 귀비와 이씨 부인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재빨리 예를 갖췄다.

“안녕하십니까, 귀비 마마. 안녕하십니까, 고명誥命 부인.”

백 승상은 정일품의 최고 품계였기 때문에 이씨 부인 또한 일품 봉호를 받은 고명 부인이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늘 그녀에게 부인이라는 호칭만 사용했었다. 그러나 특별히 황궁에서 만난 만큼 예를 갖춰 고명 부인이라 부른 것이었다.

이씨 부인이 음흉하게 웃으며 백천범을 위아래로 훑었다.

“우리 다섯째는 초왕의 저택에서 잘 지내느냐?”

백천범은 두 손을 모아 쥔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커다란 두 눈에 생기가 가득했다.

“고명 부인의 관심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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