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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7)화 (26/1,192)

제27화

백천범은 아무런 표정 없이 부엌 시녀 손에 잡힌 병아리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병아리가 절 따라온 거라고요.”

“하, 이 계집이 누가 도둑 아니랄까 봐 허튼소리만 지껄이고 있네. 병아리가 따라간 거면 찐빵도 네 소매통으로 알아서 들어간 거냐?”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아리만 바라봤다. 병아리도 계속 그녀를 쳐다보더니 갑작스레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녀에게로 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엌 시녀는 병아리를 더 세게 붙잡더니 매섭게 병아리의 머리를 때렸다.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는 금수 아니랄까 봐! 도둑놈한테 가려는 거냐? 쟤는 조만간 널 삶아 먹을 거야.”

“때리지 말아요!”

백천범이 달려들어 병아리를 뺏으려 했지만 시녀가 있는 힘껏 그녀를 밀치는 바람에 또다시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부엌 시녀가 그녀를 가리키며 무섭게 말했다.

“저택 규율만 아니었으면 오늘 너는 우리한테 맞아 죽었을 거야.”

맞아 죽진 않았지만 부엌 시녀들은 하나같이 힘이 장사였다. 키도 크고 몸도 단단한 게 남자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때리고 욕하는 모습은 남자들보다 더 무서운 듯했다.

꽉 잡혀 꼬집힘을 수차례나 당했지만 백천범에게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시녀의 손에 목이 꽉 잡힌 병아리가 너무 불쌍했다. 가여운 목숨이 위태로워 보였다. 문득 백천범은 자신과 병아리가 같은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땅바닥에 앉아 탄식을 내뱉고 있는데 머슴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관리인 어르신이 병아리 도둑을 호되게 때린 뒤에 팔아넘기랍니다.”

안 그래도 부엌 시녀들의 손이 근질거리던 때였다. 시녀들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무서운 기세로 백천범에게 달려들었다.

백천범은 초식을 익혀 둔 상태였지만 사납게 달려드는 부엌 시녀들 앞에서는 머리를 감싸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병아리가 부엌 시녀의 손에서 빠져나와 한쪽으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병아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백천범을 바라봤다.

부엌 시녀들에게 한바탕 매를 맞고 난 백천범의 머리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옷깃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소매에 넣어 놨던 물건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그녀는 머리를 감쌀 정신도 없이 황급히 물건을 주워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곧장 부엌 시녀의 검고 날카로운 손톱이 얼굴을 할퀴었다. 하마터면 그 손톱에 눈이 찔릴 뻔했다.

이때 다른 관리인이 다가와 말했다.

“이만큼 화풀이했으면 되었네. 때려죽일 순 없지. 총 관리인께서도 팔아넘기라 하시질 않았나.”

백천범은 난잡하게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뒤 그들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를 팔 수는 없을 것이오. 나는 초왕비니까.”

다들 박장대소하며 백천범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하도 맞아서 머리가 어찌 된 것 아니냐? 네가 왕비면 나는 황후 마마다!”

“보니까 제정신이 아닌 듯하네. 정신이 이상하면 제값에 팔기도 어려우니 마구간 영감한테 시집이나 보내 버립시다.”

일제히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마구간 영감은 저택의 말 사육사였다. 원래는 노병이었는데 전쟁에서 다리를 잃자 이를 불쌍히 여긴 초왕이 말 먹이 주는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의 나이는 올해 예순, 노총각이었다.

바닥에 앉아 있던 백천범은 화도 내지 않고 평온하게 말했다.

“안 믿기면 총 관리인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그가 날 알고 있으니.”

부엌 시녀가 침을 퉤 뱉으며 말했다.

“네까짓 게 총 관리인 어르신을 만난다 해도 절대 널 가엽게 여기시지 않을 테니 허튼짓 말고 가만히 있어! 이 망할 도둑놈 같으니라고. 아, 혹시 또 모르지, 기방에 팔려 몇 년 지내다 보면 어르신을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은 기방을 가시지 않으니 영영 못 뵐 게요. 차라리 마구간 영감한테 시집을 보내 저택에 남겨 두면 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들은 백천범 주변을 둘러싼 채 함부로 떠들며 그녀를 희롱했다. 백천범이 한쪽에 피해 있는 병아리를 바라봤다. 병아리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애타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잔뜩 풀이 죽은 모습이 자신 때문에 맞고 있는 그녀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비 매매상이 찾아왔다. 그가 백천범을 자세히 관찰하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껏해야 여덟, 아홉처럼 보이는뎁쇼.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요. 생김새도 평범한 게 기방에서도 원치 않을 듯 하고……. 다른 저택으로 팔아넘긴다 해도 식량만 축낼 듯한데…….”

관리인이 그에게 호통을 쳤다.

“이런 파렴치한 장사꾼 같으니라고! 네까짓 게 감히 초왕야의 사람을 가리는 것이냐?”

노비 매매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어르신, 일도 잘하고 용모도 괜찮은 아이를 주신다면야 아주 깔끔하게 값을 쳐드리지요. 근데 이 계집아이는…….”

그가 고개를 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초왕야의 인부라 한들, 솔직히 좀…….”

두 사람이 한창 흥정을 하고 있을 때, 백천범의 소속을 확인하러 갔던 머슴이 돌아왔다. 그가 관리인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안 어르신, 아무리 물어도 이 계집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곳은 없었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관리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백천범을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대체 어디서 일하는 계집이냐?”

* * *

학평관이 회림각 입구에서 묵용감을 공손히 맞이했다.

“왕야, 다녀오셨습니까?”

