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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8)화 (27/1,192)

제28화

“전부 끌고 가거라. 관리인은 채찍 스무 대, 나머지는 곤장 서른 대 형에 처할 것이다.”

백천범을 바라보던 영구가 입술을 움찔댔다.

“왕야. 소인이 형을 집행하겠습니다.”

부엌 시녀들은 너무 놀라 숨도 쉴 수 없었다. 심지어 두 명은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렸다. 영구는 저택의 귀신마저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만일 그가 형을 집행한다면 인정사정없이 매질을 당할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한바탕 소란을 잠재운 뒤, 묵용감의 시선이 다시 백천범을 향했다.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걸을 수 있겠소?”

“걸을 수 있습니다.”

백천범이 팔뚝을 꼭 감싼 채 괜찮다는 듯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꾀죄죄한 얼굴로 묵용감을 바라보며 웃었다.

“뛰는 것도 문제없습니다.”

묵용감의 눈에 비친 백천범은 조금 모자란 아이 같았다. 호되게 맞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불쌍한 모습을 보일 텐데 그녀는 오히려 생기가 넘쳐 보였다.

맞은편에서 학평관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무마하려는 듯 왕비가 탈 가마까지 가져왔다.

묵용감은 그를 흘겨볼 뿐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타시오.”

묵용감이 백천범에게 말했다.

하지만 백천범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왔다 갔다 하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어디 갔지?”

“무엇을 찾는 것이오?”

“병아리요.”

“…….”

병아리 때문에 이 꼴이 되었는데 아직도 도둑놈 심보를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배가 고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 여겼다.

“닭고기가 먹고 싶으면 기홍에게 음식을 만들어 달라 하겠소.”

“아닙니다. 그 병아리는 절 아는 듯했습니다. 저랑 같이 가고 싶어 했어요.”

묵용감은 그녀의 말이 우스웠다.

“왕비를 안다 하였소? 친척이라도 되는 것이오?”

백천범이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왕야, 어찌 그리 돌려서 욕을 하십니까?”

“왕비 입으로 병아리가 왕비를 안다 하지 않았소.”

“왕야께서는 돌아가십시오. 저는 노랑이를 찾은 다음에 가겠습니다.”

하, 이름까지 지어 줬겠다. 별수 없다는 듯 묵용감이 인부들에게 외쳤다.

“멍하니 서서 무엇 하는 것이냐? 어서 왕비를 도와 노랑이를 찾거라.”

참나, 이게 무슨 일이람. 자신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

일순간 주변이 난장판이 되었다. 몸종들은 병아리들을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어느 게 백천범이 말한 노랑이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아무 병아리나 잡을 셈인 듯했다.

백천범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급히 소리쳤다.

“노랑이가 밟히겠어요. 절대 밟으면 안 돼요!”

백천범이 드디어 노랑이를 발견했다. 노랑이는 사람들이 쫓아오는 게 무서웠는지 날갯짓을 하다가 넘어져 파닥파닥거리고 있었다.

백천범이 큰소리로 외쳤다.

“다들 멈추세요!”

이제 감히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다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정신없던 상황이 안정을 되찾았다. 백천범이 몸을 숙여 노랑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노랑아, 언니한테 와.”

묵용감이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왕비가 병아리의 언니라니. 자신은 병아리의 형부가 되는 꼴이 아닌가? 화가 난다기보단 그저 가소로웠다. 우스운 계집아이가 우스운 일을 참 잘도 저질렀다.

병아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백천범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병아리를 타일렀다.

“날 못 알아보겠니? 나야, 얼굴이 조금 더러워지긴 했지만 깨끗하게 씻으면 바로 알아볼걸.”

혹여 병아리가 놀라 도망이라도 갈까 봐 다들 숨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병아리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내딛고 멈추었다가 머리를 양옆으로 갸웃거리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그러다 겨우 백천범의 발밑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병아리를 안아 올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

백천범은 고개를 들고 묵용감을 바라보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병아리에게 속삭였다.

“왕야께서 오셨으니깐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묵용감은 목을 한 차례 가다듬고는 성가시다는 말투로 말했다.

“무얼 꾸물거리는 게요, 어서 타시오.”

백천범은 그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을 구해 주었고, 자신을 때린 이들에게 벌까지 주었으니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노랑이를 품에 안은 채 가마에 올라탔다.

가볍게 말에 올라탄 묵용감은 고삐를 쥐고 유유히 앞으로 나아갔다. 가마꾼들은 가마를 든 채 학평관의 지시를 기다렸다.

학평관은 마음이 복잡했다. 왕비를 남월각으로 모셔야 하는지, 왕야와 함께 회림각으로 모셔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왕야에게 물어보기도 겁났던 그는 재차 고민한 끝에 가마꾼에게 지시했다.

“서둘러 왕야를 따르거라.”

묵용감 일행이 회림각으로 향하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 조리사가 탄식하며 말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람. 부엌 시녀들도 벌을 받으러 가고 관리인도 없으니, 점심은 어찌 한단 말인가?”

누군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아침에 먹고 남은 찐빵을 나누어 줘야지요. 오늘은 찐빵과 짠지로 때워야지 별수 있겠습니까?”

조리사가 말했다.

