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뒤뜰에 도착하니 누군가 가느다란 실로 노랑이의 발을 감아 나무에 묶어 놓은 것이 보였다. 요리조리 움직여도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자 병아리는 잔뜩 겁을 먹은 듯 발로 땅을 긁으며 끊임없이 울어 댔다.
어느 계집종이 옆에서 병아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 쪽으로 백천범이 다가오자 급히 예를 갖췄다.
“왕비 마마 안녕하십니까?”
백천범을 본 노랑이의 움직임이 더 심해졌다. 날개를 파닥거리는 게 그녀에게 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백천범이 노랑이에게 뛰어가며 말했다.
“왜 노랑이를 묶은 거야? 어서 풀어 줘.”
계집종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묶어 놓지 않으면 병아리가 도망간다고 녹하 언니가 잘 묶어 두라 명한 것입니다. 헌데 소인이 어찌 감히…….”
백천범이 작은 얼굴을 굳히며 왕비답게 말했다.
“나는 왕비다.”
오늘 왕야가 왕비 마마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건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왕야가 왕비에게 살갑게 대하기 시작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그저 시녀들에게 손찌검을 당한 왕비에게 왕야가 잠시 동정심을 가졌을 뿐,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돌아갈지는 어린 계집종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왕비의 영향력은 확실히 녹하와 기홍보다 작았다.
계집종이 꾸물거리자 백천범이 직접 실을 풀며 중얼거렸다.
“내 노랑이는 누구도 묶어 둘 수 없다.”
* * *
왕비가 도둑으로 몰려 흠씬 두들겨 맞은 일이 백 승상의 집에도 전해졌다. 이씨 부인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뻤지만 백 승상 앞에서는 웃음을 억눌렀다.
“초왕비가 병아리를 훔친 도둑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면 초왕의 체면이 어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조정에서 감히 서방님과 대적하는 일도 없겠지요.”
백 승상이 눈을 치켜뜨며 차갑게 말했다.
“부인은 초왕비의 성이 백씨인 걸 잊은 것이오? 우리 집안의 아이란 말이오.”
이씨 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출가외인이라 하지 않습니까? 시집간 딸은 그 집안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백 승상은 부인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차만 들이켰다. 한참 지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곧 황제 폐하께서 춘계 연회를 여실 것이니 강벽이를 보게 될 거요. 지난번에 서신을 보내왔는데 궁에 지출이 많아 사정이 좋지 않다 하는구려. 강벽이가 하인들에게 포상을 내릴 수 있게 부인이 금자 조각을 넉넉히 준비해 가도록 하시오 ”
이씨 부인이 그를 한 번 훑고는 투덜대기 시작했다.
“귀비 마마가 되면 친정으로 선물을 보내온다는데 우리 강벽이는 오히려 친정에 굶어 죽는다는 소리만 하는군요.”
백 승상이 살짝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의 친딸에게마저 이리도 모질게 구는 것이오? 훗날 강벽이가 더 높은 지위에 오르려면 당신의 도움 없이는 안 될 것이오.”
이씨 부인이 여전히 투덜댔다.
“황후 마마의 명이 그리 짧은 것 같지 않은데 어찌 그리 쉽게 그 자리에 오른단 말입니까.”
더 이상 참지 못한 백 승상은 찻잔을 힘껏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깜짝 놀란 이씨 부인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 승상이 쌀쌀맞게 말했다.
“큰일을 하려거든 더 넓은 시야를 가지시오. 그저 눈앞에 놓인 사소한 것들만 지키려 들지 말고. 우리 집안에서 힘겹게 귀비가 나왔으니 당신의 손으로 망쳐서는 안 될 것이오.”
이씨 부인이 입술을 삐죽거리다 이내 마음을 돌렸다.
“노여움 푸시어요, 서방님. 곧 저잣거리에 나가 금자를 바꿔 오겠습니다.”
할 말을 끝낸 백 승상은 더 이상 이씨 부인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 곧장 방을 나섰지만,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역시 변변찮은 집안 출신이라 식견이 너무 좁았다. 귀비의 친어미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불당으로 보내 버렸을 것이다.
백 승상이 떠나자 이씨 부인이 그를 마구 욕했다.
“엉덩이에 닿은 바닥이 아직 데워지지도 않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가다니! 여우 같은 년한테 홀려서 날마다 그년 방에만 붙어 있는 늙다리 같으니라고. 밤낮 가리지 않으니 몸이 저렇게 곯았지.”
백 승상의 정실이었지만 그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가리지도 않고 내뱉었다. 홍련은 퍽 난감해하며 부인을 말렸다.
“마님, 노여움 푸시어요. 그래도 승상께서 첩을 다섯만 들이시지 않으셨습니까. 둘은 마님께서 쫓아내셨고요.
지금 마님께서는 이 저택의 주인마님이신 데다가 귀비 마마의 어머니, 황제 폐하의 장모님이 아니십니까? 천하에 마님보다 존귀하신 분은 없습니다. 그러니 저자들과 같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어요.”
이씨 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진짜 장모도 아니질 않느냐? 방금 저이 말이 귀비 마마가 더 높은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던데. 네가 보기엔 가능하겠느냐?”
홍련이 깜짝 놀라 부인을 쳐다보았다. 이씨 부인은 정말 입조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함부로 입을 잘못 놀렸다간 머리가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씨 부인의 간절한 눈빛에 홍련은 어쩔 수 없이 답했다.
“승상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가능하겠지요.”
이씨 부인이 또다시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하지만 황후에게는 아들이 있는데 우리 귀비 마마는 아직 자식이 없지 않느냐?”
