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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25)화 (24/1,192)

제25화

묵용감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말 그를 보지 못한 것인가? 아닐 것이다. 이토록 큰 사람이 꼿꼿이 서 있는데 눈이 멀지 않고서야 못 봤을 리가 없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 묵용감은 백천범이 이번에도 시치미를 떼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화가 나 펄쩍 뛰기 일보 직전이었다. 백천범이 무엇 하러 이곳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설마 그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려 했단 말인가?

그는 재빨리 바지를 입었다. 마음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백천범이 어디까지 봤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마음을 안정시키려 해도 화가 치밀어 이마의 핏줄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곧장 쫓아가 분노를 표출하지 못한 게 한이 될 정도였다.

그가 크게 호통을 치며 말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호통을 치는 그의 목소리에 밖에 있던 녹하가 깜짝 놀랐다. 목욕을 하다 화가 나다니.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왕야, 소인 문 앞에 있사옵니다. 들어가 모실까요?”

묵용감은 녹하의 목소리가 평상시와 다르지 않자 조금은 의아했다. 설마 백천범이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일까?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라.”

녹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촛불 하나를 더 켜자 안이 조금 더 환해졌다. 그녀는 묵용감의 의복 착용을 도왔다. 묵용감이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밖에 혼자 있었느냐?”

“복도에 무수리도 있습니다. 왕야, 불러올까요?”

“다른 이가 지나가진 않았더냐?”

녹하는 그가 왜 이런 것들을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은 왕야의 목욕간인데 누가 올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 옷을 가져다 놓을 때, 뭐 다른… 것은 없었느냐?”

녹하의 마음이 삽시간에 근심으로 가득 찼다. 오늘은 살짝 게으름을 피우느라 무수리에게 왕야의 의복을 가져다 놓으라고 하고, 자신은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 세심히 준비하지 못해 부족한 게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왕야, 뭐 수상한 것이라도 보신 것입니까?”

묵용감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고양이였다.”

녹하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양이였다니……. 하지만 왕야의 기분이 심히 언짢아 보였기에 그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왕야, 소인에게 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소인이 깨끗이 정리하지 못해 왕야께 불편을 끼쳐 드렸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하인을 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한 끝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백천범도 시치미를 떼긴 했지만 적어도 그의 체면은 살려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어린 여자아이에게 벌거벗은 몸을 보였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초왕야의 명성이 어찌 되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친 그는 조금씩 평정심을 되찾았다.

“다음번엔 주의하거라. 목욕간에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목욕을 할 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무방비 상태이니 설사 고양이에게 보였다 한들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당연했다.

“예, 왕야. 소인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는 깨끗이 정리해 모기 한 마리도 얼씬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묵용감은 마저 옷을 입고 문으로 향했다. 문 옆으로 난 창문을 지나치던 그는 잠시 멈춰 창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창 아래 잡초가 눌려 있는 흔적이 보였다. 백천범이 이곳을 통해 도망친 것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이내 냉소를 지었다. 이번엔 그나마 눈치 있게 행동했다지만, 만일 다른 이에게 이 일을 알리려 했다간 당장 그녀를 해하여 입을 막을 수도 있었다.

* * *

가동이 침상에서 일어나 영구에게 농을 던졌다.

“영구야, 네가 올해로 꼭 스물이지? 맘에 드는 여인은 있고? 이 형님이 중매라도 서 줄까?”

영구는 가동을 살짝 흘긴 뒤,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닦는 데 전념했다.

가동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홍 아가씨는 어때? 나이도 엇비슷하겠다 상냥하고 현명하잖아. 요리 솜씨는 또 어떻고. 기홍에게 장가들면 금세 포동포동해질걸?”

영구가 덤덤하게 말했다.

“기홍 아가씨는 형님의 여인이 아닙니까? 녹두전에 약까지 보내며 살뜰히 챙기는데 받아 주지 않을 작정입니까?”

가동은 묵용감이 마음대로 혼사를 맺어 줄까 걱정이었다. 기홍은 좋은 사람이지만 가동이 좋아하는 여인은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여인은 도도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자신과 마주쳐도 곁눈질로 힐끗 흘겨볼 뿐이었다. 그는 차마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화를 낼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고운 눈썹을 치켜세우는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의 심장이 요동쳤다.

하지만 왕야가 오해를 하고 있으니 그녀에게 이 소식이 전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말하기가 더 곤란할 테니 기홍과 영구를 이어 주려 한 것이다. 만약 둘이 혼인을 한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가동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기홍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영구가 물었다.

“그럼 누구를 좋아합니까?”

