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몇 걸음 내딛던 그가 기홍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난번 네게 상으로 주었던 옥고玉膏가 아직 남았느냐?”
“예, 상처를 없애고 새살을 돋게 하는 데 아주 좋다고 하여 소인이 이미 발라 드렸습니다.”
묵용감이 짧게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그저 그런 생김새라 할지라도 우리 집에서 못 볼 꼴이 되어서는 안 되지.”
묵용감이 기홍의 방에 도착하니, 녹하가 백천범의 팔에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방에서 약재 냄새가 풍겨 왔다.
접어 올린 소매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보고 있자니 말라도 너무 말라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티 하나 없이 투명한 피부를 가진 그녀였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시퍼런 멍만 적어도 열 개는 되어 보였다. 어떤 곳은 손으로 꼬집힌 듯했고, 어떤 곳은 손가락으로 짓눌린 듯했다. 울긋불긋한 상처 자국이 새하얀 피부 위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묵용감은 또다시 가슴이 미어졌다. 백천범이 아니라 다른 어떤 이였어도 분을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위로가 담긴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옥고를 발랐으니 흉이 지지 않고 금방 나을 것이오.”
기홍이 온 줄 알았던 백천범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곧장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고 웃었다.
“흉이 져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몸에 있는 상처인걸요.”
묵용감이 자리에 앉았다.
“아주 긍정적이구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얻어맞거나 넘어지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었을 정도예요.”
묵용감이 물었다.
“친정에 있을 때 이씨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소?”
백천범이 덤덤히 답했다.
“네, 좋지 않았습니다.”
“부인이 당신을 괴롭히는데 백 승상은 무얼 했단 말이오?”
“안 그래도 매일 넘쳐나는 일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으셨는데, 어찌 저에게 관심을 줄 수 있으셨겠어요.”
묵용감은 백 승상 집안의 추악한 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녹하가 연고 뚜껑을 닫고 일어나려 하자 그가 물었다.
“다 바른 것이냐?”
“예, 왕야. 다 발라 드렸습니다.”
대답을 마친 녹하가 물건을 정리했다.
“다들 나가 있거라. 왕비와 할 말이 있다.”
기홍은 고된 일을 겪은 왕비에게 왕야가 또 모질게 대할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기홍의 표정을 읽은 묵용감이 손을 내저었다.
“나가거라. 본왕이 왕비를 잡아먹을 일은 없을 테니.”
녹하가 기홍을 잡아끌며 방을 나섰다. 기홍을 멀리 끌고 간 녹하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겁낼 게 뭐 있어? 왕야께서 왕비 마마와 단둘이 계시겠다는데 얼마나 좋은 일이니!”
기홍도 다른 게 걱정된 것은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이렇게 큰일을 당했는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잖아. 나였으면 그렇게 못했을 거야. 왕비 마마께서 강직하시긴 하지만 결국 백 승상 댁 따님이시니 혹시나 왕야께서…….”
“그럴 일 없어. 왕야께서도 어린 왕비 마마와는 상대하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잖아. 후원에서 벌어진 사건이 마무리되면 다시 결정하시겠다고 한 거 기억 안 나?”
기홍이 갑자기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아 맞다, 왕비 마마의 병아리는? 도망가진 않았겠지?”
“걱정 마, 계집종한테 잘 지키라고 했으니깐. 방 뒤쪽에 묶어 두었을 거야. 왕비 마마도 참, 죽기 살기로 맞은 게 고작 저 병아리 때문이라니.”
* * *
모두 물러가자 백천범은 조금 긴장이 되었다. 묵용감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민망했던 묵용감도 한참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오늘 왕비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한 것 같소.”
“억울하지 않습니다.”
백천범이 말했다.
“왕야께서 저를 위해 일을 해결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그자들이 저를 때린 건 잘못이지만, 제가 먼저 병아리를 훔쳤고 찐빵도 가져간 것입니다. 왕야께서 오늘 내리신 벌은 조금 과한 것 같습니다.”
묵용감이 말없이 눈을 깜빡였다. 이 계집아이가… 자기 때문에 나서 주었건만! 고마워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신은 왕비요. 찐빵을 가져가든 병아리를 가져가든 훔쳤다고 할 수 없소. 그자들이 당신에게 손을 댄 것이야말로 중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오. 우리 저택에 그런 비열한 노비는 있을 수 없소.”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본왕은 공명정대한 사람이오. 내가 당신의 아버지와 원한이 있는 것은 맞지만, 당신과 원한이 있는 것은 아니니 억울함을 풀어 주겠소. 소원을 한 가지 말해 보시오. 원하는 것을 말하면 본왕이 들어주리다.”
새까만 눈동자로 묵용감을 올려다보는 백천범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멍해 보였다.
“무엇이든 다 되는 것입니까?”
“그렇소. 장부의 일언은 중천금이라 하질 않소. 음식, 옷, 장신구, 하인 등 뭐든지 가능하오.”
그가 제시한 조건이 매우 좋으니 백천범이 기홍을 줄 수 있냐고 물을지도 몰랐다. 물론 기홍을 내 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손맛이 좋은 시녀를 보내 줄 수는 있었다. 그리하면 남월각에서의 음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 옆에서 백천범을 보호해 준다면 악랄한 남월각 시녀들의 기세 또한 꺾일 것이다. 그는 만일 그녀가 큰 욕심을 부린다 해도 마음의 빚을 덜기 위해 그리해 줄 셈이었다.
백천범은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가닥을 배배 꼬며 느릿느릿 말했다.
“왕야께서는 머리를 빗을 줄 아십니까?”
묵용감이 대꾸했다.
“아?”
“왕야께서 제 머리 좀 빗겨 주셔요.”
