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백천범을 확인한 그는 크게 놀라 황급히 이불을 덮고 몸을 잔뜩 움츠렸다. 상처가 쓸려 통증을 느낀 그가 질겁하며 말했다.
“왕비 마마,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백천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했다. 이불을 걷었을 때 가동의 등이 온통 채찍 자국으로 패여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곳은 딱지가 앉고 어떤 곳은 아직 피가 맺혀 있었다. 시커먼 분을 발라 놓은 모습이 정말이지 참혹했다.
그녀가 벌을 받았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 참혹한 벌을 애꿎은 이가 받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 왔다. 묵용감, 이 나쁜 놈. 자신의 측근에게마저 이리도 호되게 대하다니, 정말 악랄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가동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자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 가동은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어린 왕비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닦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소인 때문에 왕비 마마께서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보기에만 아파 보일 뿐 소인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영구가 마음이 약해 뼈까지 다치진 않았습니다. 왕비 마마를 놀라게 해선 아니 되는데 소인이 정말 송구합니다, 왕비 마마.”
백천범은 눈물을 닦으며 서럽게 말했다.
“사부님이 송구할 게 무엇이 있겠어요. 다 초왕야 그 군신 때문이지요. 사부님은 제게 초식 몇 가지 알려 주신 것밖엔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잘못이라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을 것입니다.”
역시 어린아이였다. 한바탕 원망을 늘어놓더니 또다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사부님을 다치게 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사부님께 무술을 배우지 않을 거예요.”
“왕비 마마, 울지 마십시오. 왕야께서 벌을 내리신 건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초왕은 백천범이 원수의 딸인 걸 알면서도 무술을 가르쳐 준 가동의 태도를 책망했던 것이었다.
백천범은 우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눈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는 가동의 앞으로 가 소매에서 녹두전을 꺼내며 부끄럽게 말했다.
“이건 기홍 언니가 만든 녹두전이에요. 아주 맛있어요. 제가 만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들어 보세요.”
백천범이 손수건을 펼쳐 녹두전 하나를 가동의 입가에 가져갔다.
“사부님, 아 해 보세요.”
가동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누군가 자신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왕비를 실망시킬 수 없었기에 가동은 입을 벌려 녹두전을 받아먹었다. 몇 번 씹어 목 뒤로 삼킨 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맛있습니다.”
백천범이 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맛있으면 하나 더 드시어요.”
가동은 한 번 더 받아먹었다. 백천범은 소매에서 상처약을 꺼냈다.
“이건 제가 시집올 때 가져온 거예요. 상처가 잘 낫는 약인데 제가 좀 발라 드릴까요?”
“감사합니다, 왕비 마마. 지금은 궁에 있던 어약을 발랐습니다. 상처 치료에 효능이 좋은 약이지요.”
묵용감을 군신이라 부르는 걸로 보아 왕비가 그를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동은 그녀에게 초왕의 좋은 점을 말해 주기로 했다.
“왕비 마마, 사실 왕야께서는 마음씨가 좋으신 분입니다. 원칙이 확고하신 분이라 상과 벌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지요. 제게 벌로 채찍질을 내리셨지만, 많은 상처약도 보내 주셨습니다. 약 덕분에 상처가 빨리 아물고 있으니 며칠 뒤엔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백천범은 가져온 것을 다시 담지 않았다. 가동이 쓰든 안 쓰든 그녀의 작은 성의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약을 탁자에 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가지고 계셔요. 필요하실 거예요.”
가동은 왕비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이에게 들킬까 봐 걱정이 되었다.
“소인, 왕비 마마께서 와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황송하옵니다. 왕비 마마가 다녀가시니 소인도 금방 나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이제 왕비 마마께선 그만 돌아가시지요.
다른 이의 눈에 띄어 왕야께 이 소식이 알려지면 또 큰일이 날 것이옵니다. 소인의 명은 보잘것없지만 왕비 마마까지 해를 입으실까 두렵습니다.”
백천범도 그만 돌아가려던 참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 몸조리 잘하세요. 며칠밖에 배우지 못했지만 한 번 사부님은 영원한 사부님이니 평생 이 은혜 잊지 않을 거예요. 며칠 뒤에 또 올게요.”
“왕비 마마, 오실 필요 없습니다. 다 나으면 소인이 남월각으로 찾아가겠습니다.”
백천범은 다시 한 번 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스물이 조금 넘은 씩씩한 청년이었다. 방금 전 이불을 걷었을 때 아주 잠깐이었지만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볼 수 있었다. 분명 금방 원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제야 안심하며 문을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기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야,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돌아오셨습니다.”
백천범은 발걸음을 멈추고 서둘러 뒤를 돌아봤다. 가동은 등의 상처도 잊은 채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말했다.
“왕비 마마, 창문으로 나가시지요.”
벽을 짚고 창문을 넘어가는 것은 백천범이 어려서부터 늘 해 왔던 일이었다. 그녀에게 특별한 재주는 없었지만 목숨을 부지하려 도망치는 것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백천범은 곧장 작은 체구를 던져 창문으로 도망쳐 나왔다.
백천범이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묵용감이 방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냐?”
가동은 침착히 대답했다.
