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어두워진 그의 표정에 조금 겁이 난 백천범이 조심스레 말했다.
“왕야, 저는 그냥 안 가겠습니다. 핑계 댈 만한 이유를 찾아볼게요. 병이 났다고 할까요?”
묵용감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어린 왕비만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안 간단 말이오.”
기홍의 손재주는 보통이 아니었다. 색이 고운 치마를 꺼내 와 재빨리 수선하더니 백천범에게 꼭 맞는 꽤 그럴싸한 옷으로 만들어 주었다.
머리는 선녀 머리 모양으로 빗은 뒤, 백합 장식이 달린 비녀를 꽂았다. 분홍색 진주 장식까지 더하니 단아하면서 고귀해 보이는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아직 그날 얻어맞은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백천범의 얼굴에는 기홍이 옅게 분을 칠해 주었다. 눈썹을 그린 뒤에는 미간에 비취색 꽃무늬 장식을 붙였고, 보드라운 분홍빛 입술에는 연지를 발라 색을 더했다. 밋밋했던 얼굴이 한순간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밖에서 기다리던 묵용감이 더는 참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다 되었느냐? 이미 많이 늦었다.”
“다 되었습니다.”
기홍이 백천범을 일으켜 몸을 돌려세웠다.
“왕야, 이렇게 꾸며 드렸는데 괜찮으십니까?”
묵용감이 곁눈질로 흘겨보더니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데리고 나갈 수 있을 정도면 된다.”
그가 곧장 발을 걷어 올리고 방을 나섰다.
조금 실망한 백천범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신이 보기에는 꽤 괜찮았는데. 왕야도 자신의 모습을 칭찬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칭찬은커녕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백천범의 표정을 읽은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왕야도 예쁘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아무 말도 안 하신걸요.”
“원래 사내대장부들은 수줍음이 많아서 예쁘다는 칭찬을 할 땐 눈으로만 말한답니다.”
백천범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큰오빠도 분명 사내대장부이지만, 그는 예쁘다는 칭찬을 자주 해 주었는데…….
기홍이 발을 걷어 올렸다. 가마가 문 앞에 놓여 있었고, 묵용감은 말에 올라타 있었다. 햇빛이 백천범을 비추었지만, 묵용감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평소엔 잡초 같더니만, 치장 한 번 했다고 잡초가 꽃이 되다니. 알다가도 모르겠군.’
그는 평소에 가마 대신 말을 타고 질주했지만, 오늘은 딸린 식솔이 있었기 때문에 가마 옆을 천천히 따라갔다. 자신이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 나가면 남은 백천범은 홀로 와야 했기 때문이다.
영구와 가동이 묵용감 뒤를 따라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수다스러운 가동이 영구에게 물었다.
“어이, 내가 저번에 말한 일 고민 좀 해 봤어?”
영구가 차갑게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하루종일 옆에서 떠드는데, 저번에 말한 일이 어떤 일인지 어떻게 안답니까?”
가동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너 장가가는 일 말이야.”
영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직접 나서지도 못하면서 저를 방패로 삼으려 하다니요.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까!”
나이는 어렸지만 백천범도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곧장 발을 걷어 올려 고개를 내밀었다.
“사부님, 누구를 좋아하시는 것입니까?”
영구가 차가운 눈빛으로 가동에게 물었다.
“왜 왕비 마마께서 형님을 사부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앞서가던 묵용감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깜짝 놀란 가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가동이 소리를 낮추어 백천범에게 애원했다.
“우리 착하신 왕비 마마님, 다른 이들 앞에서는 그렇게 안 부르시기로 하셨잖아요.”
백천범이 겸연쩍은 듯 혀를 내밀었다.
“죄송해요, 깜빡했어요.”
영구의 사늘한 시선이 다시 느껴지자 가동이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비 마마, 앞으로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묵용감이 속도를 늦춰 가마 옆으로 다가오더니 백천범에게 호통을 쳤다.
“부녀자가 거리에서 발을 걷어 올리고 외간 남자와 말을 섞다니.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이오?”
백천범이 깜짝 놀란 토끼처럼 곧장 고개를 집어넣었다.
* * *
춘계 연회는 벽복전碧福殿에서 거행되었다. 황제와 황후가 정중앙에 함께 앉아 있었고, 귀비는 뒤쪽에 앉아 있었다. 그 양쪽에 일렬로 연회상이 차려졌고 가운데에는 노래와 춤 따위를 공연하는 무대가 있었다.
백천범의 옷을 수선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 묵용감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 황궁에 들어서자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묵용감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다들 그의 옆에 있는 백천범을 곁눈질로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묵용감은 사람들의 인사에 화답하는 일을 유독 성가셔했다. 그는 대충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인사한 뒤, 백천범을 자신의 자리로 데리고 갔다.
백천범은 이런 자리에 익숙하지 않았다. 숨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정말 싫었다. 그녀는 불편함을 느끼며 묵용감을 따라갔다.
맞은편에서 악의에 가득 차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은 백천범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맞은편 연회석은 문무 대신들의 자리였다. 오늘은 식솔들과 함께 참석하는 연회였으니 분명 자신의 적모嫡母이자 백 승상의 정실인 이씨 부인의 시선일 것이다.
사실 그녀는 이씨 부인이 왜 그리도 자신을 싫어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처음엔 그녀를 조롱하기만 했다. 그러다 나중엔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 그녀를 없애려는 마음을 대놓고 드러냈다.