“귀비 마마께서 아직 어리시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어요. 귀비 마마가 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데다 황제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계시질 않사옵니까? 그러니 그런 걱정은 넣어 두시어요, 마님. 머지않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입니다.”
이씨 부인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래, 너의 말대로 되면 참 좋겠구나.”
* * *
매년 늦은 봄이 되면 황궁에서 춘계 연회가 열렸다. 춘계 연회는 동월국의 건국 때부터 이어진 전통이었다.
원래는 만백성의 평안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전통 의식이었지만, 황궁의 연회가 점차 커지면서 황제와 신하들도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 백성들은 이날 가족들과 함께 쑥떡이나 달걀찹쌀죽 같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고, 아이들의 이마에 붉은 연지를 찍어 건강하게 자라길 기원했다.
춘계 연회에 참석할 땐 식솔들을 데려와야 했다. 지금까지 홀로 참석했던 초왕야는 올해 혼인을 하였으니 반드시 왕비와 함께 가야 했다.
그는 매우 난처했다. 정녕 어린 계집아이를 데려가야 한단 말인가? 그를 우스갯거리로 삼을 날만 기다리는 많은 자들에게 원수의 사위가 된 모습을 보여 주면 꽤나 볼만한 일이 될 것이었다.
초왕야는 그자들이 바라는 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황제가 초왕야를 불러 이야기했다.
“아내를 얻었는데도 황궁에 데려와 태비 마마와 짐에게 보여 주지 않으니 이미 황실 규율을 어긴 것이다.
백 승상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짐이 모르는 바 아니니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겠다. 다만 태비 마마께서 이번 연회에 며느리를 만나 보시겠다며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다는 걸 알아라. 절대 실망을 끼쳐 드려선 안 된다.”
황제가 태비 마마를 언급하며 자신을 압박하자 초왕야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말에 승낙했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그가 사람을 보내 백천범을 부르려 하자 기홍이 웃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소인 방에 계십니다. 소인이 바로 왕비 마마를 모셔 오겠습니다.”
초왕야는 손을 내저으며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잠시 머뭇댔다. 그러다 기홍의 방 앞에 서서 고개를 내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의자에 앉아 수를 놓고 있는 백천범의 옆모습이 보였다. 작은 몸을 곧게 세우고 한 손에는 수틀을, 다른 한 손에는 바늘을 들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놓는 모습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제법 진지해 보였다.
자수는 양반집 규수들이 꼭 배워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시집갈 상대를 찾을 때 바느질을 할 수 있는 여인들은 더욱 이목을 끌 수 있었다.
초왕야는 백천범을 어린아이로만 생각했었지만, 정신을 집중해 수를 놓는 모습을 보니 꽤나 다소곳해 보였다. 흘러내린 앞머리가 눈썹을 살짝 가리자 어린 여인 같은 느낌도 풍겼다.
순간 호기심이 생긴 그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천범의 솜씨가 뛰어난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처에도 가기 전에 그녀가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묵용감의 얼굴을 보자마자 재빨리 일어나 예를 갖췄다.
“다녀오셨습니까, 왕야.”
그녀가 수틀을 몸 뒤로 숨기자 초왕야가 웃으며 물었다.
“왜, 차마 내놓을 수가 없는 것이오?”
백천범이 겸연쩍게 말했다.
“솜씨가 좋지 않습니다. 보지 마시어요.”
겸손의 말이라 여긴 초왕이 백천범의 말을 받아쳤다.
“솜씨가 좋지 않은 건 이미 알고 있으니 본왕이 한번 보겠소.”
그의 완강한 모습에 백천범은 수틀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처음엔 잠시 놀라더니 이내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솜씨를 이미 알고 있다고 했던 말은 장난이었다. 하지만 솜씨를 논할 수준은커녕, 그야말로 엉망 그 자체였다. 수에 대해 잘 모르는 그조차도 봐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되지도 않는 수를 한 땀 한 땀 놓고 있었으니 백천범의 인내심이 참으로 대단했다.
초왕이 자신을 놀리자 백천범의 얼굴이 한껏 붉어졌다.
“그러게 보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다 완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더 할 게 뭐가 있소. 더 이상 실 낭비하지 말고 일찌감치 푸는 게 낫겠소.”
백천범은 수틀을 가져와 품에 안더니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저희 유모가 무슨 일이든 중간에 포기해선 안 된다고 했어요.”
“알겠소. 더 하시오. 완성하면 또 얼마나 재미있는 작품이 나올지 나도 봐야겠소.”
그가 발걸음을 돌려 몇 발짝 가더니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 나와 함께 황궁에 가야 하니 준비하시오.”
백천범이 깜짝 놀라 물었다.
“황궁에는 왜 가는 것입니까?”
“내일 황궁에서 연회가 있소. 식솔과 함께 참석해야 하니 치장도 조금 하는 게 좋겠소. 본왕의 체면을 생각해서 말이오.”
백천범이 그 말에 알겠노라 대답했다. 용무를 마친 묵용감은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 * *
묵용감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백천범을 회림각으로 부르고 기홍과 녹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백천범에게 직접 치장하라고 하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마음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의복이 너무 수수하거나 평범하여 연회에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입궁할 때에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은 황제의 체면을 깎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백천범이 들고 온 혼수는 그저 구색 맞추기였을 뿐이었다. 의복 또한 그녀가 평소에 입는 몇 벌이 거의 다였다. 옷은 그렇다 쳐도 함께 가져온 옷감마저 싸구려의 저급한 원단이 전부였다. 화가 난 묵용감의 얼굴이 붉다 못해 거뭇해졌다.
왕비의 혼수를 이리도 궁상맞게 보내는 집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백여름 이 망할 놈은 어떻게든 자신이 잘못되기만을 바라는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