“찐빵은 이제 진저리가 나는구먼, 그래. 왕비 마마께서는 어찌 그리 찐빵을 좋아하신단 말이오. 미리 언질이라도 해 주셨으면 사람을 보내 곧장 후원으로 가져다드리는 건데, 직접 오셔서 가져가시다니. 이건 일부러 우리를 골탕 먹이려 하는 것이 아니오?”

“쉿, 조용히 하시게. 누가 들었다간 자네도 곤장을 맞아야 할 걸세. 오늘은 운 좋게 넘어간 것뿐이니 그저 다행이라 여기게.”

“무서울 게 뭐가 있소? 왕야와 총 관리인 어르신도 가셨겠다, 내가 없는 말을 지어 낸 것도 아닌데, 뭐.”

그가 목소리를 잔뜩 깔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싫어하여 후원에 방치한다 하지 않았소? 헌데 방금 전 상황을 보니 왕야가 꽤 잘 대해 주시는 듯하오.”

“뭘 모르는 소리. 왕야가 가장 싫어하는 게 약한 자를 괴롭히는 거라고. 왕비 마마같이 어린아이가 부엌 시녀들에게 그렇게 얻어맞았는데, 멀쩡한 인간이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는 게 정상이지.

게다가 왕비 마마는 백 승상 댁 따님이 아닌가? 왕야께서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길 원치 않으셨겠지. 아가씨를 학대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백 승상께서 황제 폐하께 고하는 건 당연지사일 테니.”

관리인이 없으니 다들 모여 잡담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 * *

그사이 가마꾼들은 회림각에 들어섰다.

이미 소식을 접한 기홍과 녹하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왕비가 걱정된 기홍은 가마꾼들이 가마를 내려놓자마자 황급히 달려갔다. 가마 문을 연 기홍이 왕비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왕비 마마, 조심하시어요.”

기홍은 왕비의 품에 병아리가 안겨 있자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왕비 마마, 병아리는 무엇이옵니까? 닭고기가 드시고 싶으시면 소인이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기홍은 백천범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시울을 붉혔다. 작은 얼굴에 핏자국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참지 못한 기홍이 모진 말을 내뱉었다.

“악랄한 여편네가 이리도 무식하게 손을 대다니!”

묵용감이 덤덤하게 말했다.

“왕비를 방에 데리고 가 상처가 심한지 자세히 살펴보거라.”

“예, 왕야.”

녹하와 기홍이 백천범을 부축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학평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묵용감 뒤를 따랐다. 묵용감이 그를 한 번 흘겨본 뒤 입을 열었다.

“지금은 심부름할 사람이 필요하니 잠시 보류해 두었다가 가동이 나아지거든 곧장 가서 곤장을 맞도록 하라.”

“예, 왕야.”

잠시 벌을 면하게 된 학평관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묵용감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묵용감이 자리에 앉자 학평관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녹하를 불러 차를 올리라 하겠습니다.”

묵용감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녹하는 지금 바쁘네. 자네가 직접 내어 줄 마음은 없는 것인가?”

“아닙니다. 어찌 소인이 감히… 왕야께 차를 올리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학평관은 예를 갖춰 인사한 뒤 방을 빠져나왔다. 그는 젊어서부터 묵용감을 보필했기 때문에 그의 식성까지 꿰고 있었다. 그렇기에 차를 준비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너무 오랜만에 하는 일이라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었다.

그가 차를 올리자마자 기홍이 묵용감의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숙인 채 묵용감에게 말했다.

“왕야, 왕비 마마의 몸을 살펴보니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습니다. 이리도 어린 왕비 마마를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팔이며 허벅지며 멀쩡한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기홍의 말에 화를 주체하지 못한 묵용감은 방금 받은 찻잔을 곧바로 내리쳐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 뜨거운 찻물이 손에 튀자 그의 분노는 더욱 심하게 타올랐다.

“이 일에 가담한 모든 이들에게 곤장 서른 대씩을 더 내린 뒤 이곳에서 모조리 쫓아내거라!”

그의 호통에 또다시 기겁한 학평관이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처벌 수위가 너무 지나치다고 여긴 그는 자신이라도 이성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야, 곤장 서른 대를 더 내리시면 다들 맞아 죽을 것이옵니다.”

초왕야의 분노는 가라앉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맞아 죽어도 싸다!”

“왕비 마마께서 많이 다치시긴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뼈를 상하시진 않았으니 며칠 쉬면 나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부엌 시녀들이 목숨이라도 잃는다면, 사람들의 언성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왕야!”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슬쩍 묵용감의 눈치를 살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백 승상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묵용감은 백 승상 세 글자를 듣자마자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백천범 때문이 아니라 약자를 괴롭힌 못된 부인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백여름의 딸 때문에 그들의 목숨까지 앗아 가며 벌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백천범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지켜만 보기로 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너무 약한 상대였기 때문에 싸울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던 그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그녀의 약점을 찾아낸 다음 쫓아낼 계획이었다.

백천범이 남월각에서 못된 시녀들에게 시달리며 힘겹게 지내는 걸 묵용감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일은 자신과 상관없는 백씨 집안의 내부 분열이었기 때문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은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이란 말인가?

그의 인부가 이토록 악랄한 짓을 저지른 것은 아랫사람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의 탓도 있었기 때문이다. 흉악한 여자 여럿이 계집아이 하나를 죽도록 때린 것은 아무리 봐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일 뿐이다.

묵용감이 도포 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가서 직접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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