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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6)화 (25/1,192)

제26화

그녀가 고개를 들어 가느다란 목을 내보였다. 상처가 아까보다 조금 거뭇해진 탓에 더 선명하게 보였다.

상처를 자세히 살핀 묵용감은 상처가 깊지 않자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왕비가 언제 초왕에게 죽임을 당할지 내기를 하는 판국인데 그들에게 구실을 내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백여름이 황제 폐하께 고할 게 뻔했다.

다만 붉은 자국이 새하얀 목에 새겨진 게 눈에 조금 거슬렸다. 마음이 답답해진 묵용감은 속으로 영구를 원망했다. 손을 댈 거면 제대로 댈 것이지 이리 가볍게 스쳐서야 어찌 벌을 내린단 말인가?

학평관이 의자를 가져오자 묵용감이 장삼을 걷어 올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말해 보시오. 무슨 일이 있던 게요?”

백천범이 입을 막 떼려는 순간 묵용감이 고개를 돌려 영구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해 보거라.”

영구는 솔직한 사람이었기에 사실대로 고했다.

“왕비 마마께서 창문으로 넘어오시려 했는데, 소인이 도둑인 줄 알고 검을 휘둘렀습니다. 그리하여 왕비 마마의 목에 상처를 낸 것입니다.”

묵용감이 백천범에게 물었다.

“왕비는 무엇 때문에 창문을 넘으려 했단 말이오?”

백천범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작스레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묵용감의 몸이 떠오른 그녀는 흠칫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꼿꼿한 자세만큼은 미동도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그의 몸이 다시금 떠올랐다. 군살 없이 탄탄한 균형 잡힌 몸이었다. 그녀의 둘째 오라버니보다 훨씬 더 기품 있어 보였다.

그녀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얼굴만 붉어지자 묵용감의 심장도 쿵쿵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진 그는 한두 차례 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왕비, 본왕이 묻질 않소.”

방금 그 일을 겪고 나니 백천범의 담력이 더욱 커진 듯했다. 옷을 다 벗고 있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저, 저는 고양이를 쫓고 있었습니다. 창문으로 기어 올라가려 하길래 뒤따라 올라온 것이옵니다.”

묵용감의 뒤에 서 있던 학평관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역시 어린아이구나. 세상 어느 왕비가 고양이를 쫓다 창문을 기어오른단 말인가.’

침대에 앉아 있던 가동이 슬쩍 입을 가리고 미소를 지었다. 묵용감의 표정이 꽤나 복잡해 보였다. 웃지도 화를 내지도 못한 채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묵용감은 가볍게 코웃음을 친 뒤 학평관에게 분부를 내렸다.

“당장 그 고양이를 찾아 때려죽이거라!”

자신을 바보로 만든 것이었다. 처음 가동의 방에 왔을 때, 백천범이 창문으로 도망쳤고 목욕간에 숨어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자신에게 망신을 주고, 왔던 길로 돌아가다가 영구의 칼에 상처가 난 것이 분명했다.

하! 다쳐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상처가 깊었다면 오래오래 기억에 남겼을 텐데. 너무 희미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가 백천범을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시선을 회피하던 평소와는 다르게 크고 새까만 두 눈으로 태연하게 그를 응시했다.

묵용감은 호되게 그녀를 노려보려 했지만 붉은 상처를 보고는 마음을 접었다. 깊지 않은 상처라 해도 크게 놀랐을 테니 죗값을 어느 정도 치렀을 것이다.

그는 돌연 흥미를 잃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는 창으로 넘어 다니지 마시오. 이 저택에 그런 규율은 없소.”

백천범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왕야.”

묵용감은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영구가 그의 뒤를 따랐다.

“왕야, 소인 채찍을 맞으러 가겠습니다.”

묵용감은 눌러 담았던 화가 다시 폭발하기라도 하듯 호통을 쳤다.

“무슨 채찍을 맞는단 말이냐?”

그가 백천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도 상처라고 할 수 있느냐? 피부가 까지기라도 해야 벌을 내릴 것이 아니냐? 다들 그리도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더냐?”

그가 영구를 걷어차며 말했다.

“이런 눈이 삔 자식 같으니라고, 썩 꺼지거라!”

심하게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을 뿐이었다. 학평관마저 감히 그를 따라나서지 못했다. 묵용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날 땐 종종 발길질을 했다.

영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나가 버리는 묵용감을 바라봤다. 그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왕야를 화나게 한 것이오?”

가동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바보 같은 놈. 왕야께서 발로 걷어차신 걸 벌이라고 여겨. 또 왕야께 벌을 내려 달라 했다간 더 화를 내실 테니.”

이어 학평관이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됐다, 영구야. 오늘은 더 이상 왕야 눈에 띄지 말고 왕비 마마를 모셔다 드리거라.”

백천범이 말했다.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백천범에게 여전히 미안했던 영구는 그녀가 뭐라 하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번 일로 백천범이 얻은 게 있다면 융통성 없는 그의 성격을 알게 된 것이었다. 원래는 기홍의 방에 가서 과자를 들고 올 계획이었지만, 그가 뒤따라오고 있으니 얌전히 남월각에 돌아가기로 했다.

* * *

그날의 일은 백천범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남겼다. 예전에 유모가 나체의 사내를 보면 눈에 다래끼가 난다는 말을 해 준 적이 있었다. 눈이 호두처럼 부어올라 금은화 가지로 사십구 일 간 조심스레 찔러야 가라앉는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떠오른 그녀는 온 저택을 돌아다니며 금은화를 찾아다녔다. 겨우 앞뜰 담장 주변에서 한 떨기를 찾을 수 있었다. 금은 빛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꽃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윽한 꽃향기가 코끝을 찔러 오자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향기를 맡았다.