작은 얼굴을 들어 올린 백천범이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자신을 구해 주러 왔을 때, 말에서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 첫째 오빠가 생각난 것이었다.
백 승상의 저택에서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은 첫째 오빠 백장간白長簡이었다. 첫째 오빠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얼굴도 준수했다.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들어가던 그는 성격도 자상하여 백천범에게 늘 살갑게 대해 주었다.
못된 시녀들이 백천범을 괴롭힐 때마다 앞장서서 그녀를 보호해 주었고, 종종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 흐트러진 머리를 곱게 묶어 주기도 했다.
의젓했던 첫째 오빠는 후에 장수가 되었다. 늘 전쟁터를 누비는 탓에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묵용감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뭐라고 하였소? 머리를 빗겨 달라?”
“예. 머리카락이 다 헝클어졌습니다. 왕야께서 저 대신 좀 빗겨 주세요.”
백천범은 여전히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묵용감이 대꾸했다.
“…본왕은 머리를 빗길 줄 모르오.”
반짝이던 백천범의 눈동자가 맥없이 빛을 잃었다. 입술을 앙다문 그녀가 조금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모르시는구나…….”
묵용감이 물었다.
“어째서 내게 머리를 빗겨 달라는 것이오?”
“예전에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왕야처럼 절 구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 머리를 빗겨 주기도 했지요. 제게는 그 일이 아주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묵용감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누가 그녀의 기억에 남길 원한단 말인가?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기다리시오.”
그가 왜 기다리라고 하는지 백천범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른 상을 주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정말 상을 주려는 거라면 기홍 언니를 보내 주는 게 가장 좋았다. 그게 안 된다면 점심만이라도 기홍과 함께 먹고 싶었다.
방문을 나선 묵용감이 녹하와 기홍을 발견하고는 고갯짓으로 그녀들을 불렀다. 묵용감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기홍과 녹하도 서둘러 그를 따라 들어갔다.
“왕야, 분부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묵용감이 가만히 녹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높게 올린 머리에 진주로 만들어진 장신구 여러 개를 꽂고 있었고, 올림머리 한가운데에는 은장식이 달린 큼직한 비녀를 꽂고 있었다. 가느다란 은장식을 여러 겹으로 늘어뜨린 비녀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다시 기홍을 바라보니 녹하보다는 단정한 머리였다. 긴 머리를 절반만 묶어 올린 뒤, 비취옥으로 만들어진 꽃무늬 장신구와 진주알로 단장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간결해 보이면서도 기품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둘 다 묵용감이 원하는 머리 모양은 아니었다. 그는 해마다 설을 장식하는 민속화 속 여자아이의 머리를 해 주고 싶었다. 그 아이처럼 양쪽으로 쪼글쪼글 말아 올린 머리가 백천범의 반짝이는 까만 눈에 잘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상 입을 떼려 하니 조금은 쑥스러웠다.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에 기홍과 녹하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해했다.
묵용감이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초왕이었다. 자신이 한 말은 엎질러진 물처럼 절대 되돌릴 수 없었다.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머리를 빗겨 주는 것뿐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녹하와 기홍에게 자신이 생각하던 머리 모양을 손으로 그려 보였다.
녹하와 기홍은 곧바로 그가 말하는 머리 모양을 알아챘다. 다만 그가 그런 걸 궁금해하는 게 이상할 뿐이었다.
기홍이 말했다.
“왕야, 그것은 머리를 높게 올린 뒤 가장 윗부분을 양쪽으로 나누어 묶는 머리인 듯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머리를 기홍이 알아차리자 묵용감이 무릎을 탁 치며 물었다.
“그 머리를 할 줄 아느냐?”
“예, 왕야. 아주 간단합니다.”
신이 난 묵용감이 녹하를 가리키며 기홍에게 말했다.
“한번 해 보거라.”
녹하가 난감해 하며 말했다.
“왕야, 소인이 어린아이도 아니고,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머리입니다.”
“말이 많구나.”
묵용감이 조금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네 머리로 시범 좀 보여 달라는 것뿐이다.”
녹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기홍에게 자신의 머리를 맡겼다. 그녀는 마음속 의문이 점점 커져만 갔다.
‘왕야께서 대체 왜 저러시는 거람. 그건 어린아이들이 하는 머리 모양인데……. 아, 왕비 마마! 왕비 마마는 어린아이니까 설마…….’
생각할수록 그녀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구리거울 너머 묵용감의 표정을 살펴보니 참으로 열심히 몰두하고 있었다.
묵용감은 무관 출신이었지만 굉장히 섬세한 편이었다. 기홍이 한 번 빗질을 할 때마다 세심히 기억해 둔 그가 녹하의 머리에 꽂혀 있던 장신구 두 개를 빼내며 말했다.
“내일 새 걸로 다시 주겠다.”
그가 나간 뒤 기홍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왕야께서 어쩐 일로 여인의 머리에 저리 관심을 보이신담? 네 장신구까지 가져가시고 말이야. 누구를 주시려는 거지?”
녹하가 구리거울로 자신의 머리를 들여다보더니 이내 허공을 바라보며 체념한 듯 말했다.
“에휴, 내 머리나 좀 풀어 줘.”
기홍이 그녀를 약 올렸다.
“귀여운데, 왜. 왕야께서 이 머리를 좋아하시니 풀지 말고 내버려 둬.”
“왕야께서 좋아하시는 건 내 머리가 아니고 우리 방에 계신 그분이야.”
녹하가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왕야께서 왕비 마마의 머리를 빗겨 주시려고 우리한테 물어보신 거라고. 이제 봐라, 왕비 마마가 방에서 나올 땐 이 머리를 하고 계실걸. 내 장신구까지 꽂은 채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