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0)화 (29/1,192)

제30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얘기에 기홍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말도 안 돼. 왕야께서 왕비 마마의 머리를 빗겨 주신다고? 왕비 마마를 맘에 들어 하시는 거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오늘 크게 성을 내시면서 학평관 어르신을 걷어찬 것도 모자라 부엌 시녀들에게 곤장 서른 대를 내리셨잖아. 결국엔 왕비 마마가 당한 일 때문에 왕야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는 거지!”

“하지만 왕야와 백 승상 집안은 서로 원수지간이라 계속 왕비 마마를 멀리하셨잖아.”

기홍은 여전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왕비 마마는 아직 어린아이신데, 왕야가 좋아하실 만한 여인상도 아니고.”

“그거야 모르지.”

원래의 머리 모양으로 다시 빗어 올린 녹하가 한결 기분이 좋아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 마마를 가엽게 여기셔서 그러실 수도 있고. 오늘 왕비 마마는 누가 봐도 너무 힘든 일을 겪으셨잖아. 너도 봤지? 왕비 마마 몸에 시퍼렇게 멍든 흔적들 말이야.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정도니 그 시녀들도 벌 받아 마땅하지.

우리 왕야가 겉으로 보기에는 무서워도 마음은 선하시잖아. 동정심에 왕비 마마께 잘해 주시는 것일지도 모르지, 뭐.”

두 시녀가 방에서 재잘거리는 동안 묵용감이 다시 행랑채에 들어섰다. 그의 손에 장신구가 들려 있자 백천범은 실망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걸 상으로 내리시느니 차라리 먹을 것을 주시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을 받으려 하자 묵용감이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앉으시오.”

백천범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뒤에 선 묵용감이 잠시 고민하더니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기에 앉으시오.”

그가 가리킨 것은 기홍과 녹하의 화장대였다.

묵용감이 화장대 앞에서 장신구를 꽂아 주려는 줄로만 안 백천범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따랐다.

묵용감이 그녀의 뒤에 서서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올려 백천범의 머리를 쓸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까맣고 부드러웠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게 손에서 곧장 미끄러져 내려갔다.

머리를 빗는 과정은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빗으려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혹여 머리카락을 세게 쥐어 백천범이 아프기라도 할까 걱정이 되었다. 또한 이왕 하는 거 완벽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쉽사리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리던 백천범은 이상한 낌새에 눈을 크게 뜨고 구리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묵용감이 자신의 머리를 빗겨 주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정중히 얘기했다.

“왕야, 아무렇게나 대충 빗겨 주시면 됩니다.”

묵용감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본왕은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오. 차라리 안 하면 안 했지 대충 할 수는 없소. 빗다가 조금 아프거든 참고, 많이 아플 땐 말하시오. 어쨌든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일은 없을 테니.”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용감이 이미 백천범의 머리카락을 쥐고 있었다. 그 바람에 백천범이 끄덕거릴 때 머리카락이 당겨졌다. 그녀는 짧게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픈 것이 아니라 놀란 마음에 저절로 나온 소리였다. 묵용감이 곧바로 손을 내려놓았다. 조금은 성가신 기분이 든 그가 물었다.

“이것도 아프오?”

백천범이 혀를 빠끔히 내밀며 말했다.

“아픈 것이 아니라 놀란 것입니다. 이제 소리 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묵용감이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커다란 손은 참으로 따스했다. 손이 귓가를 스치자 백천범은 다시 큰오빠를 떠올렸다. 백장간의 손도 이렇게 크고 따스했다. 손을 잡을 때마다 그의 손에 박힌 굳은살이 손바닥에 스쳐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세심하게 머리를 빗던 묵용감은 종종 구리거울을 힐끔거렸다. 백천범이 아파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멍한 눈빛으로 입가에 옅은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묵용감은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이의 머리를 빗겨 주는 장한 일을 마무리했다.

그는 완벽한 머리 모양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처음 하는 일이라 군데군데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백천범은 기분이 좋았는지 구리거울에 제 모습을 연신 비추어 보며 신이 나서 물었다.

“예뻐요?”

자신의 솜씨였으니 스스로 치켜세우는 것은 당연했다.

“완벽하오.”

그가 진주 장신구를 양쪽에 하나씩 꽂자 꼭 갈고리 두 개를 세워 놓은 듯했다. 백천범의 미적 감각은 그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기분이 날아갈 듯 좋으니 왕야가 빗겨 준 대로 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녀 또한 머리 모양에 그리 까다로운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진주 장신구가 왠지 모르게 낯익었다.

“왕야, 이 장신구는 녹하 언니 것이죠?”

“…본왕이 상으로 내린 것이었소. 마음에 드오? 마음에 안 들거든 본왕이 다음에 다른 것을 주겠소.”

백천범은 두 갈고리가 전체 머리 모양을 망치는 데다 녹하의 것이라니 하지 않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완곡한 어조로 말했다.

“녹하 언니에게 돌려주시는 게 좋겠어요. 조금 성숙해 보이는 장신구라 언니 머리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묵용감이 말했다.

“일단은 꽂고 있다가 돌아갈 때 돌려주시오.”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기홍에게 닭고기 요리를 하라 할 테니 잠시 기다리시오.”

그의 말에 백천범은 번뜩 노랑이가 떠올랐고, 놀란 마음에 울상이 되었다.