사실 눈이 부어오르게 된다고 해도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다만 다른 이들이 다래끼를 보고 자신이 나체의 사내를 보았다는 걸 알 게 된다 생각하니 걱정이 된 것이다. 품행이 바르지 못한 아이라 여길 게 분명했다.

이씨 부인은 늘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품행이 바르지 못해 흉측하다며 욕했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어릴 때 기억이라고는 유모와 지냈던 게 전부였다.

유모는 충직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몸집이 탄탄했고 인자한 얼굴로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중에 앞니가 빠져 웃을 때 조금은 익살스러워 보였지만……. 사실 그 모습에는 참 괴로운 일이 얽혀 있었다. 이씨 부인의 유모가 그녀의 생니를 뽑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백천범이 벌레 여러 마리를 잡아 그 유모의 옷에 넣었다. 벌레에 쏘인 몸이 붉게 부어올랐으니 나름 복수에 성공한 셈이었다.

백천범은 유모가 정말 보고 싶었다. 유모가 살아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초왕의 저택이 딱히 좋은 건 아니었지만 백 승상의 집보다는 훨씬 나으니 유모도 한적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백천범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허리를 굽혀 금은화 가지를 찾았다. 사실 어떤 가지든 상관없었다. 단단하고 굵은 가지를 고르면 되었다. 그녀는 우선 몇 개만 꺾어간 뒤에 부족하면 다시 오기로 했다.

백천범은 고심 끝에 열 개를 골라 소매 안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는 발길을 돌려 후원으로 향했다. 두 걸음 정도 걸었을까?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아침은 이미 먹었지만 비상식량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찐빵 두 개를 가져와야 했다.

백천범은 살금살금 부엌으로 들어가 찜통 뒤에 숨었다. 찐빵이 이미 식었을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한 번에 두 개를 꺼내 들어 소매에 넣었다. 그리곤 다시 조심스레 빠져나왔다.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봐, 너. 안에다 땔감 한 묶음 들여놔.”

깜짝 놀란 백천범은 벽에 있던 장작을 한 아름 안아 부엌에 가져다 놓았다. 다시 밖으로 나와 보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노란 병아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막아서고 있었다. 병아리는 그녀가 무섭지도 않은 듯 신발을 몇 차례 쪼아 댔다.

그게 싫지 않았던 그녀가 소매 안에 있던 찐빵을 조금 뜯어내 잘게 잘라 주었다. 병아리가 신이 나서 쪼아 먹기 시작했다.

백천범이 자리를 뜨려 하자 병아리는 찐빵을 먹지도 않고 그녀를 쫓아왔다. 참 이상한 병아리였다.

백천범이 쪼그려 앉아 병아리에게 물었다.

“너, 나랑 같이 가려고 그러니?”

병아리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작고 동그란 눈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백천범은 손을 뻗어 병아리를 살며시 만져 보았다. 병아리는 도망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병아리 머리에 난 솜털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따라오면 안 돼. 나도 잘 먹지 못하는데 어떻게 널 키우겠어.”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뗐지만 병아리는 그래도 자꾸만 따라오려 했다. 그녀가 빨리 걸으면 병아리도 빨리 쫓아왔고, 그녀가 천천히 걸으면 병아리도 속도를 늦췄다.

백천범은 그런 병아리가 참으로 신기했다. 사람과 교감을 할 줄 아는 병아리인 듯했다. 그녀가 다시 병아리를 품에 안았다. 병아리는 머리만 움직이며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백천범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좋아. 자꾸 쫓아오려 하니 데려가 줄게. 하지만 맛있는 건 먹지 못할 거야.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는 마. 굶어 죽진 않을 테니. 나 한 입 너 한 입씩 나눠 먹으면 돼.”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백천범은 병아리를 안은 채 급히 후원으로 향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 이 병아리 도둑!”

깜짝 놀란 백천범이 쏜살같이 도망쳤다. 도망치면서도 손에 든 병아리를 꼭 안고 절대 놓치지 않았다. 앞쪽에서도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도망치던 백천범은 몸집 좋은 부엌 시녀와 머슴들에게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다.

백천범은 무섭지 않았지만 작은 병아리가 다칠까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병아리를 짓누르지 마세요, 제 병아리가 다친다고요!”

백천범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그녀를 밀어 넘어뜨렸다. 한 부엌 시녀가 병아리를 뺏어 가며 그녀를 크게 꾸짖었다.

“제 병아리? 이게 어디서 뻔뻔하게 네 병아리래? 이건 부엌에서 기르는 병아리야. 어미 닭이 알을 품어 이제 막 열두 마리가 되었다고.

이렇게 작은 병아리를 훔쳐가다니, 양심이라고는 없는 도둑 같으니라고! 어디서 일하는 시녀인지 당장 대. 관리인 어르신께 벌로 곤장 서른 대를 치라 말씀드릴 테니.”

그때 다른 시녀가 바닥에 뒹구는 찐빵을 발견했다. 그러다 백천범의 소매에서 찐빵이 떨어졌다고 고자질했다. 그녀는 목청을 더욱 높여 소리쳤다.

“네가 그 찐빵 도둑이었구나! 매일 찐빵이 부족하다 했더니 네가 훔친 것이었어! 찐빵도 모자라 병아리까지 훔치다니. 뭐해, 어서 사람을 보내 관리인 어르신께 고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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