이씨 부인과 백천범은 고양이와 생쥐처럼 서로 쫓고 쫓기며 조마조마한 상황을 이어 갔다.백천범은 늘 괴롭힘만 당하며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밟힌 굼벵이가 꿈틀거리듯 이씨 부인에게 반격을 하였고, 그들의 악순환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종종 수습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되면 백 승상이 직접 나서 상황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이 또한 잠깐이었을 뿐 소란스러운 일은 또다시 일어났다.
백천범이 초왕의 저택으로 가면서 이씨 부인의 곁을 떠날 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마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씨 부인이 계속해서 못된 짓을 꾸몄기 때문이다.
비록 백천범을 해하지는 못했지만 두 명의 시녀가 목숨을 잃었다. 이씨 부인에게는 그저 미천한 목숨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겐 궂은일을 하는 시녀들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백천범은 달랐다. 비록 그 두 시녀가 자신에게 잘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갓 피어난 꽃다운 생명이 시든 일이었기 때문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생명을 한낱 잡초처럼 여기는 건 금수만도 못한 행위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백천범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용감한 자는 겁이 없다는 말처럼 그녀가 고개를 들고 곧장 맞은편의 이씨 부인을 바라봤다.
밝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에는 쉽게 얕볼 수 없는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가느다랗고 뾰족하게 날이 선 시선이 꽂히자 무방비 상태였던 이씨 부인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다. 백천범은 당당한 표정으로 냉소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백천범과 이씨 부인의 신경전은 묵용감의 눈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천범이 이씨 부인에게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적모를 당황하게 하다니. 제법이었다. 기개가 넘치는 게 초왕비로서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고개를 숙인 이씨 부인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났다. 백천범의 기에 눌린 게 한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은 승상의 부인이었다. 어찌 어린 계집에게 기선제압을 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구겨진 체면을 다시 세우고 싶었다.
마음을 다잡은 이씨 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번뜩이는 눈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악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백천범의 시선은 덤덤하게 이씨 부인을 스쳐 지나갔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백천범이 거들떠보지도 않자 이씨 부인은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두 번째 신경전에서도 그녀가 패배하고 말았다. 연이어 두 차례나 체면을 잃자 이씨 부인의 기분은 말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살기를 담아 백천범을 노려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범의 옆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시선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세상에나, 군신 초왕야였다.
그의 눈빛은 독을 탄 것보다 더 강렬했다. 눈 속에 만년설이라도 담긴 듯 눈빛만으로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씨 부인은 결국 그녀를 향한 시선을 맥없이 거두었고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이를 본 백 승상이 목소리를 낮추어 이씨 부인을 책망했다.
“여기는 황궁이오.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오. 초왕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그 보잘것없는 목숨이 당장에라도 날아갈 것이오!”
이씨 부인은 살짝 겁을 먹었다.
“서방님도 참, 황제 폐하께서 계신 자리에서 초왕이 어찌 그리 제멋대로 군단 말입니까?”
백 승상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초왕이 군신이란 칭호를 거저 얻은 줄 아시오? 초왕은 병권을 쥔 사람이오. 황제 폐하께서도 초왕의 눈치를 살필 때가 있거늘.
충고하건대, 제발 좀 가만히 계시오. 천범이는 초왕에게 시집을 갔으니 이제 초왕의 사람이오. 초왕이 관심을 주지 않는다 한들 다른 이가 업신여기게 놔두진 않을 거란 말이오.”
이씨 부인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관심은커녕 도둑이라 몰려 흠씬 두들겨 맞았거늘. 초왕이 어찌 백천범을 감싸겠는가?
연회가 중반부로 치닫자 장내는 더욱 떠들썩해졌다. 남자들은 함께 모여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자들도 술잔을 홀짝 들이켜며 집안일들을 늘어놓았다.
문관들은 그래도 체통을 중시했지만, 거친 성격의 무관들은 황제 앞에서도 상을 펼쳐 놓고 벌주놀이를 즐겼다. 몇몇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었다. 거기다 음악 소리가 더해지자 무녀들 사이에서 엉덩이를 흔들어 댔다. 한순간에 궁전이 떠나갈 듯 소란스러워졌다.
동월국은 개방적인 국가였다.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던 황제는 황후와도 함께 술을 마셨다. 몸이 약한 황후는 주량도 약했기 때문에 두 잔을 마신 뒤 곧장 술잔을 내려놓았고, 자리를 뜨며 귀비에게 황제 폐하를 모실 것을 당부했다.
황후의 말에 귀비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황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술잔을 든 채 흥을 돋우려 단상에서 내려갔다.
귀비는 눈썹을 움찔거리며 황후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자신에게 망신을 준 황후를 원망한 것이다. 황후는 자신은 무고하다는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씨 부인이 눈을 가늘게 찡그리더니 조용히 백 승상에게 말했다.
“황후가 아주 음흉한 구석이 있습니다.”
백 승상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감히 이곳이 어디인 줄도 모르고. 당장 멱살을 잡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정도였다.
이 천한 여편네는 생각이라는 것이 없었다. 주변에 듣는 귀가 이렇게나 많은데 그런 말을 내뱉다니. 황후를 모욕하는 것은 죽을죄거늘! 딸이 귀비가 되니 정녕 눈에 보이는 게 없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