“고양이인 듯하옵니다. 며칠 동안 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백천범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조심스레 숨을 고른 뒤 주변을 살폈다.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붉은 기와와 흰 벽으로 이루어진 방들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중 한 곳의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백천범은 혹여 묵용감이 자신을 보게 될까 두려워 일단은 안 보이는 곳에 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백천범은 허리를 굽힌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조심스레 반쯤 열린 창문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녀는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방 안은 조금 어두웠기 때문에 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백천범은 더듬거리며 병풍 뒤로 향했다.
병풍 뒤에는 낮은 평상이 있었다. 백천범은 평상에 가만히 웅크려 앉아 차분하게 때가 오길 기다렸다. 묵용감은 길어야 반 시진 정도 뒤에 자리를 뜰 테니, 그때 자신도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 * *
묵용감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 기홍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 안을 둘러봐도 백천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묵용감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기홍을 바라봤다. 기홍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서른 대의 채찍형을 내리긴 했지만 자신의 측근이었기에 묵용감의 마음도 무거웠다. 결국 그는 조정을 다녀와 곧바로 가동을 보러 왔다.
묵용감은 뒷짐을 진 채 허리를 살짝 굽혀 가동에게 물었다.
“좀 나아졌느냐?”
“많이 좋아졌습니다.”
왕야가 몸을 낮춰 그에게 안부를 묻자 가동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극진히 보살펴 주심에 황송할 따름입니다, 왕야.”
“너는 내 사람이다.”
묵용감은 굽혔던 등을 펴고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말했다.
“네게 벌을 내린 것은 이 일을 오래 기억하라는 뜻이었다. 앞으로는 본분에 맞게 행동하거라. 상처약은 잘 듣더냐?”
“예, 효과가 아주 좋아서 상처가 빨리 아물고 있습니다.”
“그래. 어서 나아야지. 요즘 영구가 네 몫까지 일을 도맡고 있으니 빨리 나아 영구에게 쉴 틈을 주거라.”
“맞는 말씀이십니다.”
가동은 영구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지만 영구는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묵용감이 탁자 위에 놓인 녹두전을 바라봤다.
“이것은…….”
“소인이 가져다준 것이옵니다.”
기홍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가동이 온종일 방 안에만 있으니 답답할 것 같아 전이라도 좀 맛보라 가져온 것입니다.”
묵용감이 기홍과 가동을 번갈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무엇인가 확신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가동이 너, 기홍의 선의를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푸대접할 생각 말고.”
기홍의 볼이 발그레 물들었다. 가동도 마찬가지였다. 묵용감이 오해했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해명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만 숙인 채 부끄러워했다.
묵용감은 기분이 퍽 좋았다. 눈을 돌리니 작은 병에 담긴 상처약이 보였다. 그가 약을 들며 기홍에게 물었다.
“이것도 네가 가져다준 것이냐?”
“…아, 예.”
기홍은 백천범의 약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묵용감은 병을 다시 내려놓고 가동을 보며 말했다.
“나는 그만 가 볼 테니 몸조리 잘하거라.”
가동이 이불을 몸에 감고 한쪽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왕야.”
“되었다. 상처가 깊으니 예를 차릴 것 없다. 쉬거라.”
기홍이 따라나서려 하자 그가 손을 내저었다.
“너는 여기 남아 가동을 보살펴 주거라. 내 방엔 녹하가 있으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
기홍과 가동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단 말인가?
* * *
말을 타고 집에 돌아온 묵용감은 날씨가 더운 탓에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묵용감은 녹하에게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하라 분부했다.
녹하는 무수리에게 따뜻한 물을 길어 오게 했고, 몸을 닦는 천과 수건, 갈아입을 의복 등을 준비했다. 초를 켜고 향을 피워 모든 준비를 끝낸 그녀가 묵용감을 목욕간으로 안내했다.
묵용감이 사용하는 목욕간은 규모가 매우 컸다. 커다란 초만 조용히 타고 있으니 꼭 한밤중 같았다. 그는 편안하게 탕에 들어가 목욕을 마친 뒤에 목욕 수건으로 허리춤을 감쌌다. 그리고 이내 옷을 갈아입으려 병풍 뒤로 향했다.
낮은 평상에 그의 의복이 놓여 있었다. 속바지와 바지, 장삼. 그리고 그 옆쪽에 수건이 무더기로 쌓여 너저분해 보였다. 촛불은 바깥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병풍 안쪽으로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웠다.
묵용감은 수건을 벗어 병풍 위에 걸쳐 놓고, 허리를 숙여 속바지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수건 무더기가 움직이더니 작고 까만 머리가 쏙 하고 튀어나왔다.
깜짝 놀란 그는 본능적으로 바지를 앞쪽으로 갖다 대 몸을 가렸다. 그 작은 머리의 주인은 한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내보였다.
손을 내리치려는 순간, 그자가 쪼그렸던 허리를 펴더니 묵용감의 몸을 그윽하게 훑어보았다. 마치 그가 잘 안 보이는 듯 입을 가리고 몇 차례 하품을 해 댔다. 그러다 이내 평상에서 내려가 혼잣말을 했다.
“아이참, 어떻게 잠이 들 수 있지.”
묵용감이 또렷이 바라보는 와중에도 그자, 백천범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의 옆을 지나쳐 갔다.