가동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창가에서 움직임이 느껴지더니 자그마한 머리가 튀어 올라왔다.

영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들고 있던 검을 겨누었다. 그의 뒤에서 가동이 다급히 외쳤다.

“멈추어라! 왕비 마마이시다.”

영구가 급히 힘을 뺐다. 다행히 베진 않았지만 칼날이 너무 날카로워 백천범의 목에 한 줄기 붉은 자국을 남겼다. 피부에 스쳐 피가 난 것이었다.

영구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왕비 마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 왕비 마마이실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가동은 옷을 입고 있지 않아 일어날 수 없었기에 몸을 돌려 다급히 영구에게 외쳤다.

“영구야, 왕비 마마를 모셔, 어서.”

백천범은 혼이 쏙 빠져 있었다. 어떤 위기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던 그녀였기에 방금 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묵용감과 마주했을 때도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생사가 오가는 순간이 오자 그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녀는 창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어떠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영구는 퍼뜩 정신이 들어 급히 백천범을 안아 올렸다. 목에 난 상처를 확인해 보니 약을 바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벼웠지만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의 호위무사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긴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반드시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조금씩 정신을 차린 백천범이 목을 만지작거렸다. 약간 쓰라리긴 했지만 심한 상처가 아니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영구를 일으키며 말했다.

“영구 호위무사님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창문을 넘어오는 바람에 호위무사님께서 민첩하게 반응한 것이지요. 역시 실력이 대단하세요.”

그녀의 말을 들은 영구가 흠칫 놀랐다.

그는 예전에 한 관리의 집에서 일하던 마부였다. 어느 날 말을 몰다 아가씨의 치마에 진흙이 튀었고 악랄했던 아가씨는 하인을 불러 채찍질을 하게 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생명이 위독했을 때 묵용감이 그를 구해 주었다.

그때부터 영구는 자신의 목숨을 초왕에게 바치기로 했다.

백천범 또한 지체 높은 집안의 아가씨이거늘 어찌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영구는 원칙을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었다. 백천범은 영구의 탓이 아니라 했지만 자신의 죄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묵용감을 찾아가 죄를 고하기로 했다.

묵용감은 이미 한바탕 놀란 뒤라 서예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힐 셈이었다. 녹하가 옆에서 먹을 갈며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방 안은 가만히 향만 타오를 뿐 고요하고 적막했다. 그러다 갑자기 영구가 뛰어 들어오더니 곧장 무릎을 꿇고 고했다.

“소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왕야.”

묵용감은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쓰던 글자를 마무리하고 붓을 내려놓았다. 영구가 갑자기 들어와 글자가 잘 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묵용감이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영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가 영구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일어나서 고해 보거라. 죄를 지었는지 여부는 본왕이 판단하겠다.”

영구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소인, 방금 왕비 마마를 해할 뻔하였습니다.”

순간 묵용감의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며 태연하게 말했다.

“해할 뻔했다는 것은 아직 해하지 않았단 말이 아니더냐? 해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잘못이란 말이냐? 죄가 없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왕야가 왕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은 영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범의 목에 난 상처와 연신 괜찮다고 말하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리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는 계속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

“소인, 왕비 마마를 해한 것은 아니지만 무례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왕야께서 제게 벌을 내려 주십시오.”

묵용감도 영구의 완고한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절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꼭 벌을 받아야만 했다. 조금은 궁금한 마음에 묵용감이 영구에게 물었다.

“왕비를 어찌했길래 그러느냐?”

“검으로 왕비 마마의 목에 상처를 내었습니다.”

녹하가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었다. 목은 가장 약한 곳일 뿐만 아니라 가장 쉽게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부위였다.

묵용감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물었다.

“왕비는 어디 있느냐?”

영구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가동의 방에 계십니다.”

녹하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토록 숨기려 했건만 결국 모든 게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었다. 가동이 또다시 난처해질 것은 당연지사고, 기홍도 화를 면치 못할 게 분명했다.

왕비는… 차라리 상처가 심하길 바라는 편이 나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 또한 벌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기홍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어서 이 소식을 알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묵용감은 방을 나와 큰 보폭으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문 앞에 서 있던 학평관도 묵용감이 급히 밖을 나서자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묵용감 일행이 복도를 가로질러 가동의 방으로 들어갔다. 백천범은 아직 가동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묵용감을 본 그녀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왕야를 뵈옵니다.”

묵용감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갑갑해졌다.

“고개를 드시오.”

그의 곁에 있는 영구를 발견한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고지식한 사람 같으니.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거늘… 왕야에게 곧장 달려가 고하면 괜찮은 일도 안 괜찮은 일이 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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