말에서 내린 묵용감은 머슴에게 고삐를 넘겨준 뒤 큰 보폭으로 들어섰다.

“오늘 저택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앞뜰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있던데 무엇을 하는 것이냐?”

학평관이 허리를 굽혀 답했다.

“오늘 부엌에서 병아리를 훔친 자가 붙잡혔는데 확인해 보니 찐빵까지 훔쳤다 하옵니다. 실은 근래에 찐빵이 계속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양이 적은 데다가 왕야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 소인이 말씀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오늘 현장에서 도둑을 잡았는데 웬 계집아이였다 하옵니다. 손버릇이 나쁜 자는 저택에서 일할 자격이 없으니 호되게 혼을 낸 뒤, 노비 매매상을 불러 팔아넘기라 하였습니다.”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찐빵을 훔치는 계집아이라 하였느냐?”

지난번 가동이 묵용감에게 왕비가 부엌에서 찐빵을 훔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디에서 일하는 계집이더냐?”

“그게…….”

학평관은 조금 긴장되기 시작했다. 상황을 보고받을 때, 너무 사소한 일이라 여겨 자세히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묵용감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가서 직접 보지도 않고 곧장 팔아넘기라 했단 말이냐?”

깜짝 놀란 학평관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이 바로 확인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때 중문을 지키는 머슴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왕야를 보자 머슴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왕야를 뵈옵니다.”

허둥지둥하는 머슴의 모습에 묵용감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머슴은 고개를 깊게 숙인 채 답했다.

“왕야께 아룁니다. 방금 잡은 도둑이 어디에서 일하는지 알 길이 없사옵니다. 그 애 말로는, 자신이…….”

머슴은 왕비라는 말을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다. 왕야가 화를 낼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묵용감은 머슴에게 다가가 크게 호통을 쳤다.

“말하라!”

아연실색한 머슴이 곧장 입을 열었다.

“자신이 왕비라 하였습니다.”

학평관이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자 묵용감이 발로 그의 가슴팍을 세차게 걷어찼다. 학평관은 곧바로 땅바닥에 고꾸라져 사시나무 떨듯 몸을 덜덜 떨었다.

묵용감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말을 준비하라!”

묵용감은 날아오르듯 말 위로 올라가 앞뜰을 향해 질주했다. 영구도 곧장 그의 뒤를 따랐다.

학평관은 묵용감이 멀어지자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머슴이 그를 일으키며 물었다.

“어르신, 괜찮으십니까?”

“너 같으면 괜찮겠느냐!”

학평관은 손을 뻗어 머슴의 뺨을 때렸다.

“소속도 제대로 알아내기도 전에 감히 매매상을 부르다니……! 다들 벌 받을 준비나 하고 있거라!”

머슴은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일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머슴은 그저 소식을 전한 죄밖에 없었다.

* * *

백천범이 어디에서 일하는지 알 수 없자 흥정은 중단됐다. 그들은 학평관의 답만 기다리기로 했다. 더 많은 구경꾼들이 백천범 주변으로 몰려들어 숙덕거렸다.

그 가운데서 백천범은 무릎을 세워 양팔로 감싸 안은 채 앉아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은 여러 군데 구멍이 뚫려 속옷이 보일 정도였다. 누가 봐도 딱한 모습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 일도 아닌 듯 태연한 표정으로 땅만 바라보았다.

그런 백천범의 모습을 본 묵용감은 마음이 시큰했다. 어떤 기분인지 정확히 설명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약자를 괴롭힌 적 없는 그는 이러한 상황을 보는 게 힘들다는 것이다.

그가 말에서 내리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양옆으로 흩어지더니 멀찍이 물러났다. 왕야가 직접 말을 타고 온 것을 보면 심상치 않은 일이 분명했다.

백천범이 고개를 들어 까만 눈동자로 묵용감을 올려다보았다. 금세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왕야.”

흙먼지가 잔뜩 묻은 그녀의 얼굴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단정하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묵용감이 모여 있는 무리를 훑으며 물었다.

“누가 한 짓이냐?”

심상치 않은 그의 목소리에 모든 이들이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몇 명이 즉각 무릎을 꿇기도 했지만 감히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 관리인이 누구냐?”

안덕수安德水가 급히 앞으로 나와 답했다.

“왕야께 아룁니다. 소인, 이 구역의 관리인 안덕수라 하옵니다.”

묵용감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가까이 오라.”

감히 명을 거절할 수 없던 안덕수는 바들바들 떨며 묵용감 앞으로 다가갔다. 묵용감의 발길질 한 번에 그가 땅으로 고꾸라졌다.

“말하라. 누가 한 짓이더냐?”

초왕의 무공은 실로 엄청났기에 보통 사람이 그의 발길질을 견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밀려드는 고통에 말을 할 수 없었던 안덕수는 이 일과 연관된 주방 시녀들을 손짓으로 불러냈다.

백천범을 때린 부엌 시녀들이 땅에 무릎을 꿇고 덜덜 떨며 울부짖었다.

“왕야,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분이 먼저 병아리를 훔치는 바람에 소인들이 그리 한 것이옵니다…….”

그 말에 더 화가 난 묵용감이 한 명 한 명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저택에 왕비의 것이 아닌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왕비가 훔칠 필요가 있단 말이냐?”

그의 말에 부엌 시녀들은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녀가 왕비였다니. 자신들이 왕비에게 손찌검한 것이라니! 방금 전 그녀를 꼬집고, 할퀴고, 머리채를 쥐어뜯던 행동을 떠올리자 그들은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왔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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