“왕야, 닭고기는 안 먹을래요. 노랑이는 제 동생인걸요.”

“노랑이를 잡는 게 아니오. 그 병아리는 왕비가 당한 일과 맞바꾼 것이 아니오? 본왕도 그리 무정한 사람은 아니오. 왕비에게 준다고 했으니 이제 왕비의 것이오.”

그제야 기분이 좋아진 백천범은 왕야가 빗어 준 머리를 기홍에게 자랑하려고 신나게 뛰어나갔다.

* * *

기홍은 부엌에서 한창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때 방에서 나오던 녹하가 백천범과 마주쳤다.

“어머나! 어디서 오신 아기씨랍니까? 머리를 너무 예쁘게 빗으셨습니다. 어머, 장신구도 하셨네요. 손오공이 여의봉이라도 꽂아 준 것입니까?”

백천범은 부끄러운 마음에 서둘러 장신구를 빼내어 녹하에게 돌려주었다.

“녹하 언니 것이에요. 돌려 드릴게요.”

녹하도 감히 돌려받을 수 없었다. 왕야가 가져간 것을 왕비가 돌려주면 자신이 왕비를 압박해 돌려받았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제가 어찌 감히 돌려받겠습니까? 왕야께서 주신 것이니 왕비 마마 것이지요.”

백천범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장신구는 지금 머리 모양과 조금 안 어울리는걸요. 왕야께서도 내일 다른 걸 주신다고 녹하 언니께 돌려드리라고 하셨어요.”

백천범의 말에 녹하는 그제야 장신구를 돌려받았다. 사실 장신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다른 이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 백천범의 태도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어서 들어가셔서 왕비 마마의 기홍 언니에게 보여 주시지요.”

잽싸게 부엌으로 들어간 백천범이 언니를 부르며 머리를 흔들었다.

“예뻐요? 왕야께서 빗겨 주셨어요.”

역시 왕야는 왕비의 머리를 빗겨 주기 위해 자신들을 찾은 것이었다. 녹하의 예상이 정말 들어맞자 기홍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쁩니다. 왕야께서 솜씨가 정말 좋으십니다.”

왕야의 솜씨는 솔직히 그저 그랬지만 인내심만큼은 대단했다. 몇 번이나 잠이 들어 버린 백천범은 눈을 뜰 때마다 허리를 굽히고 정성을 다해 자신의 머리를 돌돌 말아 올려 주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백천범도 그가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럴 수 있다면 정말인지 더할 나위 없이 좋을 듯했다.

하지만 그저 허황된 꿈일 뿐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백여름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왕야가 유난히 그녀를 가엽게 여긴 것은 그의 하인들이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일 것이다. 욕심은 스스로를 괴롭게 할 뿐,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건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부엌은 기름이 튀고, 연기가 많이 났기 때문에 기홍은 백천범이 데일까 걱정이 되었다. 밖에서 기다리라는 말에도 백천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눈이 빠져라 솥 안의 닭고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가여웠던 기홍은 오늘은 특별히 그녀에게 더 잘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릇 하나를 꺼내 반 국자 정도 음식을 덜어 준 뒤, 맛을 보라고 권했다.

백천범은 한 손으로는 그릇을 받쳐 들고, 한 손으로는 고기 한 덩이를 신나게 집어먹었다.

마침 부엌을 찾아간 묵용감의 눈에 이 모습이 담겼다. 높게 올린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어린아이가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포동포동한 손으로 신나게 닭고기를 뜯고 있었다. 커다란 눈에는 기쁨이 가득 묻어났고, 입술엔 기름이 번지르르했다.

그가 다시 백천범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른 곳은 다 말랐지만 두 손만 포동포동한 게 꼭 만두 같았다. 눌린 찐빵처럼 말아 올린 머리까지 얹혀 있으니 보면 볼수록 민속화 속 여자아이 같았다.

묵용감을 본 녹하가 급히 그를 불렀다.

“왕야,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연기가 맵습니다.”

왕야를 부르는 녹하의 목소리에 백천범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무릎에 두었던 접시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깨지진 않았지만 닭고기 몇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더러워졌다. 그녀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아이, 아까워라.”

백천범은 곧장 쪼그려 앉아 닭고기를 줍기 시작했다.

묵용감이 말했다.

“뭐 하러 줍는 것이오, 이미 먼지가 묻었소.”

“씻어 먹으면 괜찮습니다.”

그녀가 손에 쥔 닭고기를 입으로 후후 불자 녹하가 재빨리 낚아챘다.

“왕비 마마, 닭고기가 한 솥 가득 있으니 드시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백천범은 멋쩍게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백천범을 지켜보던 묵용감은 또다시 마음이 아려 왔다. 백여름은 왜 자신에게 이렇게 어린아이를 보냈단 말인가? 설마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그렇게 생각하니 참으로 같잖았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화원으로 향했다.

백천범은 조금 속상했다. 맛있는 닭고기를 반밖에 못 먹고 바닥에 떨어뜨리다니! 너무 아까웠다. 이게 다 왕야 때문이었다. 아무 까닭도 없이 괜히 부엌에 와서는 자신을 놀라게 하다니.

하지만 백천범은 건망증이 심했기 때문에 이 일은 금세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아직 밥이 다 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녀는 노랑이를 보러 뒤뜰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